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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칼럼] 그럴 수도 있는 일과 그래선 안되는 일

 

일본 조총련계 동포 감독 양영희의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국내에선 아직 개봉되지 않았다. 지난해 DMZ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으며 얼마 전 '4·3과 친구들' 이란 특별상영회에서 소수 관객들에게 소개됐다. 짐작하듯이 4·3 제주항쟁에 대한 얘기이다. 아주 적은 폭의 관객들에게만 알려졌지만 작품 내용이 갖는 ‘참담함의 감동’에 대해 입소문이 퍼져서 인지 많이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꽤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영희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보다 면밀하게 얘기하면 자신의 엄마 강영희 씨의 삶을 가족의 시선으로 그려 나간 작품이다. 강영희 씨는 제주 애월면 하귀리 출신이다. 영화의 시작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강영희 씨가 딸에게 중얼중얼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보이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였어. 총으로 쏴서도 죽이고 아버지 앞에서 애를 칼로 찔러 죽이기도 했어. 눈앞에서 애가 죽은 남자는 눈이 돌아가서는 니들도 인간이냐고 비명을 질렀지. 그리고 그 남자도 죽었지. 그땐 다 그랬어. 진짜 무서웠어.” 강영희 씨는 눈앞에서 목격한 4·3 학살 장면을 딸에게 얘기한다.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자 곧바로 남동생과 3살 된 여동생을 들쳐 업고 군경의 눈을 피해 오사카로 밀항을 한다. 그녀가 재일동포가 된 이유이다. 약혼자는 사살당했다. 일본으로 간 강영희 여사는 역시 제주도 출신의 조총련계 활동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3남 1녀를 낳는다. 그리고 친북인사가 된다. 남편과 강영희 씨 부부는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북송 사업에 적극 참여한다. 아들 셋을 모두 북한으로 보낸다. 그때부터 시작해 수십 년간, 바로 얼마 전까지 북한에 있는 자기 ‘새끼들’을 위해 꼬박꼬박 돈과 현물을 보내고 있다. 북한 북송사업의 비극을 겪고 있는 ‘산증인’이 된 셈이다.

 

영화감독 양영희는 이 모든 과정을 지금껏 평생을 거쳐(그녀는 1964년생이다.) 영화로 담아 왔다. 북송사업의 이면이 갖는 북한의 추악성에 대해서는 극영화 ‘가족의 나라’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북한의 폐쇄성이 갖는 비인간성에 대해서도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등 두 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흔히들 양영희의 북한 3부작이라고 부른다. 양영희 감독은 북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남한에 대해서도 너그럽지는 않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부르며 국가가 인간에게 저지르는 이른바 ‘국가 폭력’에 대해 면도날 같은 비판의 칼날을 내세운다. 그런데 그 비판의 방식이 철저하게 ‘내재적(內在的)’이다. 일단 그 안의 역사 정치 사회에 대한 분석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과거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독일의 정치철학자 송두율이다. 남한의 비민주적 정부와 일부 극우보수 신문이 그를 북한 노동당 서열 몇 위의 인사라는 둥 과장 보도를 일삼아 영원히 이 땅을 떠나게 한 적이 있다. 양영희도 비슷하다. 그녀는 일단 북한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다. 그녀는 북한에 입국이 금지된 상태이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보고 있으면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상황’들, 양영희와 양영희 가족에게만 한정해도 정말 이해가 불가한 상황들이 벌어진 모든 원초(原初)는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이다. 1947년 4월 3일 제주에서 시작된 소요사태는 6·25 전쟁을 거쳐 1954년까지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괴(怪) 단체 가벌인 민간인에 대한 토벌 작전으로 이어졌다. 무려 7년간. 그런데 그건 작전이라기보다는 만행이었다. 군경 토벌대는 아이들까지 싹 죽이는, 일종의 인종청소를 저질렀다. 이 일로 제주도민 3만 명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상이 서북청년단의 일원이었으며 죽기 전까지 교회를 다니던 열렬한 신도였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다니는 서울의 한 대형 교회는 서북청년단이 세운 교회이다. 이들은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를 앞세우며 반공의 기치로 남한 사회의 민주 인사들을 빨갱이로 모는 데 앞장선다. 그런데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소속 목사들이 벌이는 설교를 통해서이다. 한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이 1960년대에 벌인 북송사업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일부 전위부대가 일으킨 정변과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정권들이 흔히들 자행한 오류 중의 하나였다. 자본주의를 거치지 못한 사회주의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극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사회의 물적 토대가 극히 희박한 것이다. 사회주의 독재정권들은 이를 주변 나라의 수탈을 통해 피해 가려했다. 스탈린이 우크라이나를 대상을 벌인 식량 갈취 정책은 3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기근으로 죽게 했다. 이른바 ‘홀로도모르’ 사건이다. 북한도 전쟁 직후 급격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는데 그중 하나가 ‘인간의 노동력’이었다. 북송사업은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게다가 인간이 딸려 오면 일본에 있는 돈과 물자가 같이 온다. 일석이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의 낙원을 만든다는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을 공감하게 해 수프까지 만들어 보내게 한 셈이다. 당시의 시점으로 보면 ‘신박한’ 아이디어였을 수 있었으나 결국 자신의 인민들을 위해 다른 나라의 인민들을 착취한, 제국주의적 약탈의 수법이었다. 사회주의는 실로 뼈아프고 몰지각한 실수를 저질러 왔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고 침략을 일삼는다고, 그래서 일국(一國)의 사회주의만이라도 지키겠다고 자본주의의 못된 습성을 답습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사회주의는 그렇게 끝이 난 셈이다.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안에는 이 모든 지리멸렬한 역사의 과정이 흐르고 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하며 그 시작이 4·3 항쟁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이다. 그런데 얼마 전 대통령 당선자라는 사람이 그 위령제에 지각을 했다. 팔을 훠이훠이 휘저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묵념을 하는 사람들 앞을 지나갔다. 거기에 총리라고 하는 사람은 종종걸음으로 아부하듯 그 뒤를 따랐고. 할 말이 없다. 그럴 수도 있을 때와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있고 그래서는 절대 안 되는 일과 때가 있다. 당선자와 총리(앞으로의 정부와 지금까지의 정부)는 그래서는 정말 안될 일이었다. 아직 5년을 시작도 안 했다. 걱정이 구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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