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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육사와 판검사

 

붉은 것은 오른쪽에 놓고 흰 것은 왼쪽에 놓는다. 가운데는 다식과 약과의 자리이다. 촛불로 어둠을 밀어내고 향불로 길을 닦았으니 돌아가신 당신의 넋이 찾아오실 것이다. 나는 제상에 술과 밥과 국을 올리며 속으로 조아린다. 많이 잡수세요. 아버지. 예순으로 나아가는 아들이 마흔에 멈춰있는 아버지에게 절을 한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마흔 살 청춘이다. 돌아가시던 그날부터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결같다. 아버지는 추석 명절을 이틀 앞두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던 그 날은 내 생일이었다. 내가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오던 바로 그날 당신은 문을 닫고 세상 너머로 사라졌다. 삶과 죽음의 간격처럼 허망한 것이 또 있을까.

 

도회지로 나오기 전까지 우리 식구는 장흥읍내 후미진 곳을 전전했다. 언젠가는 장흥극장 뒷골목 판잣집에 세 들어 살았는데, 나와 형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할 무렵이었다. 그 시절, 남편의 직업을 묻는 이가 있으면 어머니는 ‘재단사’라고 답했다. 말이 좋아서 재단사지 아버지가 하는 일은 양복점 영업사원이었다. 아버지는 치수를 재는 줄자 하나를 들고 완도와 진도 인근 섬들을 훑고 다녔다. 오라는 섬은 없었지만 가려는 섬은 많아서, 아버지의 출장은 기약도 없이 멀고 길었다. 아버지는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맞춤 양복을 팔았다. 아버지가 파는 맞춤 양복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아서 뱃사람이든 농사꾼이든 흥정만 붙이면 만사 오케이였다.

 

아버지의 영업철칙은 신용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외상거래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영업을 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수금을 하였는데,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쌀과 콩, 김과 미역, 소금과 멸치를 양복 대금으로 수금한 아버지는 싸전과 어물전에 내다 팔아 양복점 주인에게 입금했다. 주인과 약속한 액수만큼 입금하고 남은 돈이 아버지의 몫이 되었는데, 섬을 돌아다니며 자고 먹고 쓴 비용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가 아버지가 하는 그것이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술에 취해 ‘홍도야 우지마라’를 목청껏 불렀다. 아버지에게 홍도는 아무리 불러도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섬이었다.

 

취한 밤이면 아버지는 잠든 형과 나를 깨워 앉혀놓고 훈시를 하였다. 새겨들어라. 육사도 좋고 판검사도 좋다. 할 수 있겠냐. 잠이 덜 깬 형과 나는 육사와 판검사로 향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주억거려야 했다.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밤이면 저린 발이 간지러워 오금이 저렸다. 크게 말해라. 할 수 있겠냐. 아버지는 몇 번 씩 다짐을 받고서야 비로소 웃었다. 웃음 뒤에는 어김없이 홍도야 우지마라가 이어졌는데, 그때의 홍도는 다시 잠 들 수 있음을 뜻하는 홍도여서 듣기에 좋았다. 사십여 년이 흐른 지금, 형과 나는 육사도 판검사도 되지 못했다.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던 어머니는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병원에 격리되었다. 어머니와 면회로부터 격리된 형과 나는 아버지 제사상 밑에 놓인 퇴주잔을 끌어당겨 음복하였다. 추석이 내일 모레여서 그럴까. 달은 아직 완전히 차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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