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유엔 공용어에 들어갔다는 뉴스가 SNS를 타고 널리 퍼졌다. ‘한류열풍으로 기존 공식 언어의 하나인 프랑스어보다 사용자가 많은 한국어를 UN에서 표결,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일이었다. 왜 이런 중요한 뉴스를 주요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걸까. 확인을 해보니 역시 가짜뉴스였다. 좋다 말았다. 현재 유엔의 공용어는 여섯 개다.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 중국어, 아랍어다. 유엔의 모든 문서가 이들 6개어로 작성, 배포된다. 현재 자국어를 유엔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려 노력하는 나라는 인도와 일본이다. 15억에 육박하는 인도의 인구는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다. 1억2000이 넘는 일본의 인구는 세계 11위다. 한국은 이들 두 나라에 비해 인구수가 적다. 남한의 인구는 5200만 명으로 세계 28위다. 북한의 인구는 2600만 명으로 세계 56위다. 남북한을 합하면 7800만으로 인구 8300만이 넘는 독일을 잇는 18위다. 하지만 유엔 공용어가 인구수에 꼭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언어의 국제적 위상과 문화적 영향력이 주요한 변수임은 유엔의 프랑스어 기념일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공동체인 ‘프랑코 포니’ 출범일인 3월
이번 대선에서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는 두 후보에 대해 지지자들은 상대 후보의 흠집이 너무나 많고 치명적이라고 서로 공격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지닌 흉터는 흠집이 아니라 상처를 입은 흔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상처는 흠이 생겨 온전치 못한 흠집과 다르다. 흠집은 결락을 지닌 하자다. 하지만 인간이 지닌 상처는 그가 무엇인가를 한 흔적이다. 일하거나 싸우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는 없다. 상처가 많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많은 일과 싸움을 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상처가 많다는 사실이 하자가 될 수는 없다. 그가 한 일과 싸움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오히려 그것은 영광일 수도 있다. 지금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는 이렇게 말했다. ‘상처는 빛이 인간에게 들어오는 통로다.’ 루미의 문장을 빌리면 상처가 많다는 것은 그의 안에 그만큼 많은 빛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 된다. 두 대선 후보가 지닌 육체적 상처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열두 살에 소년공이 되었던 이재명 후보는 함석을 다루는 공장에서 찔리고 베여 100곳이 넘는 상처를 입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을 모르고 자란 윤석열 후보는 그런 상처를 입을 일이 거의
최근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사의 제목은 ‘이재명을 몰라서’였다. 기사의 내용은 《인간 이재명》 읽기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유행이라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이다. 그만큼 민주당 국회의원들조차도 이재명이란 사람을 몰랐다는 얘기다. 어쨌든 반가운 기사였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윤석열의 진심》이란 책을 읽고 있다는 기사도 나왔으면 좋겠다. 샴푸 한 통을 파는 판매원도 상품을 팔려면 그 상품의 성분과 효능, 임상결과를 정확히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 근거도 없이 ‘이 상품 좋으니까 사세요’라고만 줄기차게 외치는 판매원은 빵점짜리다. ‘우리 상품이 좋진 않지만 그래도 저 상품 사면 안 돼요’라고 떠드는 판매원은 없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자신이 마케팅하려는 상품이 나라의 살림을 5년이나 맡길 대통령 후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재명을 모르고 국민의힘은 윤석열을 모른다. 몰라도 아주 많이 모른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이재명이 정말 훌륭하다고 믿어서 이재명을 지지하고, 선택을 호소하는가. 윤석열이 정말 잘할 것이라고 믿어서 윤석열을 지지하고, 줄을 서는가. 윤석열이 싫어서, 이재명이 싫어서가 아닌
<D.P.>에 이어 <오징어 게임>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오징어 게임>은 엔터테인먼트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품에 선보인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한국은 물론 브라질, 프랑스, 인도, 터키 등 10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미국에서도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로 22일 연속 ‘오늘의 톱 10’ 1위를 달리는 중이다. 이미 1억1000만 가구가 이 드라마를 시청했다. 평가도 압도적이다. 찬반이 교차했던 국내에서와 달리 해외에서는 격찬 일색이다. ‘포브스’는 <오징어 게임>을 “가장 기이하고 매혹적인 넷플릭스 작품 중의 하나”라며 “신선한 아이디어와 스릴 넘치는 드라마”, “단순한 놀라움 그 이상을 선사”한다고 평가하고 ”무조건 봐야 할 드라마‘라고 상찬했다. 무엇이 세계가 한국 드라마에 이토록 열광하도록 만들었을까? “정말 죽여주는 작품”이라고 호평한 미국의 CNN은 “<오징어 게임>이 화제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은 과소평가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영화 <기생충>에 이은 드라마 <D.P.>와 <오징어 게임>이 가진 공통된 특징은 시청자들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캐시어스 클레이는 미국의 복서였다. 흑인가의 가난한 소년이었던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 라이트 헤비급 미국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미국의 영웅이 된 줄 알았다. 그러나 햄버거를 사려고 들어간 가게의 백인에게 그는 여전히 흑인일 뿐이었다. “검둥이에게 팔 햄버거는 없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았고,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는 흑인을 멸시하는 백인들의 미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싸우는 프로선수가 되기로 했다. 아마추어 전적 100승 5패를 기록한 그는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권투에서도 그의 주먹은 막강했다. 그는 약관 21세에 소니 리스턴을 7회 TKO로 물리치고 WBA와 WBC 헤비급 세계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당대 최고의 복서인 챔피언 소니 리스턴에게 도전했을 때 모든 전문가가 캐시어스 클레이의 패배를 예언했다. 소니 리스턴에게 도전하는 그를 한 마리 파리에 불과하다고 경멸도 서슴지 않았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경기 전에 이렇게 응수했다. ‘한 마리의 파리가 쇠 쟁기를 끌 수 있다고 / 그대에게 말하는 나는 좋은 사람 /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나에게 묻지 말고 / 파리에게 쟁기를 매라.’ 한 편의 시였다.
도쿄올림픽에서 우리 국민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는 단연 김연경이었다. 비록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여자배구 주장으로 경기를 이끈 ‘식빵 언니’ 김연경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금메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아무도 그녀의 ‘식빵’을 나무라지 않았다. 2016년 리우세계 대회 한-일전 경기 때 공격에 실패한 그녀가 돌아서며 내뱉은 ‘식빵’에는 자탄과 함께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는 간절한 다짐이 담겼고, 그 상황과 그녀의 심경에 우리가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언어는 상황과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의 말과 글은 내용과 함께 감정을 전달하며, 그 내용과 감정은 언제나 상황에 결부되어 있다. 한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언어가 발화한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반드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거전이 달아오르면서 선거에 나온 몇 후보들이 한 후보가 했던 과거의 거친 언어를 문제 삼으며 자질에 이의를 제기했다. 언어를 다루는 것을 업으로 하는 나는 공격의 대상이 된 이재명 지사의 말과 그 말이 발화하게 된 상황을 다시 확인해보았다. 상황은 이랬다. 성남시장에 당선된 그의 제1성은 ‘부패즉사 청렴영생’이었다. 부패하면 즉시 죽고 청렴하면
날씨가 무덥다. 무더운 날씨보다 더 짜증스럽게 만드는 대선 주자들 간의 검증과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왠만한 공공기관에서는 2000만 원이 넘는 사업은 공개경쟁에 붙이고, 수주하려는 업체들은 사업제안서를 제출하고 검증을 받는다. 발주처는 입찰에 응한 업체의 제안서 내용과 함께 그 업체가 그동안 수행한 사업의 실적을 검증하여 사업수행 업체를 정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은 연간 600조에 달하는 국가 예산을 운영하고 주권자들의 생명과 이익을 지키는 소임을 5년간 맡길 업체를 공모 중이다. 4000만 명이 넘는 만 18세 이상의 국민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사업 공모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업체가 수십을 헤아린다. 8개월 뒤에 있을 최종 심사를 앞두고 예비심사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업체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문제는 이 업체들이 심사위원들 앞에 자신의 사업제안서는 내놓지 않고 다른 업체를 험담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피심사자란 사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마치 심사위원이라도 된 것인 양 착각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업체들을 바라보는 주권자들은 짜증이 치밀 수밖에 없다. 우선 여당이라고 하는 동네에서 이번 국민 공모사업에
홍범도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도 드물다. 1868년 평양의 서문 밖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머슴, 군인, 종이공장 노동자, 승려, 포수, 의병, 광산 노동자, 독립군, 농부, 부두 노동자, 혁명가의 삶을 살았고 마지막 직업은 극장 수위였다. 그가 한 일은 수없이 많지만 한 단어로 그를 규정해야 한다면 독립군일 것이다. 그보다 더 오래, 그보다 더 많이 일본군과 싸우고 그보다 더 크게 일본군을 이긴 사람은 없었다. 27세에 강원도 단발령에서 황해도 출신의 동지 김수협과 함께 일본군 12명을 처단한 이래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52세까지 그는 싸우고 또 싸웠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가족 모두를 잃었다. 아내는 일제의 고문으로 죽고, 큰아들 양순은 그와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 열일곱 살 나이에 전사했다. 작은아들 용환은 그와 함께 만주를 유랑하다 병으로 죽었다. 핏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머나먼 중앙아시아에서 극장 수위로 생을 마감한 그의 유해조차 아직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필자가 그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위대한 업적을 재평가하자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비운에 찬 한 영웅의 생애를 제대로 기리자는 것도
올더스 헉슬리가 소설 《멋진 신세계》를 발표한 것이 1932년이었다. 90여 년이 지났지만, 이 소설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과연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까? 조지 오웰이 소설 《1984》를 발표한 것은 1949년이었다. 70년이 더 지났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이 던진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공포와 증오, 잔인성 위에 문명을 세울 수는 없어요. 그런 문명은 유지되지 못해요.’ 이 소설들을 포함한 많은 소설이 아직 닥쳐오지 않은 미래사회를 다루었고, 더러 현실이 되었다. 한국의 소설가들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을까. 최근 발간된 김강의 흥미로운 소설집 《소비노동조합》의 시대적 배경은 기본소득제가 시행된 지 이미 30년이 지난 2069년이다. 만 18세가 되는 순간부터 누구나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생계비에 해당하는 기본소득을 받는 황금광 시대다. 생존을 위한 최저생계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문화와 여가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생계비다. 이런 황금광 시대에는 갈등이 종식되고 채무자들도 사라지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채업자다. 그것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이다.
“우리 때는 공장에 가는 학생의 수가 많은 대학 순서대로 명문대였는데, 지금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시험도 거부하며 반발하는 이기주의자가 많은 순서대로 명문대다.”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드는 8090년대의 청년들은 이 시대의 20대 청년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1980년까지 대학생들 대부분은 대학교 배지를 달고 다녔다. 다른 건 몰라도 80년대의 대학생들이 제 옷깃에 달았던 대학 배지를 스스로 뗀 일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었다. 80년대의 대학생들은 80년 5월, 광주가 짓밟히는 것을 외면하고 침묵했던 자신들이 정의와 진리를 표상하는 대학의 배지를 달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80년대 청년들의 힘은 반성을 실천으로 옮긴 결단과 행동력이었다. 모든 언론이 광주민중항쟁을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만행으로 도배질을 하고 있을 때,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싸우다 제적당하고, 감옥으로 간 것이 80년대 청년 학생들이다. 고작 ‘가리방’으로 등사한 유인물 몇 장 뿌리고 개처럼 두드려 맞으며 끌려간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검사와 판사들이 구형하고 선고한 형량을 합하면 몇 만 년이 될지 모른다. 그렇게 감옥으로 간 숫자보다 더 많은 대학생이 졸업장을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