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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예술기행] 에두아르 마네와 뤼에유-말메종

 

“다량의 빛과 그늘을 찾아라. 나머지는 저절로 온다. 그것은 종종 별로 중요치 않다.” 별로 중요치 않은 것, 이것이 현대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예술혁명의 화신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이야기다. 화폭의 새 지평을 연 그를 세기의 지성 에밀 졸라는 경탄했고, 미셸 푸코는 100쪽이 넘는 글로 분석했다.

 

1832년 1월 23일 파리 7구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마네. 부친 오귀스트 마네는 법무부장관의 비서실장이었고, 모친 외제니 데지레는 스톡홀름에 주재하는 외교관의 딸이었다. 근엄한 가문에서 자랐지만 상당히 엉뚱하고 왕정주의자였던 외삼촌 덕에 일찍 예술계에 눈을 떴다. 해군 함장이었던 외삼촌은 에두아르와 그의 동생 외젠을 데리고 자주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그는 조카들에게 대가들의 그림을 비평했고, 특히 스페인관을 찾을 때는 더욱 열정적이었다.

 

해군장교에서 화가로 꿈을 돌린 마네

 

 

열두 살에 마네는 뤽상부르공원 근처 롤랭중학교에 입학했다. 공부에 흥미가 없어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그의 귀중한 자산이 될 앙토냉 프루스트를 만났다. 마네는 푸루스트과 함께 외삼촌을 따라 루브르 전시실을 어슬렁거렸다.

 

열여섯이 된 마네는 해군에 입대하고자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 후 견습 선원이 돼 리우데자네이루행 배를 탔다. 7개월간의 여행 속에서 팀원들과 장교들을 열심히 스케치하며 미술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여행 도중 매독에 걸려 프랑스로 돌아와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결국 부모님의 뜻에 따라 다시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도전했다. 역시 불합격이었다. 두 번의 고배를 마신 마네는 아버지를 설득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미술대학 입학 대신 당대 최고의 미술교수였던 토마 꾸튀르(Thomas Couture)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다. 여기서 6년간 그림의 기초를 연마했다.

 

초년병시절 마네는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모작했다. 친구인 외젠 들라크루아의 허락을 받아 그의 작품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즉, ‘단테의 작은배’를 카피해 그린 것은 유명하다. 한편, 마네는 파리 이탈리아가(街) 22번지에 있는 카페 토르토니(Café Tortoni)를 자주 찾았다. 19세기 대단한 인기를 누린 이 카페는 사교계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마네는 보들레르와 함께 튈르리 공원을 돌아다니며 스케치하곤 했다. 오후 5시가 되면 토르토니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날의 스케치를 이야기하며 찬사를 받곤 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의 큰 미술관을 돌며 다양한 견문을 넓히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은 마네 미술의 원천이 됐다.

 

‘튈르리의 벨라스케스’였던 마네

 

풍속화를 즐겨 그린 마네는 스페인왕 펠리프 4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와 리베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벨라스케스의 도도하고 고귀한 금욕적 낭만에 취한 그는 스스로를 ‘튈르리의 벨라스케스’라고 장난스럽게 칭하곤 했다. 그가 살롱전에 출품한 첫 작품은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루브르 거리를 배회하는 넝마주이 알코올 중독자 코델라의 어두운 초상화였다. 1859년 살롱전에 낼 요량이었지만 들라크루아 외엔 찬성자가 없어 채택되지 않았다. 1862년에 열린 낙선전에 ‘풀밭위의 점심’을 출품했다. 주목을 크게 끌었지만 결과는 또 거부당했다. 나체의 연인과 함께 신사복을 입은 두 남자가 전원 풍경 속에서 앉아 있는 모습은 고루한 신화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아방-가르드인 이 주제는 대중과 비평가의 호평을 받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도발적인 이 작품을 어떤 이들은 중상 모략했다.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이 그린 ‘최후의 심판’의 모작이라는 둥, 티티엥의 ‘야외콘서트’를 흉내 냈다는 둥 왈가왈부 했다.

 

1863년 그는 또 ‘올랭피아’를 전시했다. 티티엥의 ‘위르비노(Urbino)의 비너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나체 여인이었다. 올랭피아는 마네의 최애 모델 빅토린 뫼랑이었다. 럭셔리한 실크숄 위에 다리를 뻗고 어느 신사가 보낸 꽃다발을 흑인하녀로부터 전달 받는 나체의 올랭피아는 또 한 번 스캔들을 일으켰다. 실패와 구설수의 연속이었다. 뉴보이 마네를 올드한 시류가 전혀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밭을 가는 농부에게 때는 꼭 오는 법. 에밀 졸라가 지원병으로 나섰다. 대 문호의 조력과 화가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 스타일은 시너지 효과를 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곧이어 발표한 ‘앙리 로슈포르의 초상화’가 아카데미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마침내 마네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었지만 결국 최정상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마네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일등석은 주어지지 않는다. 잡는 것이다.” 이 말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일생을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1년 후 다시 말하면 그가 죽기 직전 ‘폴리-베르제르의 바(Un bar aux Folies-Bergere)’를 내놓아 그의 커리어에 최고점을 찍었다.

 

뤼에유-말메종(Rueil-Malmaison)에서 그린 이 최후의 걸작은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가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지금도 그 논란은 진행 중이다. 어떤 이는 작품 속의 노신사를 마네 자신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파리의 삶이 폴리-베르제르 술집의 풍경에서처럼 화려하고 유쾌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 고독하고 우울한 것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바에서 서빙하는 현대판 여성의 노예화를 풍자하고 낙원과 인류 타락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대작을 완성한 마네는 그 이듬해 쉰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뤼에유-말메종 황제가 살다간 역사의 도시

 

 

마네는 요양차 뤼에유-말메종으로 갔다. 이동성 운동실조증으로 죽어가던 마네는 치료를 위해 이곳에 정착했다. 파리 서쪽 8킬로 지점에 위치한 뤼에유-말메종은 몽 발레리앙(Mont-Valérien) 구릉과 북쪽 센 강 연안으로 이어지는 뷔장발(Buzenval) 언덕위에 있다. 센 강까지 10킬로의 자연공원 숲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강이 흐르고 햇빛이 쏟아지는 마을 입구의 풍광은 참으로 기가 막히다. 이 풍경을 화폭에 담고자 인상파 화가들은 화구를 매고 앞 다퉈 몰려들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도 질세라 이곳의 경치를 그렸고 그 그림들은 지금까지 명화로 남아있다. 강둑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멋들어진 선술집에서 마네는 친구들과 풍류를 즐겼다. 그 족적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천상의 낙원인 뤼에유-말메종. 황제가 머물렀기에 역사적 귀품이 그윽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472 ha의 평원이 펼쳐진 저택에서 살았다. 집정 스타일의 세간을 꾸리기 위해 파리 외곽에 땅을 찾던 조제핀은 1799년 말메종 성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녀는 곧바로 구입해 아름다운 말메종 궁전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1809년 이혼함으로써 나폴레옹은 떠났고 조제핀만 여기 남아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이곳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정원을 만들었다. 200 여종이 넘는 식물을 사들여 정성들여 키우고 애정을 쏟은 결과 지금은 유럽 최고의 정원이 됐다. 말메종 성 2층 조제핀 방에 가면 그녀의 아기자기한 자취를 엿볼 수 있다. 파리 여행에서 빠트리면 절대 안 될 곳 하나는 바로 이곳이다. 자동차로 12분이면 당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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