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까지 듣고 있던 윤희가 돌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는 외쳤다. “불결하고 천박해요! 언니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러나 이민지는 흥분하기는커녕 쓰디쓴 미소를 띠면서…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밥 한 숟가락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 아침 뉴스에서 경찰서 조사를 받고 나오는 백두 단장과 최현규를 보았다. 수갑 찬 손목을 까만 수건으로 둘둘 말아 가린 그는 초췌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눈빛이 빛난다는 게 신기했다. 그는 예의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게도 신념에 찬 어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오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무죄라고도 주장하지도 않겠습니다. 모든 진실은 제 예술 안에 있습니다. 모두가 예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벌인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예술이 뭔지 아는 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쯤에서 경찰은 기자들을 가로막고 백 단장을 호송 차량으로 이끌고 가서 머리를 누르면서 태웠다. 이어서 최현규가 나타났다. 언제부터 피해자에게 범행을 저질렀습니까? 몇 번이나 그랬나요? 기자들이 잇달아 소리쳐 물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푹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호송차로 걸어가서 올라탔다. 그의 상기된 얼굴을 보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진실은 뭔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나.
망치처럼 생긴 마이크를 든 기자가 두 사람을 싸잡아 뻔뻔하다는 비판을 섞어 마무리 리포트를 했다. 드러난 범죄가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윤희는 마치 석고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펼쳐지는 광경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두물머리에서 나눈 최현규와의 사랑도 동화 속 거짓말 같았다. 그의 매력적인 음성과 부드러운 모습에 온전히 취해서였을까. 윤희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운명처럼 순식간에 다가온 사랑, 달콤한 물거품처럼 피어오르던 그 환희들이 모두 찰나의 꿈이 되어 사라졌다. 최현규, 그는 누구인가. 망연히 누워 있는 것 말고 할 일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왔다. 이민지였다.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윤희야. 많이 혼란스럽지?”
“네. 언니 지금 어디예요? 괜찮은 거예요?”
그렇게 물으면서 윤희는 어쩌면 텔레비전 뉴스에 이민지도 수갑을 차고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자신을 깨달았다.
“나 괜찮아. 걱정했어?”
“네.”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렀다.
“윤희야. 내가 지금 너를 데리러 갈 형편이 못돼서 그러는데, 네가 혼자서 우리 집으로 좀 올래? 택시 타고 와.”
이민지의 목소리에서 흐트러짐이 느껴졌다. 더 물어볼 말이 많았다. 윤희는 얼른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음이 급했다.
*
잠옷 바람의 이민지는 취해 있었다. 식탁 위에는 큼지막한 양주병과 잔, 얼음통들이 놓여 있었다. 열어준 현관문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 나와 윤희를 안아 주었다. 술 냄새가 풍겼다.
“보고 싶었어. 우리 윤희. …그래 얼마나 놀랐니?”
눈물부터 핑 돌았다. 하지만 참았다.
“…아! 참. 벌써 한낮이 다 돼가는데 아침밥은 먹었니? 밥부터 먹어야지.”
“아니에요, 언니. 저 지금 밥 생각 없어요.”
사실 이틀째 굶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장기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워낙 기가 막히는 판국이었다.
“그래? 그럼 이리 와서 안주라도 좀 먹어.”
이민지는 윤희를 식탁 앞에다가 앉혔다.
“저도 술 한 잔 주세요.”
윤희가 그렇게 말하자, 이민지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제 술 배웠어? 먹어도 괜찮아?”
“그럼요. …요정 기생 출신 엄마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잘 취하지도 않아요.”
또 한 번 이민지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기생이었다던 엄마와 알코올 중독에 찌든 아버지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 잘 됐다. 마실 줄 모르는 것보다 마실 줄 아는 게 세상 살기에 훨씬 더 좋아.”
이민지는 그러면서 언더락 잔에다 얼음을 채운 다음 양주병을 기울여 가득 채워서 내밀었다. 발렌타인(Ballantine)이라는 라벨이 보였다. 윤희는 언더락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시원하면서도 독한 알코올 기운이 식도를 할퀴고 내려갔다. 이민지가 윤희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며 빙그레 웃었다.
“안주도 좀 먹어.”
이민지가 치즈 크래커를 손가락으로 집어 윤희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앞에 놓인 언더락 컵을 들어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쏟아냈다.
“연극 끝내느라고 고생 많았어. 이제 비로소 네가 배우가 된 거야. 대단한 재능이었어. 역시 우리 윤희는 내가 본 대로 타고난 광대가 틀림없어…….”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희는 양주병을 들어 자기 잔을 다시 채웠다. 그리고 벌컥벌컥 또 다 마셨다. 차가운 양주가 목으로 넘어가는 동안 곧바로 취기를 퍼뜨렸다.
“얘가 왜 이렇게 서둘러? 천천히 마셔라. 술도 안주도 많으니까, 천천히…알았지?”
윤희의 눈에 비친 이민지가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원망스러운 마음도 솟아올랐다.
“언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시끄러운 일들이 다 사실인가요?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백두 단장님도, 최현규 선생님도 모두 그런 인간들인가요? 아니, 언니는 또 어때요? 언니도 마찬가지인가요?”
이민지가 또 한 번 깜짝 놀란 얼굴로 윤희를 바라보며 말문을 쉽게 열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야릇한 정적이 흘렀다. 술잔을 들어 목을 한차례 축인 이민지가 다시 천천히 말했다.
“윤희야. 우리 배우들이 무대에서 펼치는 연기가 삶의 진실을 얼마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십 프로? 삼십 프로? ……천만의 말씀. 단 일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해. 평생을 무대에서 살아도 마찬가지야. 예술이란 그런 거야. 그 일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칠 따름이지. 나머지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해. 진짜 배우 노릇은 다른 곳에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얘기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휘는 분명히 달랐지만, 왠지 백두 단장이 수갑을 찬 채 기자들 앞에서 읊조리던 말과 어딘가 닮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희가 따지듯 물었다.
“그 고작 일 퍼센트도 안 되는 가치를 위해서 다른 모든 소중한 가치를 다 버리는 게 배우의 길인가요? 김미리가 폭로한 내용은 다 사실인 거죠?”
“그래. 다 사실이야. 아니 김미리가 아는 것들도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해? 너는 좋은 배우가 되는 게 가장 큰 꿈이잖아. 그 꿈이 정말로 중요하다면 다른 건 다 버려야지. 아니, 때로는 잘 활용해야지. 그렇게 해도 닿을까 말까 한 게 이 길인데…그러고 보니 너도 최현규랑 무슨 일이 있었구나.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어른이 돼가는 거야. …그렇게 진짜 배우가 돼가는 거야.”
이민지가 웃었다. 가소로운 듯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듣고 있던 윤희가 돌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불결하고 천박해요! 언니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러나 이민지는 흥분하기는커녕 쓰디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불결, 천박이라고 했니? 그래, 맞아. 하지만 그런 것들도 분명히 인생의 일부분이야. 암…그렇고말고.”
이민지의 인정에 슬며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함부로 말해서 죄송해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언니하고 함께 있기 싫어요. 이만 갈래요.”
윤희는 현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이민지가 나긋나긋 말했다.
“윤희야. 하지만 절망은 하지 마. 네가 살아온 세상은 좁고, 믿고 있는 가치들은 아주 작고 하찮은 거야.”
=> 실의에 빠져 일상의 균형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한 윤희는 좀처럼 헤어나지 못합니다. 내주 ‘[20] 거꾸로 흐르는 강-③ 깊은 어둠 속에서’에서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