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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참된 지도자의 삶

 

우리는 예로부터 학문과 덕망이 있는 지도자를 ‘선비’라고 말하였다. 선비는 교양, 인품, 지조 등을 갖추며 도덕적 실천을 중요시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이러한 ‘선비사상‘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서 자신의 이념과 도학을 실천하며 일생을 살았다. 그러나 세상이 어수선고 혼란스러울 때, 또는 자신의 뜻을 펼 수가 없다고 여길 때 선비들은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면서 향촌사회의 풍속을 진작하며 제자를 양성하곤 했다. 이처럼 높은 학문을 하였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뜻을 지키며 떳떳하게 살았던 선비를 ’처사(處士)’라고 불렀다.

 

처사의 예로 꼽을 수 있는 이는 남명 조식(曺植) 선생이다. 남명은 16세기 지리산 근처 덕산에서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학문하며 숱한 제자를 양성했다. 퇴계 이황(李滉)과 동갑이었던 그는 “경상좌도에는 퇴계요, 경상우도에는 남명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둘은 쌍벽을 이루었다. 남명은 60세가 되었을 때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마을인 덕산으로 옮겨 왔다. 그곳 산천재에서 남명은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면서 국가의 안위(安危)와 고통스런 백성의 삶을 걱정하였다, 장차 극악무도한 왜군이 조선을 침략할 것을 미리 알고서,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제자들에게 수립하라며 대책문(對策文)을 지을 것을 요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여 명의 그의 제자들은 의병(義兵)으로 적극 참여했다.

 

남명은 진정한 지도자의 평가를 그 사람의 출처(出處)를 본 후에 결과의 득실(得失)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자신의 처세(處世)의 방향이 분명해야 하고 도리에 합당해야 함을 설파하였다. 그 예로 당시 문정왕후가 명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하고 있을 때, 한양에 올라가서 명종에게 “임금이 성년이 되었으니, 친정(親政)을 해야 하며, 문정왕후는 깊은 궁궐의 과부이고, 전하는 나이 어린 선왕의 맏아들뿐입니다”라고 목숨을 걸며 강하게 상소를 하였다. 이처럼 남명은 자신의 높은 뜻을 직접 충간하는 용기를 지닌 진정한 지도자였다. 훗날 율곡이 평가하기를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기상으로 세상을 내려다본 이로는 남명만한 분이 없다”고 하셨다.

 

조식 선생은 여러 차례 왕의 부름에도 적당한 때가 아님을 밝히며 벼슬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오직 백성들의 생활과 국가의 보존을 걱정하는 데에는 최선을 다했던 지도자였다. 비록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나라의 평안과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헌신한 남명 선생 같은 지도자가 오늘날 배출되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다가오는 총선에 나서는 정치후보자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필자의 솔직한 마음이다, 국가와 백성들에게 헌신하며 대공복무(大公服務)의 정신으로 맡은 책임을 다하려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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