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속에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 일행처럼 곁에 서 있거나 저만치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 나를 찍은 사진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넘기다가 마주한 장면이다. 북적이는 사람들로 무엇이 중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화면이 어지럽다. 내 모습이 그들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진을 지우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 속에 들어 있는 나를 보다가, 스마트폰 속 사진을 밀고 당기며 내 얼굴을 키웠다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다.
어느 지점을 잘라내야 할까, 사람을 지워보고 건물의 귀퉁이를 잘라보았다. 나의 손가락에서 몇 번씩 잘려 나갔다가 되살아나는 사람들, 한 번은 오른쪽을 한 번은 왼쪽을 자른다. 그럴 때마다 풍경 속의 공기가 바뀌고 빛이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이리저리 맞추어 봐도 마음에 드는 구도가 나오지 않는다. 사실 마음에 드는 구도라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설정한 것이다. 내 모습이 온전하게 드러나고 내가 의도한 풍경이 살아 있는 것 말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구도는 어떻게 해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와 건물만을 남기고 사람들을 다 지워봤다. 사람이 사라진 공간은 폐허 같았다.
디지털 화면은 손가락 하나로 무엇이든 지워버릴 수 있는 세계다. 풍경도, 사물도, 사람도 삭제할 수 있다. 불과 몇 초 만에 사진이 바뀌고 어떤 장면은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이런 세계는 효율성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그 속에서 가장 쉽게 지워지는 건 결국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기애’를 부추기는 콘텐츠와 ‘손절’이라는 키워드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불필요하다고 여겨진 사람을 잘라내는 것은 사진 편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를 중심에 두면 버려야 할 대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진 속의 나를 돋보이게 하려고 주변을 잘라내 보았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았다.
문득, 나도 누군가의 사진 속에서 배경으로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과 장소, 초점이 맞지 않은 얼굴, 화면 구석의 흐릿한 뒷모습이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또는 어딘가에서 행인 1이나 행인 2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스마트폰 속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아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 노인과 청년이 있다. 이 작은 화면 속에 각자의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다. 길을 건너는 사람, 함께 걷는 사람, 웃는 사람들이 있다. 정지된 화면 속에서도 사람이 가득한 거리는 온갖 생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서로의 삶 속에 흘러 들어간 우리는 누군가의 배경이 되었다. 우리가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도 내가 내 삶의 중심인 것은 변함없다. 우리는 기꺼이 다른 사람의 뒤에서 그들의 삶을 빛내줄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 속 사진들을 넘긴다. 많은 사람들이 담겨 있다. 그동안 수없이 잘라내고 삭제했던 사진이 있었을 텐데, 새삼스럽게 가슴이 뻐근해진다. 아무것도 잘라내지 않은 처음의 사진에서 빛과 소리, 공기와 함께 그 순간의 냄새마저 되살아나는 듯했다. 결국 중심과 배경이 함께 있어야 한 장의 사진이 완성되는 것 같다. 삶 또한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