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기’가 된 죽은 자의 이름 인류학, 민속학, 종교학, 문학 그리고 예술 등의 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J. G. Frazer)가 쓴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에는 여러 “금기(taboo)”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는 호주의 어느 원주민 공동체에서 죽은 이의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경우가 보고된다. 망령(亡靈)에 대한 공포 때문인데 이는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관습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슬픔과 공포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지게 마련이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의 이름은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붙여져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부족은 아기가 탄생한 지 7일 뒤 여러 조상의 이름을 의미하는 쌀들을 물잔에 떨어뜨려 그 쌀의 움직임을 보고 아기와 인연이 닿는다고 여긴 이름을 선택한다고 한다. 금기에도 수명이 있고 그건 시간의 통로를 지나 사회적 생명을 얻어 재생되기도 하는 것이다. 《황금가지》의 부제는 “마술과 종교에 대한 연구(A Study in Magic and Religion)”라고 되어 있다. 그 제목대로 이 책은 아득한 시절에 살았던 인간의 원시적 정신사를 다룬 것이기도 하
- 1898년, 미국 제국의 길로 들어서다 1898년은 우리에게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3년 뒤인데 이때 태평양 가로질러 미국은 매우 중요한 전환기를 겪는다. “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가 되는 것이다. 이 당시 쿠바와 필리핀은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였다. 1898년은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이 일어났고 이로써 쿠바와 필리핀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독립? 그런데 그건 말뿐이었고 종주국(宗主國)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1898년 2월 15일, 미국의 전함(戰艦) 메인(Maine)호가 쿠바의 하바나 항구에서 의문의 폭발사고를 겪는다. 이는 스페인의 공격이라고 즉각 선언되고 미국의 침공으로 스페인과의 전쟁이 벌어진다. 필리핀 마닐라 항구에서도 미국의 함포사격이 시작되고 스페인은 쿠바, 필리핀 이 두 전선에서 모두 패한다. 이로써 스페인은 몰락하는 제국이 되었다. 메인호 사건은 세월이 한참 흘러 1964년 북 베트남 해안에서 미국의 매독스(Maddox)호가 공격받았다며 베트남 전쟁 개입을 공식화하는 것의 원형이 된다. 허위로 만들어진 사건이 선전포고의 근거가 된 사례였다. 메인호 폭파 조작사건
- 동아시아 문명권의 충격 우리에게 19세기“근대의 충격”은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진로설정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 시기 서구는 단연 우리보다 훨씬 앞선 문명체제로 받아들여졌다. 가령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는 병자호란 이후 북벌(北伐)의 대상으로 삼아 오랑캐로 알고 있는 청(淸)으로부터 배울 게 있다는 18세기 말엽의 각성이었다. “이십년을 힘써 중국을 배운 뒤에 이러쿵저러쿵 해도 늦지 않는다”라고 했던 박제가의 말은 동시대 박지원이 남긴 《열하일기》의 내용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지녔다. “중국 변방의 이런 시골조차 이리도 번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충격은 연암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한다. 물론 여기서 그 배움의 직접적인 내용은 청나라보다는 그곳에 융해되어있던 서구의 지식과 기술체계였다. 그러나 그런 논지는 개혁정치에 무관심했던 주자학이 지배하고 있던 현실에서 제대로 먹혀들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뭔가 크게 사변(事變)적 사태가 일어나야 정신이 번쩍 드는 법이다. 동아시아는 서구의 습격을 강력하게 받게 된다. 마침내 청조(淸朝)의 소멸로 이어지는 아편전쟁(1840년)이나 일본 막부정권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에도 앞바다의 미국
- 전쟁의 후방기지 “대한민국 정부는 대일본 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십분 편의를 제공하고 대일본 정부가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軍略)상 필요한 지점을 수의(隨意) 수용할 수가 있다.” 여기서 ‘전항’은 바로 앞의 항목으로 “대일본 정부는 대한국의 독립 및 영토보존을 확실히 보호한다”를 가리킨다. 이게 도대체 뭘까? 게다가 어떤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역에 대한 수용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는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간 일본이 육군 2개 사단을 조선 땅에 상륙시키면서 맺은 이른바 동맹조약의 내용이다. ‘동양평화’를 내세워 “대한제국은 일본을 굳게 믿고 시정(施政)개선에 관해서도 충고를 받아들일 것”을 제1조로 못 박은 협정으로 말이 협정이지 강제체결된 조약이었다. 1904년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한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이름의 식민지 체제를 장착하기도 전에 조선은 이미 국권을 고스란히 상실했던 것이다. 조선땅 천지를 전쟁의 후방기지로 삼아 어디든 일본이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압박에 저항하지 못했으니 그다음 수순은 정해져 있었다. - 러일전쟁,
- 홍기문의 질문 이게 무슨 말일까? “조선의 역사가들은 은(殷)의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온 것을 거부하기에 골몰한 데 부사년(傅斯年) 등 한토(漢土)의 청년 학자들은 은이 조선 내지 만주의 이족(夷族)과 동족임을 증명키에 급급하다.” 홍기문(洪起文)이 그의 《조선문화총화(朝鮮文化叢和)》에 남긴 글이다. 그는 《림꺽정》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아들로 훗날 아버지와 함께 북에서 머물러 《조선왕조실록》 번역 작업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조선역사문법연구》라던가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서인 《정음발달사》와 같은 저작은 훗날의 학자들에게도 뛰어난 평가를 받게 된다. 이들 부자(父子)가 북에 있게 된 까닭은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 연석회의와 관련이 있다. 분단과 전쟁을 가져올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회의에 김구와 김규식을 따라 참여한 뒤 그대로 그곳에 있게 된 홍명희가 큰아들 기문에게 평양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정책은 이미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한 정치구도를 짜나가는 판이었으니 독립운동을 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이 설 곳은 날로 좁아지고 있었다. 미국의 냉전정책이 구(舊) 파시스트세력과 손을 잡고
- 예수와 단군 어느 학교의 교가(校歌)다. 어디일까? “한뫼가 우뚝코 은택(恩澤)이 호대(浩大)한 한배검의 깃치신 이 터에/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明洞)/웅장한 조상피 이 속에 흐르니 아무런 일 겁낼 것 없구나/정신은 자유요 의기가 용감한 나의 명동” 그렇다. 시인 윤동주가 나온 만주(동북 3성) 용정에 있는 명동촌의 명동학교 노래다. ‘한뫼’는 큰 산(백두산)이고 ‘한배검’은 단군왕검이라는 뜻이다. 그 첫머리를 요즘 말로 풀자면 “큰 산이 우뚝 서 있고 은혜와 축복이 차고 넘치는 단군 임금님의 힘이 끼쳐 이루어진 이 터에”로 풀 수 있다. 기이하지 않은가? 명동학교는 기독교인 김약연이 1908년 세운 학교인데 난데없이 왜 단군일까? 그런데 이 명동학교 교실 벽에는 예수와 단군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하니 이를 또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 목사였던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삼촌이다. 명동학교의 전신(前身)은 “서전서숙(瑞甸書塾)”으로 ‘하늘의 기운이 상서로운 땅에 세워진 글방’이라는 의미를 가진 민족교육기관이었다. 1906년에 대종교(大倧敎)에 소속되어 있던 서일, 이상설 등이 중심이 되어 세운 학교였다. 그러나 그다음 해인 1907년
“검찰의 수사 과정은 블랙박스와 같다. 특히 구속 수사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검찰의 의도대로 유죄나 무죄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물론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틀렸다는 게 드러날 때도 종종 있지만 이미 여론재판은 끝난 뒤다.” 뉴스 타파의 심인보, 김경래 기자가 쓴 《죄수와 검사》의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기가 질린다. 없던 죄가 생기고 있던 죄가 덮어지는 과정은 지옥이다. 이런 일들이 자세하게 알려진 건 어느 죄수의 일기장이 조금씩 뜯어져 외부로 넘겨 보관된 결과다. - 죄수와 검사 2009년 4월 30일 전임 대통령 노무현은 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게 된다. 5월 14일 권양숙 여사가 1억원짜리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뉴스가 이어지고 23일 부엉이바위 아래로 몸을 던진 노무현 대통령의 시신이 발견된다. 이명박 정권의 검찰이 그의 목을 쥐고 있었고, 그런 이명박을 훗날 “쿨”했다고 칭찬한 자가 검찰총장이 되었다가 이제는 대권주자로 등판 준비를 하고 있다. 무슨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걸까? 총리를 지냈던 한명숙은 공동장의위원장을 맡아 “님을 지키지 못
우리나라에 “처녀귀신” 이야기가 그토록 오래 전해내려온 까닭은 달리 있지 않았다. 고을의 힘센 자들이 사건을 덮었기 때문이다. 그 처녀귀신 이야기가 쌓이고 쌓이면 어떤 이야기가 태어나게 될까? 《춘향전》이렷다. 죽은 다음에 해결하면 뭐하는가? 살아생전에 한이 생길 일을 풀어야 세상이 제 도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장원급제하여 어사로 밀행하고 있던 이몽룡은 거지꼴로 변장하고 관아에 들어선다. 백성들은 가난에 쪄들어 있는데 사또 변학도는 여기 저기 고을 수령들을 불러다가 상다리 부러지게 생일잔치를 벌였겠다. 거지 이몽룡은 밥값으로 시 한 수 읊는다. “금준미주(琴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낙시(燭淚落時) 민루락(民淚落)이요,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라.” 원님 생일 잔치에 뭔 난데 없는 소리인가? “금 술잔에 담긴 맛좋은 술은 수많은 백성들이 흘린 피요, 옥으로 만든 쟁반에 그득 담긴 보기에도 입맛 다시게 하는 안주거리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것 아닌가? 술상 밝힌 촛농 떨어지면 백성들의 피눈물도 떨어지고, 너희들이 신이 나 난리 부르스치는 자리마다 한맺힌 소리 드높은 줄 모르느냐?” 이 모든 사태를
“정곡을 찌르다”는 본질의 핵심을 꿰뚫었다는 말인 건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곡은 무슨 뜻일까? 바를 “정(正)”자에 물새인 고니를 뜻하는 “곡(鵠)”자가 합쳐진 단어다. 그러면 왜 난데없이 고니인가? 화살을 쏠 때 과녁의 한 복판이 정곡이다. 활을 바르게 잡고 날아가는 새도 맞춘다는 실력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래서 그곳에는 고니 모양의 가죽을 붙였다고 한다. 조선실학의 거장인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남긴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적혀 있는 “정곡(正鵠)”의 유래다. 자기의 저서를 “사설(僿說)”이라고 한 까닭은 또 무얼까? “사(僿)”가 잘게 쪼개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저 소소하게 잡문을 모아놓은 정도라고 겸손히 부른 데서 나온 이름이다. 하지만 이 책은 고증을 기반으로 백과사전처럼 천문학과 지리, 역사와 시, 천주교와 서양과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담고 있다. - 성호 이익의 실득지학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가 주자학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질문을 통해 점검하고 실제적인 삶을 위해 유용한 지식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것들이 기초가 되어 백성들을 위한 경세(經世)의
스페인의 코르도바(Cordoba)와 톨레도(Toledo)는 고색창연한 도시다. 중세의 역사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이미 고전(古典)인데, 파리대학이 유럽 중세의 지적 탁월함을 이루기 전에는 바로 이 두 도시가 쌓아올린 학문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랍어로 쓰여진 그리스 철학과 과학은 훗날 르네상스의 젖줄이 된다. 12~13세기 유럽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새삼 발견하게 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걸까? 8세기 이후 15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남부는 이슬람의 영역이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접한 지중해를 거쳐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은 한때 로마제국의 판도였으나 제국의 몰락으로 이슬람이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도권은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기독교, 유대교를 핍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면서 배워나가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 코르도바와 톨레도의 잔해 하지만 이슬람을 축출한 15세기 스페인은 잔혹한 국가로 변모했다. 종교재판은 세비야를 중심으로 광기처럼 번져나갔는데 이 징벌로 적지 않은 이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산채로 불태워져 죽어갔다. 사상과 신념은 통제되었고 공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