…가면을 쓴 윤희가 가운을 이민지에게 맡기고 발가벗은 몸으로 정물대에 올랐다. 화가들이 신음 같은 감탄을 연발했다. 정물대 가까운 곳에서 이민지가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작은 소리로 윤희의 동작을 리드했다.…
‘윤희. 잘 잤어? 이따가 오후 두 시에 극단사무실로 데리러 갈 테니까 거기서 기다려. 어제 산 원피스 입고 나와. 알았지?’
마치 우주여행에서 돌아온 듯한 들뜨고 야릇한 기분으로 인해 밤잠을 설쳤다. 새벽 나절에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난 아침에 이민지로부터 휴대전화 문자가 날아들었다. 이민지. 이 여자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엊그제 스크랩에서 본 자료 속에서 그녀는 극단 카프카에서 주연을 도맡아 하는 대단한 배우였다. 백두 단장과는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배우라고도 했다.
대개 연극배우들은 어렵게 산다고 들었다. 어쩌다가 TV나 영화에 진출하여 스타반열에 오르는 배우도 있지만, 나머지 연기자들은 곤궁한 처지를 면치 못하면서 오직 예술가의 열정 속에 살아간다고 했다. 그걸 알려준 사람은 윤희에게 연극을 가르쳐 준 장시욱 선생이었다. 그런데 이민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 으리으리한 고급 아파트와 외제 승용차는 뭔가. 윤희를 마치 피붙이처럼 살피려 들기 시작한 이유 또한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투자’라고 했다. 이민지가 한 그 말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어서 마냥 아리송했다. 이민지가 원하는 게 뭐든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인지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윤희는 이민지가 말한 대로 베이지색 새 원피스를 차려입고 극단사무실로 나갔다. 사무실에는 윤희에게 스크랩 정리작업을 시켰던 김미리와 손정우가 나와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윤희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정우가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했다.
“와! 이게 누구십니까? 김윤희 씨 맞아요? 정말 예뻐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네요!”
김미리도 윤희의 달라진 모습에 말이 나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빛에는 감탄이 가득했음에도 끝내 입을 떼지는 않았다.
윤희는 물걸레를 들고 바닥청소를 한 다음 스크랩북을 챙겼다. 몇몇 신문에서 공연이 끝난 ‘화가와 여간호사’에 대한 평가기사가 실려 있었다. 기사들은 백두 단장의 기획력과 이민지 배우의 연기력에 대한 호평이 많았다.
“사무실 앞으로 나와. 참, 거기 단원들한테는 나 만나러 간다고 하지 말고.”
이민지는 정확하게 오후 두 시에 전화를 걸어왔다. 윤희는 손정우, 김미리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길가에 서 있는 하얀 BMW가 보였다. 윤희가 옆자리에 타면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색안경 너머로 한차례 훑어보던 이민지가 말했다.
“옷이 참 잘 맞네. 예쁘다, 우리 윤희.”
그녀가 말한 ‘우리’라는 단어가 따뜻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낯선 도시에서 왠지 든든한 보호자를 만난 것 같은 마음도 생겼다. 이민지의 차는 강남의 빌딩 숲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P호텔이었다. 정문 현관 앞에 차를 세우고 주차요원에게 운전대를 넘긴 이민지는 윤희를 도심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로 데려갔다. 마주 앉은 윤희를 찬찬히 살피던 그녀가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윤희야.”
“네. 언니.”
“경험이 많은 배우일수록 좋은 배우가 되는 거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이제 너의 배우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해.”
배우수업?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윤희에게 이민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은 누드모델 역할을 실습하러 온 거야.”
문득 ‘화가와 여간호사’ 무대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거리낌 없이 누드 연기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뭘, 어떻게…….”
이민지가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먼저 정물대 위에 설 테니까, 잘 보고 너도 따라서 해보는 거야. 할 수 있지?”
윤희는 말문이 턱 막혔다. 당장 누드모델을 하라고? 자신이 없다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놀랐을 거다. 물론, 네가 선택할 문제야. 정말 자신 없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너는 해낼 수 있을 거야. 연기라고 생각해. 정물대는 작은 무대일 뿐이라고 여기면 돼. 그리고 그 위에서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오늘 이 숙제를 할 수만 있다면 너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
윤희는 왠지 모를 이민지의 힘에 어물어물 눌려버린 자신을 의식했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어떤 기운이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이민지는 윤희를 ‘파가니니’라는 이름의 홀 옆쪽에 붙어 있는 ‘STAFF ONLY’라는 문패가 달린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방안에는 몇 개의 의자와 작은 화장대, 커다란 스탠드 옷걸이가 놓여 있었다. 이민지는 익숙한 동작으로 옷을 하나씩 벗어 곁에 있는 옷걸이에 걸었다.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다 벗은 이민지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하늘색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가면무도회 때 쓰는 것 같은 황금색 가면을 꺼내어 썼다. 그리고는 윤희에게도 하얀색 가면을 씌워주었다. 눈을 중심으로 걸치는 나비 모양의 날렵한 가면이었다.
“나는 카르멘이고, 네 이름은 끼미유 끌로델이야.”
이민지는 윤희에게 꼭 기억하라는 듯 가명을 상기시켰다.
파가니니 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창문이 모두 커튼으로 가려진 홀 한가운데에 조명이 내리비치는 원형의 갈색 정물대가 놓여 있었다. 정물대 위에는 빨간 숄이 놓여 있었다. 정물대를 중심으로 스무 명쯤 돼 보이는 남녀들이 이젤을 펼쳐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양과 색깔이 각기 다른 베레모나 헌팅캡을 쓴 사람들도 있었다. 한눈에 화가들이라는 느낌이 묻어났다. 이민지가 들어서자 나이가 좀 지긋한, 초록색 베레모 차림의 남자가 일어나 마중하듯 다가왔다.
“어서 와요, 카르멘.”
“예. 오랜만입니다.”
초록색 베레모를 쓴 그 사람이 윤희를 흘끔거렸다. 윤희가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빨간 베레모 화가가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강남 누드크로키연구회 회장’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쇼팽의 야상곡이 잔물결처럼 홀 안에 번지고 있었다. 가운을 벗은 이민지가 정물대에 올라 능숙한 몸놀림으로 여러 가지 동작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극무대에서는 작은 수건으로 주요부위를 교묘하게 가리던 그녀였는데, 정물대 위에서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고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민지의 누드를 바라보는 동안 윤희는 온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갈등이 요동쳤다. 묘한 긴장 속에 음악 소리 말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화가들은 시선을 정물대와 이젤 위로 번갈아 옮기면서 드로잉북 위에 뭔가를 분주히 그려대고 있었다. 손놀림이 무척 빨랐다.
탈의실에 함께 돌아왔을 때 이민지가 윤희의 의사를 다시 확인했다.
“정 자신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할 수 있어. 꼭 해야 하는 건 아냐.”
“아니에요. 해볼래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윤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이민지가 윤희를 한차례 꼭 안아 주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넌 역시 특별한 아이야.”
가면을 쓴 윤희가 가운을 이민지에게 맡기고 발가벗은 몸으로 정물대에 올랐다. 화가들이 신음 같은 감탄을 연발했다. 정물대 가까운 곳에서 이민지가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작은 소리로 윤희의 동작을 리드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편안해졌다. 어색했던 동작도 서서히 자연스러워졌다. 윤희는 아까 봐두었던 이민지의 몸놀림을 머릿속으로 끈질기게 되새김질했다. 몸 안에서 뭔가 단단한 힘이 조금씩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로소 활짝 펴진 이민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순간 누드모델 세계에 들어선 윤희는 극단에서 또 다른 큰 행운을 얻게 됩니다. 다음 주 ‘[14] 윤심덕 in 나폴리-① 행운의 여신’에서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