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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기세춘, 그리고 사상의 길, 실천의 삶

 

-통혁당 사건 이후의 기세춘

 

지난 5월 6일 88세로 세상을 떠난 묵점(墨店) 기세춘(奇世春)에게 1968년 ‘통혁당 사건’은 그 인생에 한 획을 긋는다.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박성준은 15년형 그리고 기세춘은 기소유예가 되었다. 하지만 수사명단에 올라 빨간 딱지가 붙은지라 구직(求職)은 막혔고 대전에서 기계 설계로 생활을 해결하면서 동양철학 연구에 생애를 바친다. 훗날 묵자(墨子) 연구는 기세춘의 명성을 만들어 냈다.

 

 

그는 퇴계 이황과 조선 성리학의 최고 논쟁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15대손으로 잘 알려졌고 아마도 그 내력은 기세춘의 평생 자부심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보게 된다. 그가 한학과 동양사상에 몰두하게 된 까닭도 이런 연유가 강하게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큰할아버지 기삼연은 구한말 의병대장이었으니 이런 가족사의 흐름 속에서 기세춘이 무얼 생각하며 살았는지 알 만하다.

 

기세춘이 통혁당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것은 1963년 그가 『동학혁명연구회』를 만들어 이끌고 있을 때였다. 당시 이 연구회의 학술위원장을 맡은 이가 신영복이었으니 수사당국이 그대로 지나칠 리 만무했다. 둘의 인연은 신영복의 출소 이후로도 지속되고 『중국역대시가선집』 4권을 함께 번역하기도 했다. 방대한 작업이었다.

 

 

60년대 후진국발전론, 평화통일론 등에 대한 학구적 운동을 펼쳤던 이들이 동양사상에 더불어 접목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자주적 근대화론”을 탐구했던 것이다. 그건 서구이론에 지배되고 있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한 주체적 운동의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전통사상의 맥을 짚어야 했다.

 

 

그의 저작 『성리학 개론』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많은 한국학자들이 외국 학자들을 표절하고 어설픈 흉내만 낼 뿐 자기 고유의 학문이 없다. 이들은 정작 자기 조상들에 대해선 아는 바 없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국을 모르니 한국 사람일 리 없으며, 외래사상에 물든 이 땅의 식민 지식인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에 서구 이론이 더해졌으니 사상적 주체성이 망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출세하는 판이었으니 이를 극복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초등교육에서부터 그런 지경이라면 더는 말할 바가 없게 된다.

 

어릴 때 서당을 다녔던 그가 ‘국민학교’에 편입해 국어 교과서를 받아들고는 깜짝 놀란다. 천자문 책의 첫 장은 “하늘은 (뜻이기에) 현모하고 땅은 (생산을 하는 곳이라) 누렇다. 공간적인 우주는 넓고, 시간적인 우주는 공허하다(천지현황 天地玄黃 우주홍황 宇宙洪荒)”로 되어 있는데 교과서에는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가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사유의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기세춘은 전주 사범출신이다. 그곳에서 그는 해방 후 이땅에 온 미 고문관의 작품이 그런 교과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국어교과서에서 우리 민족에게 어떤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는가가 고스란히 파악된 것이다. 이런 자각을 통해 그는 우리의 정신사가 지니고 있는 가치에 눈뜨게 된다. 성리학과 관련해서도 그걸 다시 그대로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 사상을 창조적으로 자기화한 조상들의 태도를 배우자고 한다.

 

그걸 그는 “선비정신”이라고 단언한다. “세종대왕, 퇴계, 율곡, 이순신, 연암, 다산뿐 아니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모두 선비였으며 그 많은 의병들과 독립운동가 그리고 훌륭한 예술가들도 모두 선비였다”고 말한다. 여기에 필요한 자세가 다름 아닌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다. 매일 새로워지려는 노력이다. 기존의 사유체계를 혁신하는 것이다.

 

유학(儒學)이란 본래 정치를 뜻하는 ‘경세학(經世學)’이고 이를 떠받치는 성리학(性理學)은 일종의 신유학운동으로 나타나 경세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성하는 연구가 되었다. 기세춘은 성리학은 “마음과 본성에 대한 공부가 전부”라며 만물이 천리(天理)를 품은 것이 곧 성(性)이고 그 성이 이(理)라는 논리가 선다고 강조한다. 해서 그는 성리학을 이성학(理性學)으로도 바꿔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자면 서양의 정신사적 풍토에서 만들어진 ‘이성(理性 : reason/raison)’보다 훨씬 차원이 깊고 높은 개념을 성리학의 기준에 따른 이성의 개념이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까닭에 서구 정신사에서는 바로 그런 이성의 논리적 범주가 가진 협소성을 극복하기 위해 낭만파도 등장하고 인간의 역사를 넘어 우주적 사유를 지향하는 노력도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서구 사상이 모두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근대사상은 종교적 독단과 맞서 싸우는 가운데 형성된 정신이고 이로써 합리적 사유의 문을 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내용을 지닌 서구의 충격에 의해 유학의 변모가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성리학적 체계 속에서의 대응이지 그 모태를 모두 버리고 서구 사상에 빨려 들어가는 방식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역사의 혁명적 변화가 요구하는 사상적 대안을 내놓는 과정은 자신의 역사와 사상의 현실에 뿌리를 대는 것이 기본이다.

 

조선조 5백년을 거치면서 성리학은 주자학의 교조적 체제로 굳어져 내재적 비판이 절실했는데 이에 대한 응전이 바로 실학이고 동학이며 개화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개화사상』을 쓴 재일학자 강재언 선생은 “유학이 가진 변통(變通)의 논리를 무기로 하여 주자학 일존(一尊)에 의한 일원적 사상체계를 무너뜨리고 사상과 학문을 새로운 역사적 변통에 접근시키려 한 것이 실학사상이었고 그 계승으로서의 개화사상이었다”고 갈파한다.

 

변통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른 사상적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며 주자학 일존이라 함은 그것만이 정통이고 절대적 원칙이라는 주장인데 세상이 바뀌어 가는 마당에 새로운 발상은 필연적이며 이것을 통해 사상의 계승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실학사상』을 쓴 기세춘도 이런 관점에서 실학의 발생을 이렇게 규정한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전쟁수행과 전후 복구를 위해 기층 민중의 협력이 절실했으며, 또한 이들의 수난에 대한 원망과 자각은 서서히 사회제도의 변화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부응하는 조그만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16세기의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 등의 경장(更張) 노력을 숨통으로 삼고 17세기 말부터 변법 운동이 일어났으니 이것을 통틀어 실학운동이라고 말했다.”

 

한백겸, 이수광으로부터 유형원, 이익을 거쳐 다산에 이르고 최한기까지 포괄한 기세춘의 『실학사상』은 읽을 필요가 있는 본문들을 모두 잘 골라 해제까지 해놓아 백과사전인 동시에 실학 교과서로도 매우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이런 노력의 최종판이 그가 별세하기 전 3천매가 넘는 원고가 준비된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설서인 『주역대전(周易大全)』이었다. 이는 주희(朱熹)의 주역해설과 다른 다산의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주희의 해석과 다르면 교리를 어지럽히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낙인찍히는 시대의 역작을 오늘의 시대를 위해 풀었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기세춘은 다산의 사상이 동학혁명의 밑바닥에 숨쉬고 있다고 말한다. “동학혁명(東學革命)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간 수없이 싹터온 근대적 사고의 토양 위에서 일어난 것”이라며 그 사상적 기원을 다산 정약용에게서 찾는다. 성리학의 근본이 우주와 인간의 마음이 일치하는 지점에 대한 깨우침이라고 한다면, 변통의 논리를 통해 새로운 현실에 대응하는 답을 ‘밑에서부터’ 구하는 실학의 노력이 이어지면 그게 곧 동학이 된다는 것이다.

 

동학은 동학대로의 출발 근거가 있고 그 깨우침의 천도(天道)가 따로 있으나 이를 설명하고 이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다산의 사상적 논지가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당대의 사유체계는 기본적으로 성리학이었고 변방적 처지에 있던 이들은 이를 변통한 실학적 발상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요소를 추가하자면 동학이 가진 주체적 의식과 의지다. 중국의 주희를 태산처럼 여기고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으려 했던 조선의 사대부와는 달리 다산이 자기 논리로 성리학을 집대성했다면 이것의 역사적 실천의 장은 동학으로 열린 셈이며 이후 개화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마땅하다.

 

여기에 민중의 주체성을 뼈대로 세우면 농민전쟁을 통한 혁명은 하나의 주체적 근대화의 모델이 되는 경로가 된다. 기세춘이 『4월혁명연구회』와 더불어 『동학혁명연구회』를 일찍이 만들어 주도한 것도 이런 사상적 각성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바로 그런 까닭에 비폭력과 평화, 평등과 민중적 삶, 공동체주의가 하나로 압축된 묵자(墨子)가 그의 사상적 본거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의 선조 고봉 기대승이 퇴계 이황으로부터 받은 편지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와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녀야만 합니다.”

 

퇴계는 기대승이 세파에 시달려 힘들어질까 해서 이렇게 조언을 덧붙인다.

 

“우리는 섣불리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기림을 받는 것이 곧 좋은 소식일 수 없고, 갑자기 관직에 나가 일하게 되는 것이 기뻐할 만 하거나 바랄 만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아낌의 마음이 지극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대승의 능력이 출중해 시기 질투가 많고 모함과 근거없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기대승은 이렇게 토로한다.

 

“재앙은 빈틈이 있을 때마다 쌓이고 화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어나, 앞 수레가 뒤집어진 길을 따라가지 않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부모에게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는 듯 하다. 그러면서도 학문적 논쟁에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여기서 사단칠정론을 새삼 논의하자는 것은 아니고 기대승의 자세를 살펴보자는 뜻이다.

 

“보내주신 ‘사단칠정분리기론(四端七情分理氣論)’한 편을 받았습니다. 깨닫는 바가 많으나 의심을 없애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치는 끝을 보기 어렵고 사람의 견해는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바로 연구하고 살펴서 마땅한 결론을 구해야겠습니다. 따라서 감히 보내주신 변론을 조목조목 자세하게 아뢰어, 선생님께서 끝까지 가르쳐주시기를 바라고자 합니다.”

 

이런 후학(後學) 앞에서 퇴계도 더욱 자신의 이론을 날카롭게 벼르게 되었으며 이 둘의 서한은 조선 성리학 논쟁의 백미를 이룬 것이다. 이런 조상의 삶과 사상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았을 기세춘의 기개와 식견, 그리고 학문적 주체성과 독자성은 그 무게가 남달랐다.

 

기대승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명종 때 그에게 군주가 신하들 가운데 뛰어난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경연(經筵)의 중요성을 강조한 기대승은 어느 날 인(仁)에 대해 왕과 문답한다.

 

“인은 인군(仁君)에게 있어서 과연 지극히 중요한 것이 됩니다. 한번 호령하는 사이와 한번 생각하는 즈음에 다 인을 가지고 마음을 삼아야 합니다.”

 

대단한 말이다. 만인에게 두려움의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왕에게 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에 대한 책망을 더욱 강하게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래야 인군이 될 수 있다는 요지인데 경연의 자리이니 무슨 말이라도 필요하다면 왕에게 할 수 있다고 해도 담대한 마음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다행히 명종이 이를 잘 받아들이는데,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기대승이 다른 신하들에게 미움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기대승의 이 같은 자세는 사실 한 시대의 운명을 걸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세춘 선생의 생애와 저작들은 모두 그런 시대적 운명에 대한 뜨거운 발언이다. 그는 묵자를 가리켜 “ ‘노동운동의 시조'이고, '반전평화운동'의 시조이며, 만민평등론과 인민주권설을 주장한 '민주적 정치사상가'”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기세춘은 성리학에서 인간의 마음과 생각의 혁명적 기준을 발견하고 그 실천의 역사를 파고 들었다. 시대의 변화를 꿰뚫어 읽는 주역해설에 이르면 우리는 한 시대의 당당한 사상가를 우리가 지녔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기세춘과 새삼 만나 새로운 역사를 꿈 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