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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인생의 기적을 허비하지 말 것,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 것

럭키 데이 인 파리 - 우디 앨런

 

제목을 굳이 바꾼 것은 분명 '미드나잇 인 파리'(2011)가 개봉 당시 전국에서 36만 명의 관객을 모은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만 원제인 ‘쿠 드 상스(Coup de chance)’를 '럭키 데이 인 파리'로 둔갑시킨 것은 영화의 이미지, 느낌을 상당히 뒤바꿔 버린 효과를 가져왔다. ‘쿠 드 상스’는 ‘행운의 한방’ ‘뜻밖의 행운’이란 뜻이다. 물론 ‘럭키’라는 단어를 넣는 묘미를 부리긴 했으나 영화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다. 오히려 다소 섬뜩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우디 앨런은 이번 영화에서도 자신의 얼터 에고(분신)같은 캐릭터를 출현시키며, 그래서 그 이름도 알랭(앨런)인데 전작들과는 달리 천연덕스럽고 거침없이 영화 속 자신을 죽여 버린다. '럭키 데이 인 파리'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치정 살인극이다.

 

여전히 우디 앨런식 수다가 심해서 그렇지,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분히 1940년대 필름 누아르 분위기를 가져온다. 어떤 때는 '가스등'(1944)을 보는 것 같지만, 뒷골목의 잔챙이 청부살인업자들을 등장시킬 때는 장 피에르 멜빌의 암흑가 영화를 우습게 패러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 늙은 우디 앨런(1935년생)은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장르의 영화를 이것저것 붙여 콜라주 형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한편으로는 기발하고 한편으로는 이 우디 앨런이라는 감독, 영화적 인용이 너무나도 넘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갖게 만든다. 왜 아니겠는가. 수많은 세월 온갖 영화를 보고, 또 만들던 사람이 아니겠는가. '럭키 데이 인 파리'는 우디 앨런이 이렇게 충분히 기묘한 조합의 영화를 만들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장(멜빌 푸포)과 파니(루 드 라쥬) 부부는 일종의 쇼윈도 부부이다. 장은 어디선가 돈을 많이 벌고 있고 그래서 파리 상류층에 속하는 인물이지만 그 돈의 출처를 두고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대기 일쑤다. 사람들은 그의 부인인 파니를 두고도 역시 ‘트로피 와이프’라며 입방아를 찧는다. 이혼 경력이 있는 파니는 결혼이란 노력만으로 성공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계속되는 설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다. 그녀는 이제 살짝, 장에게서 설렘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이 남자하고는 처음부터 그런 감정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는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알랭(닐스 슈네데르)이다. 둘은 예전에 미국에서 프랑스인 학교를 같이 다닌 동급생이었다. 알랭은 고등학생 시절 파니에 강한 호감을 느꼈으나 표현은 하지 못했었노라고 말한다. 갑자기 만난 두 사람은 오래 사랑해 온 연인들처럼 뜨겁게 불타오른다. 알랭은 작가다. 파니는 옥션에서 일하며 고가의 미술품 등을 거래하는 일을 한다. 파니는 남편인 장의 속물근성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예술적 열정을 알랭을 통해 자신에게서 재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급격하게 알랭에게 빠지게 되고 알랭 역시 파니와의 사랑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의심 많은 장에게 들키게 되고 남편은 이상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아내에게 탐정을 붙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아낸다. 장과 파니 그리고 알랭, 세 명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정작 파니는 남편의 범죄 행각을 깨닫지 못한다. 그녀는 알랭이 자신과의 관계가 너무 깊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자신을 계속해서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남편에게 다시 애정을 가져 보려 노력한다. 정작 남편의 수상쩍은 행동을 알아차리는 것은 파니의 엄마 카미유(발레리 르메르시에)이다. 남편 장은 장모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모 또한 사위가 자신이 사위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됐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위는 별장에 가면 즐기는 사냥을 기회로 장모를 살해할 음모를 꾸민다. 자, 행운의 한방이 필요한 때이다. 영화는 엉뚱한 결말을 향해 이야기를 몰고 나간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디 앨런은 인생이라는 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얘기한다. 삶은 우연의 산물이며 모두의 삶은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기적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자신의 선택과 실수는 다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일에서 우연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운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면 여전히 두렵다는 것처럼 그는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우디 앨런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 상대를 너무 쉽게 판단하고 정의하지 말라. 사랑이 오고 가는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인생이 죽어가는 것,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너무 우울하게 생각하지 말라. 생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우디 앨런은 말년의 나이에 일련의 영화들을 잇달아 만들며 자신의 생을 우회적으로 정리하려 하는 셈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은 자신을 닮은 길(오웬 윌슨)을 통해 '애니 홀'(1977)과 '맨하탄'(1979)을 만들었을 때가 자신으로서는 일종의 벨 에포크(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귀족적이고 화려한 부귀영화 시대)와 같은 것이었음을 술회한 바 있다. '로마 위드 러브'(2012)에서는 자기를 똑 닮은 잭(제시 아이젠버그)이란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이 얼마나 수다스럽고 좀스러운지를 거리낌 없이 까발린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특히 2000년대 이후 나온 영화들의 상당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 또 발견, 재발견함으로써 세계관과 철학을 완성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보인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답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을 웃게 하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디 앨런의 마음 한구석에 비애가 한가득 숨겨져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이번 영화 '럭키 데이 인 파리'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알랭의 비극적인 처지는 우디 앨런의 기이한 항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디 앨런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선정적 언론이 주인공 알랭처럼 자신을 매장한 것 아니냐고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우디 앨런은 수양딸인 순이 프레빈과 결혼하고도 또 다른 입양아와의 성 추문에 휘말린 적이 있다. 그는 그것 역시 우연의 산물이었으며 자신의 선택과 실수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음에도 너무나 세파에 시달리고 그럼으로써 삶의 기적 같은 순간들을 허비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뭐, 그럼에도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말자는 주의다. '럭키 데이 인 파리'는 이제 생의 말년으로 가고 있는 우디 앨런의 자기반성적이고 자기 회고적인 영화이다. 재미있다. 그것이야말로 앨런 영화의 강점이다. 11월 12일 전국 개봉된다. 예술영화관 중심으로 상영될 것이어서 스크린 수가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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