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자녀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기념과 축하의 의미로 손목시계를 선물해주었다. 시계는 시간을 본다는 본질적인 의미 외에도 사회적 레벨을 암시하는 척도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그것은 현재에도 그런 것 같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요즘은 시계의 본질적인 용도는 거의 폐기된 것 같다. 스마트폰과 연결하여 사용하는 스마트워치는 시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기록하고 조정하는 역할까지도 한다.
디지털 시계는 현재라는 한 점을 정확하게 표시해주고 숫자를 그냥 읽으면 되기 때문에 시계 읽는 법을 배우는 어린이들이 선호할 수밖에 없다. 아날로그 시계는 60초가 1분, 60분이 1시간, 12시간이 반나절, 시침의 두 바퀴가 하루라는 복잡한 진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 시계 읽기를 배울 때에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3개의 바늘을 가지고 있는 아날로그 시계 속에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의 유기적인 관계가 잘 나타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먼저 시계의 3가지 바늘 중에서 가장 쉬임없이 움직이며 일하는 것은 바로 초침이다. 그들은 한시도 쉴 수가 없다. 비록 연약하지만 초침의 부지런한 족적들이 모여서 분침을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몇 초는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1분의 시간을 위하여 초침은 60보의 걸음을 쉬임없이 걷는 것이다. 마치 사회의 가장 아랫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우리 서민들처럼 말이다.
1분, 2분, 3분….. 분침은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가장 긴 바늘로 시간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몇 시냐고 물어보면, 몇 시 몇 분이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몇 시 몇 분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분침의 숫자는 가장 구체적인 현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왜 시침보다 분침이 긴 걸까? 그 이유가 바로 시간을 알고자 할 때 시침은 12곳 중 어느 곳을 가리키므로 쉽게 인지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시계의 60개의 눈금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야 하는 분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어떤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어 내는 중간층이 바로 이 분침과 같다.
시침은 굵고 짧게 천천히 움직이지만 큰 단위인 시간을 가리킨다. 1과 2 사이에 시침이 있으면 우리는 1시 대라는 것을 안다. 이는 모든 조직, 나라와 인류의 운명을 책임지는 최고결정권자의 역할과 같다. 시간의 단위를 넘긴다는 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같다. 시침은 사실 시계 속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시간은 저 스스로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초가 모여 분이 되고,, 분이 모여 시가 되는 것은 모든 사회의 조직 속에서 수장 혼자서가 아니라 가장 아래에서부터 쉬임없이 자신의 본분을 다한 이들의 노력이 모인 결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망가진 시계는 초침이 움직이지 않거나 초침과 분침이 아무리 움직여도 시침이 까딱거리기만 하고 제 시간을 나타내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어떤 시계일까? 잘 작동하고 있는 시계일까? 초침에 의해, 분침에 의해 정확하게 그 뜻을 받아들여 움직이며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일까?
시계를 바라보자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특히 아날로그 시계에서 3개의 침이 공간감을 가지고 움직이면서 현재의 시간만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의 맥락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전자시계보다 아날로그 시계에 더 애착이 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