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명예를 누리던 테베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늙은 사제가 왕 앞에 엎드려 모두를 구해달라고 간청을 올린다.
“왕이시여, 직접 자신의 눈으로 이 도시를 돌아보시옵소서. 죽음의 붉은 물결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십니까? 테베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병충해가 휩쓸고 간 농토는 황폐해지고 소들은 병들어 숨을 헐떡이고 있나이다. 여인들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병마는 집집마다 격렬한 기세로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비극에 싸인 테베가 땅을 치고 통곡하고 있나이다.”
테베의 비극, 역병의 책임
결국 이 모든 사태는 테베에 살인자가 있기 때문이며, 그는 다름 아닌 그 나라 왕이었던 라이우스를 죽인 자라는 신탁이 알려진다. 고대 그리스 희곡작가 소포클레스가 남긴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신의 어머니인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은 비밀이 드러나면서 오이디푸스는 이제 왕이 아니라 들판에서 헤매는 방랑자가 된다. 운명의 화살은 그의 눈마저 앗아간다.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낸 지혜자로 떠받들여지고 용기 있는 위대한 왕으로 존경받던 오이디푸스가 마주한 출생에 얽힌 사연은 권력투쟁의 문제였다. 자라나면 왕인 아버지에게 도전해서 칼을 들이댈 아이라는 예언에 라이우스는 어린아이 오이디푸스를 몰래 내다 버리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운명의 고리는 다시 이어져 이 왕가(王家)의 파멸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사건의 진상을 알자 목을 매는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시신 앞에서 어머니가 차고 있던 금브로치 핀으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만다. 그리고는 이오카스테의 동생이기에 외삼촌이자 처남이 된 크레온에게 자기를 추방하라고 애원한다.
이후의 이야기가 담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그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늙고 눈먼 자의 딸 안티고네여,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은 누가 이 방랑자 신세가 된 오이디푸스를 받아줄 것인가? 내가 그리도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랜 고통의 세월에서 배운 게 있다면 내어쫓지 않고 맞이해준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로 그 관심의 초점을 아버지와의 경쟁으로 친부를 죽이려는 “살부(殺父)에 대한 무의식”을 조명했지만 따져보면 그것은 권력자인 아버지 라이우스 왕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도 해결되지 못한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고 죽이는 혈연(血緣)의 종말을 가져온 것이다.
눈먼 자, 눈먼 도시
어머니도 몰라본 채 오이디푸스는 그렇게 자기의 기원에 무지한 존재가 되었으니 눈뜬 자이나 눈먼 자나 다름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이디푸스가 친모 이오카스테의 죽음 앞에서 자기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은 그의 정신세계가 처한 “붕괴의 어두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테베가 겪고 있는 역병의 비극을 왕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라는 노사제의 말을 떠올린다면, 정작 자기의 비극은 못 알아보았으니 그가 더이상 그곳에 머물러 왕 노릇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전한 이 고대 비극의 기억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도 모르고 지내며, 그 무지의 열매로 인해 가족과 집단 전체의 고통이 어떻게 깊어지는지를 일깨운다.
그런 현실은 눈뜨고 있으나 사실은 눈먼 채로 들판을 유랑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고발이다.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맹목의 아수라장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시력 상실로 시작된 도시의 정체모를 역병은 모두를 눈먼 지경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해서 벌어지는 현실의 이름은 “잔혹과 무자비”다.
호메로스가 전한 ‘일리어드’의 한 대목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에서 일어난 숭고한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그 자신이 맹인인 호메로스를 떠올리면, 보이지 않는다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폭력과 재난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피어나야 할 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절친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에 대한 원한이 깊어지면서 무자비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처럼 위장하기 위해 그의 갑옷을 입고 헥토르와 싸움을 벌이다가 죽고 만다. 아킬레우스의 책임이 없지 않은 전투였다.
불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복수심으로 헥토르를 무참하게 절단한 아킬레우스는 죽기 전 장례를 위해 자신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돌려달라는 헥토르의 요청을 짓밟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기 생살을 먹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는 아킬레우스는 이미 악마가 되어 있었다. 고결한 모습이었던 아킬레우스의 변신이었다.
트로이의 늙은 왕이자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소리없이 아킬레우스의 천막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장면은 아킬레우스의 영혼에 충격을 준다. 늙은 왕의 이런 모습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통곡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는 프리아모스의 손을 잡는다.
“아킬레우스는 실컷 울어 더는 울 욕망이 마음에서 떠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노인의 흰머리와 흰수염을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를 깊이 바라본다.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보고 감탄했다. 그가 어찌나 크고 아름다운지 보기에 신과 같았다. 아킬레우스도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의 고상한 용모와 언변을 보고 듣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비극은 숭고한 정신과 진실한 슬픔이 만나는 자리에서 그 힘을 멈추었다. 온몸을 토막내어 마차 뒤에 끌고 다녀, 온 세상에 모욕과 수치를 겪을 뻔했던 헥토르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정중한 예를 갖추어 돌아갔고 아킬레우스의 영혼은 파멸에서 구원되었다.
귀의 귀
함석헌 선생이 오래 전 옮기고 주석을 단 ‘바가바드 기타’는 간디가 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인도의 경전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친족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크리슈나와 아주르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 시작을 여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은 시력이 없다. 전설에 따르면 성자 브야사가 전쟁을 볼 수 있도록 눈뜨게 해주겠다고 하자 혈연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이자 마부인 산자야에게 꿰뚫어보고 꿰뚫어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고 한다. 바로 그 들음의 깊이에 대하여 ‘바가바드 기타’는 “귀의 귀”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건 성서의 예수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와 다르지 않는 화법이다.
형제들이 전쟁이라는 참담한 집단 살해극을 벌이는 잔혹한 상황에서 생명의 윤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는 절절한 기원이 된다. 너무도 어리석은 짓인데 멈출 줄을 모른다. 그것은 자기파멸의 길을 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드리타라슈트라는 보지 못하나 도리어 보고, 골육상쟁에 빠진 이들은 눈을 떠도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날로 난폭하고 잔혹해지고 있다. 언론이 표적을 정하면 그 대상만 바뀔 뿐이지 혐오와 분노가 집결하고 처단이 진행된다. 그런 식의 “과녁 맞추기”에 길들여진 채 “과잉처벌의 사회”가 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쓴 ‘전체주의의 기원’ 그 첫 장이 “반(反) 유대주의”인 것은 까닭이 있다. 파시즘은 누군가를 지목해서 모든 고통의 원인을 그에게 돌리고 사회적 불만을 정치권력으로 만들어 “이성의 붕괴”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오이디푸스의 참회나 아킬레우스의 눈물, 프리아모스의 숭고함은 기대하기 어렵다. “귀의 귀”가 사라진 세상에서 득세하는 것은 손에 든 무기뿐이다.
아르주나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죽이는 것에 무슨 쾌락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비록 흉악하더라도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오직 죄를 지을 뿐입니다.”
테베에 역병이 돌고 있단다. 그 역병의 이름은 무엇일까? 여기서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