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시골 농촌이다. 덕분에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정서적으로 복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0여 가구 마을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모든 집과 살림이 불태워진 잿더미 위에서 다시 집을 짓고 살아낸 조상들이었다. 그래도 동산에 달이 뜨면 소쩍새는 구슬프게 울어주었고, 낮에는 넓은 밭 위로 종달새가 소리 높이 울며 하늘로 치솟았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타나듯 ‘넓은 벌 동쪽 끝으로 구림천이 휘돌아 나가 섬진강’으로 이어졌다. 그런 자연환경 속에서 경쟁을 모르고 시기 질투 없이 먹고사는 일만을 운명으로 알고 살았다. 반면, 문화적 삶과 문명의 정보는 한없이 뒤졌다. 하고 싶은 공부도 못했고 가고 싶은 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청소년 시절 ‘수확한 촌놈’이라고 무시당하기도 했다. 운명적으로 재탄생을 생각하고 어느 도시에 머물며 개척정신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자존심으로 인한 가슴속 출혈이 심했다. 그럴 때마다 더욱 철학적인 독서활동에 전념했다. 자기 갱신과 정신적 새로운 자아 세포 분열로써 굳건히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닦달했다. 그런 과정에서도 고향이 시골이요 농가이었다는 게 다행이라는 긍정적인 마음만은 있었다. '대지'의 작
묵은해 가고 새해가 된 지 보름이 지났다.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색동옷 입고 동무들과 제기차기 놀이 하던 시절이 지나고부터는 새해를 기다리거나 기대해 본 적 없다. 사람들이 새해의 첫 날인 설에 어떤 의미를 두는 이유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다가올 날이 지나간 세월보다 못하거나 바랄 게 없다면 누가 내일의 희망과 꿈을 설계하며 새벽길 안개를 헤치고 교회로 해 뜨는 곳으로 향하겠는가. 호남의 기호학파 간제(艮齊1841-1922)선생은 ‘성(性)이 곧 이(理)’라는 성리학 본령을 확고하게 세워 성선(性善)에 기반 한 의리(義理)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당대의 거유(巨儒)다. 그가 말했다. ‘나그네로서의 근심을 없애라. 평생 남을 탓해봐야 아무런 득이 없고 잠시라도 자기를 돌이켜보면 여유의 맛(味)이 있으니 어찌하여 이 맛이 있는 것을 버리고 저 무익한 것을 취하는가?'라며 자기 성찰을 명징하게 당부했다. 그리고 '끝까지 하라. 어떤 분야든 5년 10년 지나면 단맛이 나는 게 없다.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끝까지 하는 게 노년에도 최고의 건강 유지법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기와 편지 쓰기를 좋아했다. 교과
막내딸이 바삐 출근길 차에 오를 때 나는 말했다. ‘오늘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딸에게 새 아침 희망적이고 활기찬 언어적 에너지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서재로 돌아와 벽면 해돋이 사진을 본다. 2000년 새 아침은 지리산에서 맞이했다. 아침이라서 새로운 영혼으로 천 년의 새 아침 빛을 가슴으로 맞이하고 싶었다. 아침 기도를 하고 촬영하기 좋은 산봉우리 바위 곁에서 니콘 카메라를 목에 걸고 서서 해 뜨는 순간을 기다렸다. 운해 속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카메라 앵글 속으로 찰칵찰칵! 끌어들였다. 셔터 동작소리가 아침 산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때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아래 검은 부분은 산이요. 중심과 위로는 붉은빛이다. 산 능선의 중간 조금 낮은 중심에는 계란 노른자 빛 태양이 똥그랗게 떠 있다. 해는 멀리서 길을 내고 온 듯 연한 빛이 강물의 곡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을 챙겨보고 새로운 구실과 각오를 다짐하는 순간, 맑아 눈부신 세상에 서 있으면 내 가슴도 맑아져 하얘지는 것 같았다. 순백이 주는 순수한 영혼의 피가 도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새아침 환한 흰 빛으로서의 고요, 맑음, 그 깊이, 무게
산길은 사람의 발에 밟힌 낙엽이 으깨져 흙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생명은 왔던 그 길이나 그곳으로 가는 것인가! 내 나이 적지 않은데 나의 갈 곳은 어디며 언제쯤일까. 12월의 가슴은 무겁고 축축하다. 청주에 사는 수필가에게서 수필집을 보내왔다. 꽤 오랜 인연 속에 한 번도 인사를 거르지 않은 작가다. 그와의 인연은 J신문사 신춘문예 심사를 내가 맡았을 때 그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 결과로써 시작되었다. 그런 그가 내게 금년을 마무리하는 결실의 의미로 보낸 선물 같았다. 존경했던 고하 선생님은 얼마 전 고인이 되었다. 생전의 선생님은 누가 책을 보내오면 꼭 편지나 우편엽서로 ‘잘 받았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연말연시의 인사나 덕담을 편지로 주고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휴대폰 문자 때문에 우체국에서도 경조카드 자체를 없앴다. 을유문화사에서 낸 『동국세시기』 12월을 보면,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믐날 밤(除夕)에는 2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이 대궐에 들어가 묵은해 문안을 드렸다고 적혀 있다. 사춘기를 벗어난 성인으로서 나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이 드는 것을 체감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백목림(白木林) ! 눈 맞아 흰 나무가 된 숲길을 걷는다. 나이 든 가슴에도 설렘이 남았는지 심장이 쫄깃거린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예쁜 인사를 건네고 싶다. 이럴 때 생각나는 그 한 사람. 바닷가에서 만났던 그 사람! 예쁜 꿈을 심어주고 싶었던 그녀. 오빠는 성직자였다. 그 무렵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그 사람 손목을 잡고 잠에서 깨어났던 추억이 누에머리처럼 고개를 든다. 산사의 깊은 밤 종소리나 이른 새벽에 듣는 교회의 종소리에는 거룩한 음이 배어있었다. 큰 사찰의 종소리는 산 넘고 강 건너 먼 마을까지 다가가 듣는 이들 영혼에 스미어 깨어나는 빛 안개 같이 감싸주었다. 종소리는 여운이라는 이름으로 가슴속에 스며들어 맑아지게 한다. 그 소리 정신을 일으켜 세운 뒤 아늑하고 그윽하고 포근하게 하면서 새로운 기운을 안겨주는 힘이 있다. 종은 울려주는 사람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는 초등학교에 땡땡이 종이 있었다. 이 종으로 사환아저씨는 공부 시간의 시작과 끝 종을 쳐주었다. 사찰에서는 수도승이 온몸의 힘을 균형 잡아 시간에 맞게 종을 울리고, 교회에서는 믿음 좋은 분이 교회의 종지기를 하면서 정확한 시간에 종소리를 들려주었다. 지금은 도시나 농촌이나 그 소
‘살아갈수록 외롭습니다. 인간이기에/ 진실할수록 힘이 듭니다. 혼자가 아니기에/ 그러나 가야 할 운명의 길이라면/ 편안한 모습으로 살아갑시다.…’ 이 시는 내가 만들어 애용하는 우편엽서에 새긴 문장이다.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릴 때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하루살이에겐 비가 고통이요 평생의 불행일 수 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감사한 마음으로 견디며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의 깨달음을 준다고 한다. 의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내 삶이 그렇다고 생각될 때는 씁쓸하기만 하다. 자기 운명을 깨닫고 노력하는 사람이 하늘에서 타고난 복 있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논리 앞에서는 ‘그래 그렇겠지’ 하고 승복하면서도 뒷머리가 썰렁해진다. 살아온 날을 생각하다 기억에 의존해 기록을 찾다 보면, 유머 감각을 지닌 고(故)김대중 대통령이 생각난다. 1980년의 봄, 김대중 대통령은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판결을 기다리며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사형일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그 순간 김대중 대통령은 판결을 선고할 때, 재판관이 입을 ‘무’하면서 입이 앞으로 나오면 ‘무기징역’으로써
낙엽이 질 때 가을이 깊어가는구나! 싶었다.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매일 하던 운동들 접은 뒤 산길을 걸었다. 어느 덧 바람은 겨울바람 되어 피부를 자극했다. 세상이 좋아져 옛날 같이 쌀과 연탄걱정이야 덜었다고 하지만, 추위가 닥치면 습관처럼 자본주의에 허기진 서민층과 홀로 사는 사람, 고아원과 양로원 사람들 걱정이 앞선다. 젊은 시절, 태 자리를 뒤로하고 개척정신으로 이곳저곳 헤매며 죽지 않을 만큼 고생을 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피멍이 든 것은 젊은 영혼의 자존심이었다. 그때 만난 책이 『인생의 선용(善用)』이다. 이 책에서 읽은 한 문장 「행실이 사람을 성공시킨다.」는 것. 이것이 내 가슴 근육을 굳건하게 해 주었다. 홀로 살아가며 어찌 서러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당하고 겪은 만큼 정신의 면역력이 생기고, 내적으로 강인한 실천력과 지혜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지금 살고 있는 고장에서 아이들 낳아 교육시키며, 평생 우러를 스승을 만나 인문학적으로 보람 있는 삶을 일궈왔다. 덕분에 평생교육원이나 인재육성개발원에서 강의할 때는 ‘인생의 삼대(三大) 만남’을 유머 있게 말하면서 생각의 눈을 달리하도록 한다. 만남의 첫 번째는 부모와의
숲으로 이어진 길을 걷고자 아파트 뒷문으로 나섰다. 어린이 놀이터에 자리 잡고 있는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들이 길가 콘크리트 벽 쪽으로 몰려 쌓여 있다. 가을이면 도심의 길가 가로수 아래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엔 다른 시선으로 씨앗에 대한 생각을 안고 걷게 된다. 그동안 나는 이 은행나무의 잎 지는 모습에만 눈을 주었지 식물로서 생식생장을 위한 씨앗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은행나무는 아름드리나무가 될 때까지 한 해 한 해 버텨오면서 가을이면 후대를 위한 나무를 생각하며 열매 맺어 지상으로 내려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은 일찍부터 은행나무 열매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방의 땅이 온통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 씨앗이 비집고 들 틈이 없었다. 그래도 은행나무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본능적으로 ‘행여나’하고 열매를 내려 보냈을 것이다. 나무는 그 열매가 씨앗으로 움틀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이러한 자연 현상과 악한 사회 환경 속에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청년들의 의식이 싹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결혼을 한다 해도 아이는 갖지 않겠다는 생각 또한 그 영향이 아닐까 싶었
때가 때인지라 문단의 행사도 많고 문학상을 위한 심사도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어젯밤에는 ‘〇〇수필문학상’ 심사를 하게 되었다. 세 사람이 하는데 심사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응모작을 깊이 있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수상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적 정성과 ‘수필은 느낌의 시’라는 글맛이 부족하여 수필의 미래가 염려스러웠다.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라는 정신에는 못 미쳐도 누가 보아도 수상작의 무게 중심은 느껴져야 되는 법. 심사를 미루고 한 잔 두 잔 목울대로 넘긴 막걸리에 ‘안마시면 안 되냐’는 제정신의 쓴 소리를 듣기도 했다. 돌아와 문을 따고 아파트 거실로 들어서니 냉장고 바람 같은 차가움이다. 불 밝히고 거실 의자에 앉으니 누군가가 그리웠다. 손을 붙잡고 이야기는 못한다지만 전화 통화라도 하고 싶었다. 주변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부산 친구와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허허한 가슴의 술기운을 덜어낼 수 있었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에는 기도하는 자신에게, ‘겸허한 모국어로 채워달라고’ 했다. 견고한 고독 속에 살면서 기도하고 모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김현승뿐이겠는
나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숲 속으로 가라’는 말과 같다. 집 근처에 물기 마르지 않고 사철 푸른 산 속 숲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긴 시간 들이지 않아도 숲의 품에 안기어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숲속 공기는, 우선 콧속을 통해 호흡기와 폐를 맑히며 냉기 어린 맛감각이 나의 두뇌를 일깨워 사유하고 상상하며 정리하게 한다. 그런 뒤 귀한 문장을 얻어내는 길을 닦아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달 초순이었다. 체육회관 3층 헬스장에서 달리기 운동을 하던 중 유리창 밖으로 ㅇㅇ초등학교 정문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운동을 멈추고 더 가까이 가서 보았다. “서이초 선생님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합니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그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ㅇㅇ초등학교. 49제를 맞이하여”라고 검은 천에 흰 글씨로 쓰여 있었다. 사노라니 못 볼꼴을 본 것이다. 초등학교가 장례식장도 아니요 교사가 무슨 독립운동가도 아니며 역전의 용사도 아니다. 그런데 왜 목숨을 버렸을까. 어린이들은 한 생명으로서 푸릇푸릇 움 돋아 가정에서 핀 꽃 학교라는 묘판으로 옮겨져 교정에서는 사랑의 함성 가득하고 행복하게 웃는 어린이들 모습으로 평화로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문에는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