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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 온기우편함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할머니와 살았다. 할머니와 살았던 어린 시절은 그의 가슴에 나이테처럼 새겨졌다. 나이테로 꼭꼭 새겨진 할머니는 그가 대학 다닐 때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이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육 개월을 그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돌아가실 무렵, 할머니는 기력이 없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죽고 싶지 않다고 읊조렸다. 그때, 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을까. “제가 꼭 옆에 있을게요” 말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안아드리기만 했을까. 아직도 그는 그게 늘 안타깝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깜깜한 밤하늘을 촛불이라도 태워 밝혀드릴 수 있을 텐데. 후회는 늘 늦고 더딘 것이라서, 할머니의 영원한 떠남을 그는 쉬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실의 아픔은 할머니 장례를 치른 뒤에 밀어닥쳤다. 스무 살 청춘이 감내하기엔 깊은 상처였다. 휴학하고 군대에 갔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훈련에 지친 이등병의 가슴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골 깊은 나이테가 새롭게 각인되었다. 그러다 문득 떠 오른 게 어린 시절이었다. 그때 그 시절, 할머니는 그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일하러 나갔다. 할머니 일터는 건설 현장 ‘함바집’이었다. 일터로 나가기 전에 할머니는 그의 머리맡에 밥상을 차려두었다. 밥상에는 늘 할머니가 쓴 쪽지가 놓여있었다. “맛있게 먹어라.” 같은 내용의 쪽지였다. 삐뚤빼뚤 쓴 쪽지였지만 다시 생각해도 따뜻한 밥공기처럼 온기 가득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온기 가득했던 할머니의 쪽지에 한 번도 “잘 먹었어요.” 답장을 드리지 못했던 죄송함 때문에.

 

그가 우편함을 만든 건 2017년 2월이다. 군 복무를 마친 그가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만든 우편함이었다. 그는 우편함에 ‘온기우편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렇게 만든 우편함을 그는 삼청동 돌담길에 처음 설치했다. 설치할 때, 그는 우편함에 이런 글귀를 적어 놓았다. “고민을 익명으로 보내주시면, 손편지로 답장을 전해드립니다.” 따로 홍보는 하지 않았다. 홍보할 여력도 그에겐 없었다. 고민을 적은 편지가 한 주에 열 통만 들어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혹시 몰라 온라인 카페에 글을 올려 도움도 청했다. 그와 함께 고민 편지에 답장을 써줄 사람(온기우체부)을 찾는 내용이었는데 선뜻 열 사람이 동참해 주었다. 일주일이 지나 처음 개봉한 온기우편함에는 놀랍게도 육십 통의 고민 편지가 들어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온기우편함은 칠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청동 돌담길에 외롭게 서 있던 우편함은 전국 예순여섯 곳으로 확대되었고, 익명의 고민 편지에 손편지로 답장을 하는 온기우체부는 육백 명으로 늘었으며, 그들이 한 달에 쓰는 답장은 천오백 통에 달한다. 시간이 돈으로 계산되는 시장의 셈법으로는 계산하기 힘든 고마움이다. 돈이 서고 사람이 쓰러지는 자본의 논리로는 더더욱 해석하기 힘든 감사함이다. 계산도 해석도 힘든 고마움과 감사함의 깊이를 나 같은 글쟁이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그들이 있어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음을 짐작할 수밖에. 같은 물을 마셨다고 모두 독을 낳는 뱀인 게 아니라 우유를 낳는 소일 수도 있는 것처럼. 사람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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