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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여우] [22] 루어낚시

[안휘의장편 연재소설] ① 김미리의 세계

  • 안휘
  • 등록 2020.12.18 06:00:00
  • 16면

 

 

 

 

…남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했다. “자자. 첫 잔은 스트레이트. 첫 잔부터 아이스 샤워를 시키는 것은 우리 로얄 살루트 34세 황제 폐하께 대한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

 

청담동에서 김미리가 안내해서 간 호화 빌딩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에서 내리자 고급스러운 흑경(黑鏡) 타일로 장식된 외양을 갖춘 업소가 나타났다. 크지 않게 붙어 있는 ‘아프로디테’라는 상호의 디자인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김미리를 따라 들어간 내부의 색다른 인테리어가 윤희를 압도했다. 출입문 안쪽 벽면을 가득 채운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이 주황색 조명을 받아 휘황하게 빛났다. 질감 양감이 다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서 제대로 모사한 유화 같았다.

“미리 씨 왔어?”

귀부인 태가 나는 양장차림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미인인 데다가 목걸이 귀걸이에서 호화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여성이었다.

“예.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여사장이라는 부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색안경 너머로 윤희를 뜨거운 눈길로 찬찬히 훑었다. 김미리가 얼른 양쪽을 번갈아 보며 소개했다.

“소개할게요. 여기는 저의 동료 연극배우 김윤희 씨. 그리고 이쪽 분은 이 아프로디테 대표이신 비너스 박 언니.”

윤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비너스 박이라는 여인이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김윤희 배우님이라고요? 참 예쁘시네요. 어서 오세요.”

비너스 박이 안내해준 창가 테이블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둘러보니 커다란 룸들이 전 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윤희가 물었다.

“여기 룸살롱이라는 데예요?”

“아녜요. 룸살롱과는 컨셉이 완전히 다른 고급 술집이죠. 웬만한 사람들은 드나들지 못하는 장소랍니다. …나에겐 드라마틱한 연극무대이기도 하고.”

김미리는 술집을 ‘연극무대’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대학로에서 죽으라고 연기해봤자, 오십만 원 손에 잡기도 힘들지. 그런데 여기는 하루 저녁 몇 시간만 연기해도 그 돈 버는 거 일도 아니에요.”

“몸 파는 일인가요?”

윤희가 불쾌한 감정까지 섞어서 반문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김미리는 놀란 눈으로 완강하게 부인했다.

“천만의 말씀. 그런 천박한 일 아니야. 내가 아까 루어낚시 얘기했잖아요? 지렁이낚시는 지렁이가 희생돼야 하지만, 루어낚시는 미끼가 희생되지 않아. 오늘 내가 하는 대로 한번 따라 해봐요. 필요한 것은 연기력뿐이니까. 남자라는 단순한 물고기들을 낚아내는 아주 쉬운 연기니까 어렵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저는 통…….”

“매력발산, 상냥한 말투, 호락호락하지 않는 거드름, 입질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는 순발력 정도면 충분해요. 설명보다 내가 하는 것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이제 낚시터로 가는 거예요.”

김미리는 자신과 윤희의 핸드백을 ‘아프로디테’ 대표 비너스 박에게 맡겨놓고 손지갑 하나만 들고는 윤희를 다시 밖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슈베르트’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아프로디테’만큼은 아니었지만, 거기도 꽤 고급스러운 업소였다. 홀 가장자리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김미리는 손지갑을 열어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말했다.

“이제 막이 오른 거야. 여기는 물 좋은 남자들이 꼬이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지. 괜찮은 사냥감이 달려들 때 고상하게 낚시질을 하면 돼요. 남자라는 단순 동물들은 대개 눈빛으로도 충분해. 우리는 지금부터 대학생 신분이에요. 윤희 씨는 윤정희, 나는 김지미 …배역 이름 잊지 말아요. …우선 저녁 식사부터 해야지. 이따가 술 마시려면 빈속으로는 안 돼요.”

당혹스러웠다. 뭘 어쩌자는 것인가. 김미리의 권유대로 연어샐러드를 시켜서 먹었다. 식사가 끝난 뒤 수입 맥주 두 병과 마른안주를 주문했다. 김미리는 긴장하지 말고 편안한 표정을 지으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홀 안에 나타나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두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흘끔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만큼 앉아 있던 수려한 외모를 지닌 세 명의 남자들 가운데 키가 작은 편인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붙여왔다.

“두 분 참 아름다우시네요.”

김미리는 고개를 들어 한 번 흘끗 쳐다본 다음 고개를 돌려 얼굴을 치켜들고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미안하지만 관심 없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자신이 했던 말처럼, 무대 위에서 펼치는 자연스러운 연기처럼 보였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난 뒤 남자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닙니다. 모두 강남 에이스들이지요. 시간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김미리가 남자들을 하나하나 훑어본 다음 대답했다.

“친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그리고는 윤희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희야. 괜찮겠어?”

정희? ‘윤정희’라는 배역이 이내 생각났다. 하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김미리가 다시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술 한잔 사시겠다는 말로 들어도 될까요?”

그러자 키 작은 남자가 반가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든지 사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우리 그 정도는 됩니다.”

그러자, 김미리가 몸을 뒤로 젖히면서 다시 튕기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단지 친구와 밥을 먹으려고 온 장소이고요. 우리가 가는 단골 술집은 따로 있어요. 거긴 좀 고급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능력이 안 되시면 좀 전에 하신 말씀 취소하셔도 됩니다.”

그러자 키 작은 남자가 자기네 테이블로 돌아서더니 영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윤희의 귀에 ‘네 생각은 어떠냐?’, ‘나는 괜찮다.’, ‘이렇게 예쁜 애들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특히 쟤, 말 없는 애는 완전히 퀸카 엘리자베스급이다.’라는 말이 들려왔다. 세 사람 중 까무잡잡하게 생긴 남자가 벙글거리며 일어섰다. 고급스러운 금테 안경의 도수가 꽤 높아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한번 내뱉은 말 쉽게 뒤집으면 싸나이가 아니지요.”

*

일행은 네온사인이 더욱 휘황해진 거리를 걸어 ‘아프로디테’로 자리를 옮겼다. 사장인 비너스 박이 안내해 간 커다란 룸에는 술상이 이미 차려져 있었다. 테이블 한복판에 ‘로얄살루트(ROYAL SALUTE) 38’이라는 금빛 라벨이 찍힌 보라색 양주 박스가 여섯 개나 나란히 놓여 있었다. 큼지막한 얼음통과 언더락스 잔과 물컵, 수입 음료 캔들도 여럿 보였다. 영국 고전 영화에서나 본듯한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많았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들이 고급안주들이 담긴 큰 접시들을 들고 들어왔다. 머리를 기름 발라 붙인 깔끔한 웨이터들의 외모에 눈길이 갔다. 남자들이 양주병을 따서 잔에 따르는 동안 김미리가 좌중을 이끌기 시작했다. 황금색 왕관 모양의 양주병 마개가 독특해 보였다.

“처음부터 이름이나 학교 같은 거 묻는 호구조사 따위는 우리 강남에서는 구린 짓인 거 아시죠?”

남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했다.

“자자. 첫 잔은 스트레이트. 첫 잔부터 아이스 샤워를 시키는 건 우리 로얄 살루트 38세 황제 폐하께 대한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우선 한잔하고 시작하시죠.”

순식간에 김미리는 일행의 리더가 되었다. 남자들은 그녀의 현란한 화법에 녹아 들어갔고, 하자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양주를 넉 잔쯤 마신 것 같은데, 취기가 불쑥 치솟아 올라왔다. 김미리가 앞으로 나가더니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앞에 가려졌던 검은색 블라인드가 위로 올라가자 번쩍거리는 반주기가 나타났고, 맞은 편 천정에서는 대형 모니터가 스르륵 내려왔다. 숨 가쁘게 전개되는 낯선 상황에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 장편 연재소설 ‘강남 여우’ 연재는 지면계획 변경으로 인해 이번 호를 끝으로 중단되고 추후 서적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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