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승으로 모시는 어른들 가운데 세계적인 육종학자 한상기 박사(1933~ )가 계시다. 서울농대를 거쳐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박사를 하고 모교의 조교수가 되었을 때, 이 젊은 학자는 두 가지의 기회 앞에 섰다. 38세. 하나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식물육종학 연구소, 또 하나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국제열대농학연구소.
그는 이 순간 미국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을 떠올렸다.
"...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일왕불퇴(一往不退:한번 가기로 했으면 결코 물러나지 않음)의 주사위를 아프리카 대륙 위에 던진다. 1970년대 아프리카는 내전, 자연재해, 전염병에, 매해 50만 명이 굶어죽는 슬픈 땅이었다. 역시 굶주림이 가장 크고 시급한 숙제였다. 설상가상, 주식인 '카사바'(cassava)의 고사현상이 전대륙에 걸쳐 벌어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백이면 아흔 아홉은 캠브리지를 택할 것이다. 한박사의 사명은 23년간 단 하루의 결근도 없이 헌신적으로 지속되었다. 슈바이처가 활동했던 가봉의 랑바레네 그의 묘역에는 "슈바이처 박사, 당신은 아프리카에 와서 노벨상을 탔지만, 우리 아프리카를 위해서 한 일은 뭐요?"라 쓰인 비석이 있다고 한다. 그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양성하지 않았다. 전략이 없었거나, 그 정도의 측은지심을 최선으로 여겼거나...
록펠러재단과 포드재단의 넉넉한 지원 외에도 한박사는 캐나다 등에서 여러 종류의 연구비와 후원금을 추가로 유치하여, 석박사 50명, 농촌지도자 700명을 배출하였다. 그들이 다시 1만명의 후계자들을 양성하여 대륙 전역에서 리더로 활동했다.
그는 5년간 70여 개국을 다니며, 끝내 병충해에 내성이 강한 카싸바를 만들어냈다. 이른 바, '수퍼-카싸바'(super-cassava)다. 이역만리에서 찾아온 젊은이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바친 결과로, 대륙 25개국 8억명이 아사(餓死)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세계는 그에게 여러 종류의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그가 가장 큰 명예로 여기는 것은 현지인들이 부여한 '추장(농민의 왕)'의 칭호다. 피부색이 다른 외부인에게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한상기는 그 기나 긴 객고(客苦)의 시간 어느 날, 사하라 사막에 나아가 서 있는 자신을 생각한다. 그 광대무변의 세계에서 모래 한 알에 불과한 미물의식을 체험하지 않은 거인은 세상에 없다. 젊은 날, 태평양 한가운데 떨어진 좁쌀 한 알(滄海一粟)의 실존적 자각이 뼈에 사무친 적 없는 자의 영웅전은 시시하다.
'가지 않은 길'에는 곳곳에 이처럼 위대한 도전과 성공이 예비되어 있다. 이 코스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열려 있다. 육십 넘은 나도 그 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