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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무협 영화조차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세상

101. 천룡팔부: 교봉전 - 견자단

 

무협 소설의 대부 김용의 방대한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천룡팔부: 교봉전’(이하 ‘천룡팔부’)은 짐작하거니와 내용을 따라가기에 다소 심란한 면이 있다. 무협 소설을 적어도 한 번쯤은 읽어 본 경험이 있어야 전체의 얼개, 그 오라(aura)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호에 9대 문파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면 좋기 때문이다.

 

9대 문파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소림사가 그 문파 중 대표 격이며, 무당파도 들어 본 이름일 것이다. 곤륜파, 아미파 등도 있는데 아미파는 여걸들의 문파이다. 영화는 일명 거지들의 소굴이라는 개방파의 얘기다.

 

무협 영화는 둘 중 하나이다. 매우 흥미롭거나, 도통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데다 이야기 흐름이 너무 억지스러워 도저히 목불인견이거나이다.

 

때문에 무협 영화는, 매우 잘 골라 봐야 하며 이쪽 분야에 제작, 연출, 주연을 맡아 온 이력의 나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의 것을 고르는 게 안전하다.

 

 

이 영화 ‘천룡팔부’는 무협 액션에 이골이 나 있고, 이쪽 분야의 현존하는 최고의 아티스트인 견자단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성룡은 이제 너무 늙어서 은퇴‘각’이다. 앞차기가 안 되는 성룡은 언제부턴가 할리우드 첩보액션 영화 쪽으로 옮긴 상태다.

 

이연걸은 투병 중이며 따라서 대중들에게서 사라진 지 오래다.

 

때문에 정통 무협 액션에 관한 한 현재 견자단이 거의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 견자단은 1963년생이고 현재 60세이다. 그는 아마도 김용의 대하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일을 필생의 업으로 여겼을 공산이 크다.

 

‘천룡팔부’는 앞날이 창창한 개방의 젊은 방주 교봉(견자단)이 어느 날 음모에 휩싸여 살인 누명을 쓰고 무림 모두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것이 기둥 줄거리다.

 

이야기를 뚝 갈라서 두 가지 에피소드로 나눠 보면, 전반부는 도망을 다니던 교봉이 아주(진옥기)라는 이름의 여인을 구하고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다. 그녀는 소림의 누군가가 펼친 무공에 당해 죽음 직전까지 이르지만, 교봉은 내공을 불어넣고 진력을 다해 운기조식하게 함으로써 그녀의 기와 혈을 뚫어 놓는다.

 

교봉은 무림 최고의 화타라는 설신의란 인물을 찾아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와중에 무림 고수 전원과 맞닥뜨려 거의 1대 100 수준의 혈투를 벌인다. 결투 바로 직전 교봉은 이들에게 단의주, 곧 의를 끊는 술잔을 제안해 모두와 술 한 잔씩을 하며 그간의 의리와 정을 끊고 살수(殺手)의 합을 펼친다.

 

무림 중 일부는 그가 누명을 쓴 것을 알고 있지만 무림 전체를 위해 그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교봉이 중원 출신(송나라 사람)이 아니고 원래 거란 족의 사생아라는 이유가 가장 크다. 중원인은 오랑캐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중화주의(中華主義)이다.

 

 

후반부는 교봉이 여인과 함께 자신의 친부모를 살해했다고 믿는 단원정이란 인물을 찾아 복수를 벌이는 내용이다. 이 단원정은 개방파에게서 큰 형님이라 불리는 인물인데, 중원에서 멀리 떠나 대리국이란 나라를 만들고 그 땅을 지배하며 산다.

 

이때부터 영화는 뭐가 뭔지, 뭔 소리인지 모르게 돼 버리는데 단원정의 서신을 위조해 교봉을 음해한 개방파 내 두 남녀의 속셈이 드러나는 가 하면, 이 둘은 모문용이라는 옛 연나라 왕의 아들에게서 지시를 받고 있다는 설정이 나오고, 또 이 모문용이란 자는 송과 거란의 갈등에 교봉과 무림의 싸움을 이용함으로써 망한 연나라를 부활시키고 중원을 다시 차지하겠다는 욕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이 모든 얘기를 영화가 아니라 김용의 소설로 봤으면 (아마도 대략 20~40권 분량이었을 것이다) 모든 음모와 개인의 복수 이야기가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대한 스토리를 영화 한 편에 밀어 넣은 무리여도 너무나 무리인 작품이 돼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OTT용 10부작 드라마로 시즌2 정도가 나오면 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 영화를 볼 때 몇 가지 규칙만 잘 이해하면 비교적 이야기를 대충은 따라갈 수가 있다. ‘천룡팔부’도 다르지 않다. 일단 무협 영화는 할리우드의 서부극과 그 ‘관습적 표현’이 전혀 다르지 않다. 선과 악이 뚜렷하게 이분돼 있고 그 가운데 영웅(무협에서는 협객, 서부극에서는 총잡이)이 있으며, 이 영웅은 처음엔 오해도 받고 외면도 받고 하지만 결국 정의의 편에서 악당들을 물리친다.

 

 

대체로 이 영웅호걸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믿고 사랑하는 여인이 한 명 나오며, 그 여인은 또 극 후반쯤 그를 위해 희생되기도 한다. 극의 해피엔딩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는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이 영웅에게는, 무협에서는 여자의 자매, 서부극에서는 주인공 여자의 주변 인물이 남자의 새로운 연인으로 연을 맺기도 한다.

 

어쨌든 주인공 영웅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홀로 혹은 여인과 함께 싸움 현장을 표표히 떠나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런 법칙 아닌 법칙에서 벗어나는 스토리의 무협물이나 서부극 영화는 이 세상에서 없으며, 만약 그런 작품이 있다면 그건 상업 영화가 아니라 독립 예술 영화의 경우에 해당한다. ‘천룡팔부’는 그 같은 법칙에 아주 충실한 대형 상업 작품이다.

 

특히 그 얼개가 더 비슷한 장르의 작품들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일본의 로망 포르노 계열 작품들이다. 이 영화들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20분에 한 번씩은 ‘반드시’ 섹스나 베드신이 나와야 하는 것이 규칙이다. 무협 영화 역시, 그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돼 어떻게 끝나느냐에 상관없이 적어도 20분에 한 번씩은 무협 액션신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의 하품을 막을 수가 있다고 무협영화 제작자들은 믿고 있다. 그 액션이 얼마나 화려하고 새로우냐에 따라 이런 류 영화가 갖는 완성도, 기술적 진화의 정도가 판가름 나기도 한다.

 

 

무협을 예술적 측면으로 끌어올린 작품이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고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 같은 작품이다. ‘천룡팔부’는 거기까지는 못 미치지만 시도하려 애를 썼다는 점에서 (단의주를 마시며 혈투를 벌이는 장면 같은 것) 그 노력만큼은 평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왜 중국 공산당이 이 같은 판타지 작품을 허가했느냐는 것이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거리가 있어도 한참있는 작품이다. 물론 지금의 중국 공산당도 사회주의와 멀어진 지 오래긴 하다. 그래도 아마 그건 견자단이 2017년 ‘홍콩의 중국반환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친중국주의자로 변신했고 2019년 홍콩시위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콩 영화인들 중 최고 스타 격인 그를 중국 당국이 자신들의 편에 두려 하는 포석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그런 점 때문일까. 영화 ‘천룡팔부’에는 교봉의 내레이션으로 다음과 같은 말이 반복된다.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삶의 모든 문제는 정(情)과 원(怨)때문에 비롯된다.” 그러면서 교봉은 여자에게도 자꾸 이런 얘기를 한다. “모든 일이 정리되면 중원을 떠나 살자. 나는 소를 키우고 당신은 양을 키우고.” 이상하게도 이런 대사들이 자꾸 귀에 꽂힌다. 영화 만들기가 정치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심지어 이런 무협 영화도. 뭐 어쩌겠는가. 무협의 강호가 정치판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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