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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호] '리영희', 언론 개혁을 위해 주목해야 할 정신

2021년 새해 화두 가운데 하나는 ‘언론개혁’이다. 지금처럼 언론개혁이 대두된 적은 없었다. 검·언 유착 의혹이 불거져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나오자 ‘언론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도 함께 커지고 있다.

 

언론의 기능은 국민의 알권리를 실현하고 편중된 시선이 아닌 다양한 시각으로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언론은 왜곡된 정보를 마치 사실인 양 전달하고, 진실 보도 보다는 빠른 기사 노출을 위한 속보 경쟁에 힘쓰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 법조 기자단의 검찰 자료 받아쓰기가 논란이 되는 상황이다.

 

사실 보도에 대한 중요성을 놓치고 있는 지금. 언론인이자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의 삶은 위기에 빠진 우리에게 제대로 된 언론이란 무엇인지 방향을 제시한다.

 

 

◇리영희 선생의 삶

 

리영희 선생은 언론개혁을 논하는데 우리 역사상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일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로 권력층이 부정부패를 일삼던 시기였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이승만 정권의 행태를 세상에 알리고자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이승만의 독재 정권을 폭로하는 기고문을 작성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작은 나라가 처한 비참함을 세상에 알렸다. 마침내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났고, 리영희 선생은 1960년 7월 8일 ‘한국의 새날의 여명이 밝았다’는 제목으로 또 다시 워싱턴포스트에 기고를 보냈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고, 군사정부는 언론을 탄압했다. 박정희 시대의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권력의 손아귀에 정착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을 쏟아냈다.

 

 

당시 조선일보로 이직한 리영희 선생은 1964년 11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다는 특종을 터트렸다. 이 기사로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은 굴하지 않고 사실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1965년 한국은 베트남에 파병을 보내던 당시 정부와 언론은 남베트남인들이 베트콩(남부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핍박당하고 있다며 여론을 유도했지만 리영희 선생은 달랐다. 일찍이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파악한 것이다. 그는 미국 의회 청문회 자료와 미국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을 제시하며 베트남 전쟁과 국군 파병을 비판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사실을 기반해 베트남 파병의 진실을 보도하던 리영희 선생은 결국 박정희의 눈엣가시가 돼 조선일보를 그만두게 됐다. 1971년 ‘펜타곤 페이퍼’가 폭로되며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의 구실을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리영희 선생의 기사와 책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분석한 그의 글은 젊은이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이에 무수히 많은 젊은이가 그의 글을 읽고 세상을 배웠다.

 

1987년 6월 10일. 신군부의 독재를 탄압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6·10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젊은 지도부는 리영희 선생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 진실 추구가 필요한 세상, 다시 조명되는 ‘리영희’

 

1980년대 당시 젊은이들에게 리영희 선생은 ‘사상의 은인’이라고 불린다. 현실과 타협해 부유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리영희 선생은 타협보다는 위험이 있는 순간에도 진실을 찾았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팩트를 전달하려는 리영희 선생의 정신은 언론인들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고 정권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2020년 ‘언론개혁’이 또 수면 위로 올라왔고, 리영희 선생이 회자되고 있다. 진실을 흔드는 보도로 세상을 현혹게 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또 다시 리영희 선생의 정신이 조명을 받고 있다.

 

어떤 세상에서든 사실에 입각한 진실을 추구하는 보도가 필요하다.

 

혹자들은 말한다. ‘언론이 검찰의 개가 됐다고. 검찰이 주는 자료를 물음표 없이 세상에 뿌리고 있다’고.

 

지난 3월 한 종편 방송사 기자의 취재윤리를 위반한 행위가 크게 보도됐다. 이후 사건은 검·언 유착 의혹으로 크게 번져갔다. 당시 기사들에 따르면 해당 기자가 특정 인물의 비리 혐의를 알아내기 위해 법조계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취재원을 협박하는 취재를 했다. 해당 기자는 취재원과 접촉해 가족의 수사를 언급하며 압박했고, 검찰의 선처를 돕겠다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들뿐 아니라 언론계에서도 검언유착 의혹을 밝히라는 성명을 이어갔다.

 

 

언론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언론개혁을 이룰 수 있는 시점이다. 사실 보도를 위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정말 팩트만을 보도하는지, 권력 혹은 기업과의 유착 관계로 진실을 감추진 않았는지 뒤돌아봐야 한다. 

 

작금의 시대는 탈진실의 시대라고 불리고 있다. 일부 언론은 진실보다는 신념과 감정으로 여론을 형성해 사람들을 현혹하고 가짜뉴스를 마치 사실인 양 보도한다.

 

리영희 선생의 ‘권력의 핍박 속에서도 현혹되지 않는 보도정신’이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전 동아일보 기자이자 한길 출판사의 대표인 ‘그해 봄날’의 저자 김언호 작가는 리영희 선생을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이성의 빛이라 표현했다. 김언호 작가는 ‘그해 봄날’의 책을 통해 리영희 선생을 ‘정의와 진실의 협객 같은 사나이’, ‘우리 시대의 청년 정신’이라 말한다. 그의 사상과 열정, 문제의식들은 시대를 고뇌하는 양심적인 실천의 상징이 됐고,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고단한 삶이었지만 시대를 호흡하는 풍운아였다는 리영희 선생의 이론과 사상은 김언호 전 기자이자 작가의 가슴과 머리에 여전히 각인돼 있다.

 

 

◇ 리영희 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출신으로 경성공립공업학교를 다니다 국립해양대학에서 항해학을 전공했다. 이후 경북 안동에 있는 안동중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하다 6.25 전쟁이 발발해 7년간 군에 복무했다. 국군 장교로 임관해 통역업무를 맡았다. 소령으로 제대 후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를 보냈다. 196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1968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 보도를 해 조선일보를 퇴사했다. 1972년 한양대 문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 복직과 해직을 반복하다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교 부교수로 초빙됐다. 귀국한 뒤 1988년 한겨례 신문사 창간을 함께하며 이사 겸 논설고문에 취임했다. 2000년대 후반 간경변으로 투병하다 2010년 12월 5일 81세로 생을 마감했다.

 

 

[ 경기신문 = 박한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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