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나온 ‘록키 발보아’란 제목의 영화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설정이어서 당시의 평단에서는 애초부터 관심을 못 끌었던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 늙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다 늙은’ 록키 역으로 나와 젊고 탄탄한 몸매의 선수를 상대로 다시 한번 링 위에 올라간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록키 발보아’는 1990년에 나온 ‘록키5’ 이후 17년 만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 늙은 영화’인 ‘록키 발보아’는, 물론 흥행은 그다지 잘 안됐지만, 그래도 꽤나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단순한 권투 영화라기 보다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건 상실에 대한 것이었으며 상실감 자체를 극복해 내는 것보다 그걸 어떻게 치유해 내고 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이 하느냐에 대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1977년에 나온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록키1’이 사실은 권투 영화가 아니라 러브 스토리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록키’ 시리즈는 싸구려인 척 알고 보면 그 내면에 상처와 상실, 사랑, 가족의 연대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 휴먼 드라마였다.
‘록키 시리즈’는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의 시초 격 작품이었으며 실베스터 스탤론은 이것 말고도 ‘람보 시리즈’와 최근의 ‘익스펜더블 시리즈’까지 할리우드의 트렌드를 이어 나가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스탤론의 일대기 아닌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슬라이’에 담겨 있다. 슬라이는 실베스터 스탤론의 닉 네임이다. 일대기 아닌 일대기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생애가 다소 그의 ‘입맛’에 맞춰져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고 늘 그렇듯이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상당 부분 그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다큐는 그가 어떻게 ‘록키’란 영화로 성공하게 됐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이한 것은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그의 입지전적인 특성을 제대로 보여 주려 애쓰고 있는데 그건 그가 일종의 싱어 송 라이터로서 각본, 연출, 제작, 주연을 모두 맡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록키 시리즈는 순전히 그가 1인 다역을 맡아 만들어 낸 작품이다. 사람들은 그를 근육질의 액션 스타로만 생각하고, 따라서 거의 대사는 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머리가 별로 똑똑하지 않은 연기자 아닌(연기파가 아닌) 연기자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다큐 ‘슬라이’를 보고 있으면 오히혀 그가 매우 똑똑한 인물인데다 현명하기까지 하다는 점, 삶의 체험에서 녹여 온 인생철학이 꽤나 두터운 부피감을 지니고 있는 배우임을 알게 한다. 그는 영화 속 캐릭터를 대체로 자신이 겪었던 일에서 가져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록키1’에서 복싱 코치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과 함께 훈련을 하자며, 자신이 그를 키워 주겠다고 하지만 록키가 매몰차게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코치는 이전에 그를 체육관에서 쫓아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슬라이’에서 스탤론은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그 씬을 찍을 때 어릴 적 자신을 두드려 패고 못되게 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리허설을 찍었는데 너무 리얼하게 대사와 액션이 나왔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스탤론의 연기가 그야말로 경험과 삶에서 툭툭 튀어나온 것임을 보여 준다.
록키 시리즈의 마지막인 ‘록키 발보아’에서도 아들과 말싸움을 하면서 하는 대사 “이 세상에서 가장 센 건 인생이라는 주먹이야.”도 비교적 애드립처럼 튀어나온 것이다. 실베스타 스탤론이 걸어온 배우 인생, 영화 인생이 꽤나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내는 장면들이다.
‘슬라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46년생인 실베스터 스탤론의 배우 인생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며 그가 아직도 상업적 가치가 높은, 수익성이 있는 스타급 배우임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그는 2023년 최근까지도 액션 영화 ‘익스펜더블4’를 찍었으며 제작과 주연을 맡았다. ‘익스펜더블’ 시리즈는 그가 60대에 들어서면서 창조해 낸 새로운 시리즈로 나이 든 액션 스타들이 총출연하는 작품이다.
이제 브루스 윌리스는 치매에 걸려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아놀드 슈왈츠네거, 제이슨 스태이덤, 돌프 룬드그렌, 심지어 태국의 ‘옹박’인 토니 쟈까지도 소환시키고 있다.
실로 대단한 섭외력인 바, 그건 어디까지나 스탤론의 아이디어가 좋아서였고 그래서 난다 긴다 하는 액션 스타들이 다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스탤론은 어느 날 한물 간 록밴드 콘서트에 갔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 지면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지만 국내 OTT 티빙(TVING)에 탑재돼 있는 ‘파라마운트+’의 시즌 드라마 ‘털사 킹’도 실베스터 스탤론의 최신작이다. 77살인 그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늙고 처졌지만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모든 영화나 드라마는 자신의 삶의 체험과 느낌에 기반하게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듯 이 드라마도 다 늙은 마피아가 새롭게 자신만의 조직을 미국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재건시킨다는 줄거리이다. 이 ‘다 늙은’ 마피아는 과도한 폭력을 쓰기보다는 지략으로, 때론 말의 재간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다.
잃었던 딸과의 관계도 되찾고 가끔 애인과 시간도 보내며 새롭게 만난 젊은이들과 진한 우정도 쌓는다. 그건 마치 실베스터 스탤론 자신이 현재 할리우드에서 다 늙었다고 내쫓겨진 판국이지만 새로운 스태프와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다시 찍을 수 있다며 속으로 소리치고 있는 얘기처럼 들린다. 스탤론의 영화는 스탤론 자신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의 속마음이 다 들여다 보인다.
다큐멘터리 ‘슬라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한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꽤나 성찰적인 작품이다. 스탤론은 무명이었고, 우둔하고 바보 같은 말투에, 포르노 배우를 연상케 하는 새하얀 근육질 몸매를 지닌, 절대 성공할 수 없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캐스팅하지 않는 영화계 시스템에 대항해 자기 스스로 각본을 쓰고 자기 스스로를 주연으로 뽑았다. 일부 제작자들이 시나리오의 값을 높이 쳐주는 대신 감독과 주연은 바꾸고 싶어 했지만 끝까지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생이 가장 센 주먹이고 거기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한 방 맞을 때마다 견디고, 버텨내고, 받아치고 하는 거야,라는 ‘록키 발보아’ 때의 대사처럼 세파를 견디고, 견디고, 견디어 낸 한 사람의 성공담은 꽤나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스탤론은 성공하기 위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성공한 것이다. 인생은 어쩌면 늘 그 반대편에서 동력이 찾아지며 스탤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엉뚱하게도 끝없는 결핍에서 온 셈이다.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의 원천적인 결핍, 곧 부성의 결핍, 모성의 부재 등등 스탤론의 인생에는 죄 모자란 것 투성이었다.
그렇다면 스타가 된 지금은 넘쳐나고 있는가. 이제는 스러져 가고 있음에 대한 결핍=상실이 그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 다큐 ‘슬라이’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비버리힐즈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그가 이사를 나오는 장면이다. 그는 ‘아들과 딸을 위해 마련한 이 큰 집에 이제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았다’며 이제는 잃어버린, 헐벚었던 예술가 의식을 되찾기 위해서 동부로 이사를 간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슬라이’는 우리가 몰랐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진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할리우드에서 스타가 된다는 것, 현대사회에서 성공한 삶을 산다는 것, 진짜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 무엇보다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반추하고, 사유하며, 성찰하게 한다.
물론 ‘록키’와 ‘람보’ 시리즈의 성공은 레이건 정부가 만들어 낸 우파 보수 주의 시대의 특성과 맞물려 있기는 하다. 이번 다큐에서는 그런 사회정치학은 빠져 있다. 그것까지 기대하면서 볼 다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