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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의 인천얘기 11 - 길: 영종~신도 평화도로 착공

 

 길은 사람들이 오가고 온갖 산물과 정보, 문화가 이동하는 문명 교류의 통로다. 아득한 때부터 시작된 모험과 탐험의 역사는 새로운 길 찾기, 그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길이 뚫리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마을과 도시, 문화가 형성됐다. 경계를 넘어 널리 전파되고, 섞여 융합되고, 새로운 것이 탄생되는 것도 길을 통해서였다.

 

기록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길은 창세기에서 왕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고 한 ‘왕의 길’이다. 척박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현재의 중동(中東) 일대다. 북쪽 시리아와 남쪽의 아라비아반도를 잇는 그 길은 수천 년 전부터 캐러밴들이 국제무역로로, 순례자와 군인, 정복자 등 많은 사람들이 이동로로 줄곧 이용해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길 가운데 하나로 전한다.

 

고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제국의 ‘왕도’는 최초의 고속도로라 할 수 있다. 키루스대제가 BC 6세기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터키 앙카라와 고르디온을 거쳐 소아시아 사르데스까지 건설한 장장 2600km의 포장도로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보통사람은 90일이나 걸리는 그 길을 왕의 급사는 9일 만에 달렸다”고 기록했다. 20~30km 간격으로 설치된 역전제도, 곧 말을 바꿔 탈 수 있는 파발덕분이었다.

 

페르시아제국에서 싹 튼 길의 문화가 만개한 것은 로마제국에서였다. 로마를 대표하는 도로는 ‘아피아 가도’다. BC 4세기를 살았던 정치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주도해 건설이 시작됐고,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당초 군대를 쉽게 이동시키기 위한 군사용 목적이었던 도로는 일정 거리마다의 마일스톤(Mile-stone)과 자갈·용암·돌 포장, 6m 너비, 행인을 위한 보도 등을 갖춰 현대의 길과 별반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영토가 넓어지면서 도로도 지속적으로 확장됐고, 이탈리아반도 전역이 촘촘한 도로망으로 연결됐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과 ‘팍스 로마나’가 탄생한 배경이다.

 

로마인들의 중요한 생활터전이었던 로마 가도는 이탈리아반도의 작은 도시 로마가 반도를 넘어 지중해 전체를 그들의 영토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10여 세기 뒤, 몽골이 아시와와 유럽을 아우르는 역사 이래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면서 유라시아대륙의 통합을 이뤄낸 기반도 훌륭한 역참(驛站)시설을 갖춘 ‘길’이었다.

 

가장 오랜 기간 사람들에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길의 대표주자는 단연 ‘실크로드’다. 19세기 후반 독일인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에 의해 이름을 얻은 이 길은 중국 중원(中原)지방에서 시작해 하서회랑(河西回廊), 타클라마칸사막의 남북 언저리, 파미르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고원 등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르는 교통로의 총칭이다. 길이만도 6400여km에 달한다.

 

중국 전한시대(BC 206~AD 25)에 열렸고, 당나라 연간 가장 활기를 띠었다. 상업은 물론 동서문화 교류의 면에서 실크로드가 인류에 끼친 역사적 의의는 지대하다. 많은 스님과 경전이 오가면서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 한국 등 아시아 각 나라에 전파된 것도 이 길을 따라서였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옛날부터 길이 있었다. 삼국시대에 역참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시대 서울과 충청, 경상, 전라도를 잇는 ‘삼남대로’와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의주에 이르는 ‘사신길’은 나라의 중추 도로망이었다.

 

하지만 당시 위정자들의 생각에 길은 그저 사람과 말이 오갈 정도면 족하고, 조정의 명령이 잘 하달되는 역할이면 충분했다. 소통이나 유통의 개념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포장이나 보도 설치 등 인공적으로 ‘길을 닦는’ 일도 드물었다. 잘 닦인 길은 외세의 침략만 용이하게 할 뿐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박지원, 박제가 등 조선후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했던 일단의 실학자들이 수레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점을 통탄한 사실에서 그 때의 도로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길이 나라의 국운 융성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현대의 많은 국가들이 육지길과 바닷길, 하늘길을 열고, 닦고, 관리하는데 숱한 공력을 쏟아붓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전 영종~신도 간 도로 건설공사가 착공됐다. 4.05km 길이로 1245억 원을 들여 오는 2025년 완공 예정이다. 여느처럼 일반도로가 아닌 ‘평화도로’다. 신도~강화를 거쳐 개성, 해주에까지 닿는 서해남북평화도로의 1단계 구간이기 때문이다.

 

사업의 특성 상 ‘정세’와 ‘비용’ 등 문제로 10년 간 우여곡절을 겪다 정부 재정투자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첫 삽을 뜨게 됐다. 2단계인 신도~강화 간은 11.1km로 2차선으로 건설해도 3500억 원의 돈이 필요하다. 정부 재정 투입 여부는 아직 미정이다.

 

남은 사업이 계획대로 잘 진행돼 이 도로가 개성과 해주를 거쳐 평양, 신의주를 넘어 중국, 몽골, 러시아를 통해 유라시아대륙 곳곳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동맥으로 뻗어나가기를 기대한다. / 인천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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