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꾸준히 상승한 먹거리 물가가 고환율 여파로 내년에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식량자급률이 낮은 우리나라는 식품 원재료를 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원·달러 환율 상승(원화 가치 하락)으로 원재료 수입 가격이 오르면 식품 물가가 오를 수 있어서다.
정국 혼란으로 물가관리가 느슨해진 틈을 타 기업들이 가격 인상을 서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내수가 위축된 가운데 라면부터 빵과 고기, 과일, 커피에 이르기까지 가격이 오를 경우 장바구니 부담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 치솟는 원·달러 환율…"혼란 장기화 시 1500원 간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9월에만 해도 달러당 1300원대 초반이었으나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당선 이후 1400원대가 굳어지는 모습이다.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에 따른 국정 혼란이 원화 약세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원·달러 환율은 비상계엄 선포 후 지난 4일 새벽 1442.0원까지 뛴 이후 널뛰기하고 있다. 9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거래일 종가 대비 6.8원 오른 1426원에 거래를 시작했다. 이는 개장가 기준으로 2년 1개월(2022년 11월 4일, 1426원)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당분간 1400원대를 유지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전문가들도 고환율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전규연 하나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취약한 국내 경기 기초체력, 트럼프 2기 행정부 무역 갈등 심화를 감안하면 미국 달러가 약세 전환하기 전까지 환율은 1400원대에서 쉽사리 내려오기 어려울 전망"이라며 "환율이 오르면 당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있어 환율 상단은 1430원 내외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환율 변동성은 앞으로 확대될 것"이라며 "1430원을 다시 넘을 수 있고, 그다음은 1,450원으로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탄핵 정국이 장기화될 경우 환율이 1500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노무라증권은 최근 한국의 정치 상황을 반영해 원·달러 환율이 내년 5월 1500원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의 정치적 특수 상황 외에도 각종 대외 여건 악화가 원화 값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 식품·외식업계, "고환율 지속되면 가격 올릴 수도"
식품의약품안전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로 수입된 식품 등은 1838만 톤(t), 348억 달러(약 50조원)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식량자급률과 곡물자급률이 낮은 편으로, 라면 원재료인 밀가루와 팜유, 피자에 들어가는 치즈, 커피 원두 등 각종 식품 원재료를 많이 수입하기 때문에 환율 상승으로 폭넓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2022년 기준 식량자급률은 49.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이다. 곡물자급률은 사료용 곡물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식량자급률보다 훨씬 낮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를 보면 한국의 최근 3개년(2021∼2023년) 평균 곡물자급률은 19.5%로 10여년 전보다 10%포인트(p) 이상 내려갔다.
특히 밀과 옥수수는 곡물자급률이 0%대이며 콩도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밀은 라면과 국수, 빵, 과자 등에 들어간다. 수입 콩은 장류, 식용유, 두부의 원료이며 옥수수는 액상과당의 원료로 음료에 들어간다. 옥수수는 사료 원료라 축산물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수입 원재료는 우리 식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밀가루, 버터, 바나나, 커피, 오렌지 농축액 등은 수입에 의존한다. 치킨 원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튀김 기름(대두유나 해바라기유, 카놀라유, 올리브유 등)도 대부분 수입산이며, 맥주도 원재료인 맥아를 수입한다. 기후 변화로 과일, 수산물 수입도 대폭 늘고 있다.
이미 유지류, 유제품 등 국제 가격이 많이 오른 상황에서 원화 약세까지 이어지는 것은 식품 가격 상승을 압박하게 된다.
식품 물가는 이미 몇 년 전과 비교해 큰 폭으로 올랐다. 지난달 기준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 지수는 121.3으로 기준시점인 2020년(100) 대비 21.3% 올랐다. 지난달 전체 소비자물가지수는 이보다 낮은 114.4였다.
올해 롯데웰푸드, 오리온 등 식품업체들은 과자, 커피, 김 등의 가격을 올렸다. 외식업체들 중에서도 BBQ와 굽네가 치킨 가격을 올렸고 맥도날드, 롯데리아, 맘스터치는 버거 가격을 인상했다.
특히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정부의 물가관리가 느슨해질 경우, 기업들이 가격 인상을 서두를 가능성도 있다.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농심, 파리바게뜨, BBQ 등 식품·외식업체가 앞다퉈 가격을 올린 바 있다.
기업들은 환율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일부 기업은 환율이 더 오르기 전에 최대한 많은 원재료를 확보할 계획이다. 한 종합식품기업 관계자는 "달러 강세가 계속돼 장기적으로 견딜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면 제품 가격을 올릴 수도 있다"고 전했다.
다만 이미 물가가 많이 오른 데다 내수 부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가격을 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영 효율화나 원가 절감으로 버텨볼 것이라는 업체들이 다수 있다. 한 외식 프랜차이즈 관계자는 "불경기, 고물가 상황에서 외식 물가에 대한 정부와 언론이 관심이 크기 때문에 가격을 올리는 데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 고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