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2 (토)

  • 흐림동두천 23.3℃
  • 흐림강릉 23.2℃
  • 흐림서울 25.6℃
  • 흐림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4.2℃
  • 구름많음울산 21.9℃
  • 흐림광주 24.5℃
  • 흐림부산 22.8℃
  • 흐림고창 23.9℃
  • 제주 24.0℃
  • 흐림강화 21.7℃
  • 구름많음보은 22.8℃
  • 구름많음금산 24.0℃
  • 흐림강진군 23.1℃
  • 구름많음경주시 22.1℃
  • 흐림거제 22.7℃
기상청 제공

[김용구 박사의 맛있는 인천 섬 이야기] ㉑ 그 많던 연평도 조기가 사라진 이유는?

  • 등록 2024.05.19 10:50:59
  • 14면

연평도는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 어장으로 유명했다.

 

조기는 농어목 민어과에 속하며 참조기, 수조기, 부세(흰조기), 흑조기 등으로 구분한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조기라 하면 참조기를 가리킨다. 조기를 염장하여 만든 식품을 굴비라고 한다.

 

 

조기는 겨울에 제주도 서남방에서 월동하다, 3월 곡우 전후로 떼를 지어 북상해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경에 전북 위도 칠산 부근에 머물렀다가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 사이에 산란을 위해 연평도로 이동한다.

 

산란 중에는 떼를 지어 바다 밑 가까이 헤엄쳐 다니다가 개구리 소리와 비숫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물위로 뛰어 올라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정상기, 조선어도보, 일지사, 1977).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조기 어획량을 보면 안강망의 도입으로 1924년 3만 6144톤에서 계속 증가해, 1939년 7만 8863톤으로 최고를 기록한다.

 

연평도 경우, 1938년에 조기를 잡기 위해 모여든 어선 750척 중에서 동력선이 50여 척이었다고 한다(서종원, 조기잡이 어업기술의 변화양상 고찰 ‘그물 어업을 중심으로’, 도서문화 제34집, 2009).

 

어선의 동력화는 우리나라 어선과 어업의 변화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대체적으로 조기는 해방 이전까지 높은 어획고를 유지했다.

 


해방 후 연평도는 전국에 있는 어선들이 이곳에 다 모여 들었기 때문에 항구는 언제나 이중 삼중으로 배가 정박 됐을 정도였다.

 

1967년 연평도 인구는 3000명 정도였으나 조기잡이 때가 되면 1500~1700척 정도의 어선이 모여 어부가 1만 3000명, 접객업자가 100명, 접대부가 200명, 중간 상인이 500명 정도로 인구 이동이 심했다고 한다(이양숙, 연평도 근해의 조기어업, 錄友硏究論集9,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학과, 1967.).

 

연평도 조홍준 씨는 “원래 조기 어장은 북방한계선(NLL: Northern Limit Line) 위쪽에 위치한 대수압도와 소수압도 등이었지. 그래서 어선들이 조기를 많이 잡으려 밤에(조기는 야행성 어종) NLL를 넘어 조업을 나가곤 했어”라고 말했다.

 

 

 

1957년 연평도 조기 어장 지도를 보면, 지도 ①지역 5월 중순 무렵 NLL 위쪽 갈도, 장재도, 대수압도, 소수압도 주변이 조기 산란장으로 약 800척의 배가 조업을 하고 있다.

 

5월 30일쯤 NLL 등산곳 아래 ②지역 40척(현재 NLL 주변) ③지역에 130척, ④지역에 50척 배가 조기잡이 조업을 하고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연평도 조기 어장은 NLL 북쪽에 형성돼 있어 북한과 충돌은 불가피했다.

 

1955년 5월 10일 북한은 조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에 기관총을 집중사격 했다. 또 1958년 4월 29일 다복호는 운항 중 북한의 경비정에 납치됐다.

 

이 밖에 1959년 7월 30일에 대창호외 선박 6척이, 1964년 3월 20일에 보성 1·2호가, 1966년 6월 17일 대성호·순복호·금융호·세창호·축복호 등 5척이 납치됐다.

 

그리고 1968년 1월 23일 동해안에서 미 해군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의해 나포돼 큰 충격을 줬다.

 

어선에 대한 북한의 공격과 납치가 잦아지자,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어민들의 보호를 위해 어로 저지선을 설정하고 3회에 걸쳐 남하한다.

 

1964년 6월 어로저지선을 처음 설정하고 1967년과 1969년 3차에 걸쳐 어로저지선을 남쪽으로 내려온다.

 

어로저지선이 남하에 따라 연평도(인천) 조기어획량은 1964년 1만 6777톤(전국 어획고 36%)에서 1969년 6181톤(전국 어획고 20%), 1974년 4140톤(전국 어획고 8%)으로 크게 감소한다.

 

 

경향신문(1969년 3월 22일자)에는 ‘어로저지선 남하로 인해 2만 명(3천 4백 가구)의 영세 어민이 직접 피해가 예상되며 연간 5억 6천만 원의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어로 저지선이 남하한 후 연평도에서 조기가 잡히지 않자, 어로지도 본부는 1968년 연평도에서 철수하였고 어선 소유자는 덕적도 북리로 가버렸다고 한다.

 

한편 연평도 조기가 사라진 이유 중 하나는 어구, 어망의 도입이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글 : 김용구 박사(인천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인천시 섬발전 자문위원)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