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일본의 20대 청년 하나가 3년(1878~1881) 동안 조선의 무인도를 탐사한다. 다도해 부근에도 수시로 왕래하면서 조사했다. 현해탄도 네 차례나 항해했다. 그는 메이지 정부를 반대하는 인사들과 어울려 군대를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곧바로 큐슈의 한 정치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서 한문 선생을 하기도 했다. 그 얼마 후, 마음에 맞는 친구와 '근대시문학'(近代詩文學)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여러 해 동안 출판사를 했다. 시도 썼다. 동양사회당(東洋社會黨)을 창당, 평등세상의 꿈을 선포하고 도전했으나,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정당은 해산당하고 두 차례나 옥살이를 했다.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의 후원자이며 동지였다. 이토록 다종다양한 경력은 그를 당대의 석학으로 진화시켜주었다. 중국과 조선에도 자신의 뜻을 전하여,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이른 바, ‘대동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1850~1922)라는 사람이다. 위와 같이 호기심이 강했다. 야심도 컸다. 게다가 똑똑하기도 했다. 그의 책 '대동 합방론'이 나온 것은 1893년이었다. '일본인'이란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낸 것인데, 특히 중국에서
최근 국방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계엄과 전쟁에 관한 공방이 뜨거웠다. 이 논쟁에 국민의 힘 한기호 의원(3선)의 문자메시지가 기름을 부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협조가 되면, 북괴군부대를 폭격, 미사일타격을 가해서 피해가 발생하도록 하고, 이 피해를 북한에 심리전으로 썼으면 좋겠다"는 문자메시지를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에게 보냈다. 신실장은 "잘 챙기겠다. 오늘 긴급대책회의 했다"고 답했다. 소름끼친다. ‘조일 7년전쟁’(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뒤 서울의 모습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지옥이었다. "전쟁이 끝난뒤 흉년에 염병까지 돌아 수구문(水口門. 지금의 광희문) 밖에 버리는 시체가 산을 이뤘다. 그것을 처리하는데 1년이 넘게 걸렸다. 황소 한 마리값이 쌀 서말, 무명 한 필에 좁쌀 두서너 되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 죽으면 달려들어 그 살을 뜯어먹었다. 왜군은 지놈들 필요한 모든 걸 약탈하고, 명군(明軍)은 전국의 소 돼지 개 닭을 다 잡아먹었다. 술 취한 명군이 토악질을 하면 다투어 핥아먹고, 약한 놈은 그것도 못먹어 울부짖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 조선편 한 대목이다. 어느 시대 어느 대륙에서든 전쟁이 끝나면, 장삼이사 씨알들은
1929년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열네살에 5년제 경성공립공업학교(현 서울공고)에 입학한다. 4학년때 해방을 맞았다. 이듬해에 국립해양대학에 들어간다. 공업학교와 해양대학은 국비였다. 가난한 청년이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안동중학의 영어선생이 되었는데, 바로 내전(6.25)이 터져서 군에 들어간다. 유엔군 연락장교가 되었다. 1957년 소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7년간 주로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벤 플리트 유엔군사령관 등 주요장성들 통역을 했다. 예편과 동시에 합동통신 기자가 된다. 대부분 서울대학 출신들이었던 당시 외신부에서 그 누구도 선생의 영어를 따라오질 못했다. 그 탁월함으로 미국대사관의 공보담당이나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주요매체들의 민완기자들과 신뢰와 교분을 쌓았다. 그로써, 5.16 이후 1960년대 우리 언론계에서 외신특종은 대부분 리영희가 도맡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61년 박정희와 케네디의 정상회담이었다. 동아 조선 등이 정상회담 성과를 과대포장하며 구테타 세력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을 때, 합동통신의 리영희 기자는 미국기자의 제보를 받아 "케네디의 한국원조는 박장군의 민정이양 댓가"라는 대특종을 날린다.
“인간사회에서 슬픔의 종류는 허다하나, 나라를 강탈당한 망국노(亡國奴)의 치욕, 그 이상 가는 슬픔은 없을 것이며, 기쁨의 종류도 허다하나 잃었던 자유를 되찾은 기쁨이야말로 최고의 환희일 것이다.” 훗날 광복회장을 역임한 독립투사 故이강훈 선생(1903~2003)의 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사》의 첫 문장이다. 우리 조상들은 1910년 8월 29일 그날을 왜 망국의 상실감으로 인한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지독한 분노를 담아서 규정하지 않고, ‘국치(國恥)’라고 여기고 그렇게 말했을까. 그 후 100년도 더 지난 오늘도 우리는 그날을 ‘부끄러움’으로 상기하며, 그날의 조상들처럼 치를 떤다. 힘 없고 가난했지만,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앉아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아무 때든, 어디서고 편하게 누워서 쉬고 또 일하던 사람들이, 필요한 걸 찾아서 궁핍과 남루를 그럭저럭 감당하며 살던 사람들이, 이젠 그 어떤 일도 맘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처량한 신분은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들이었다. 그 통한(痛恨)의 시간에, 그 가엾은 족속의 눈에는 빈 쌀독과 대여섯씩이나 되는 처자식의 입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우리 식구들이 머지않아 굶어죽겠구나
전라도 보성 벌교에 100미터 남짓 되는 나지막한 산 하나가 있다. 부용산이다. 부용(芙蓉)은 산에서 사는 연꽃이다. 같은 이름의 산이 전국에 열 개나 되는 걸로 보아, 부용은 이름 없는 무명의 씨알들처럼 이 땅에 흔하디 흔한 야생초다. 나는 오는 8월 31일 공장의사 김현주 선생(종합예술단 봄날의 소프라노)의 작은 음악회에 우정출연하여 ‘부용산’을 부른다. 요즈음 지하철에서든 다방에 앉아서든 중얼거린다. 완벽하게 외웠다고 자신할 때,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랫말은 슬픈 서정시다. 눈물겹다. 노래 부르다가 울음보가 터질 것만 같다. 특별한 시 ‘부용산’이 오늘날 묵직한 명곡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이 궁금하여 여기저기 드나들며 공부 좀 했다. 시인 박기동은 1917년 여수 출생으로, 열두 살 때 벌교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지역에서 이름있는 한의사였다. 그 덕택으로 열네 살에 일본의 중학교로 유학을 갔으며, 관서대학 영문과를 다녔다. 해방 전에 귀국하여 1944년 벌교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교가도 지었다. 해방 후, 광주로 전근가서 가르치다가 벌교중학으로 돌아왔다. 여기서도 교가를 지었다. 그 후 1947년 순천사범
나는 일본과 이웃하여 사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10만년에서 3만년 전 사이의 어느 때까지는 우리의 대륙과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선사시대 원주민들의 영토에 우리의 조상들은 물론 중국과 몽골족, 시베리아 인종들 다수가 건너가서 오늘날 일본족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 저 대한해협은 1만2천년 전에 생겼다고 한다. 일본에 대해서 관심이 크다.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 특히 한국말 좀 하는 일본친구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며 질문을 많이 한다. 지난 연말연시를 휴가차 서울에 온 일본의 유력지 기자와 보냈다. 노래하고 춤추고 마시고 얘기하고…특별한 시간이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일어판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은 특별한 친구다. 내가 속한 ‘씨알의 소리’에, 45년 전 그가 경험했던 감격적인 독서와 그 기쁨과 쑈크를 내용으로 기고하게 하였다. 멋진 인연 아닌가. 조만간 양국에서 각 열명씩 참여하는 문화교류협회를 만들어 왔다갔다 하며 함께 놀기로 했다. 작년 9월, 나는 본 지면에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20년 전, 일본총리 고이즈미에게 썼던 편지글이었다. 반응이 뜨거웠다. 일본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함석헌 선생의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을 읽고나서부터다.
선생께 이렇게 공개편지를 쓰게 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라인-야후 사태’가 궁금해서 요즘 귀사의 형편이 어떤가를 살펴봤지요. 걱정스런 내용들이 많더군요. 곧 상승기운 넘치는 낭보를 기대합니다. 제가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참 오래 전입니다. 책을 통해서였지요. 당시 한국에 '손정의' 이름이 붙은 책이 20여 권이 나와 있었고, 나는 그 책들을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감동의 연속이었으니까요. 지금은 120권이 넘었네요. 그 어린 소년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당당하고 지혜롭게 유학생활을 감당하는 모습은 실로 ‘장관’(壯觀)이었습니다. 2년제 칼리지에서 버클리대학에 편입할때였지요. 영어능력 시험(placement test) 감독에게 “나는 지금까지 일본말만 했다. 저 친구들은 모두 영어권 출신들 아닌가. 영어사전을 달라. 시간도 두 배로 달라”고 말했지요. 감독은 받아들였고요. 정말 탄복했습니다. 개강하자마자 컴퓨터학과의 한 교수를 찾아가 영어-일어 자동번역기 개발을 의뢰하였지요. 용역비는 물론 외상이었습니다. 교수는 그 동양청년의 당돌하고 자신감 넘치는 제안에 말없이 싸인했습니다. 젊은이가 훗날 수퍼맨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방학 때 제품을
고교시절, 이 역사를 읽고서 조선에는 세종 말고는 제대로 된 것들이 하나도 없었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쌍욕을 했었다. 그 굴욕의 스토리를 오랫 동안 잊고 살았는데, 영화 ‘남한산성'이 상기시켜 주었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잊을 수 없다. 조선의 임금이 저 높은 자리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청나라 왕에게 절을 세 번 한다. 한번 할 때마다 이마로 땅바닥을 세 번씩 찍는다. 저질정치가 늘 국난의 원인이었다. 그 굴욕은 마치 a파가 b파의 어깨들과 아지트를 초토화시킨 뒤,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깡다구’ 기질도 깡그리 유린하는 조폭세계의 인수합병 의식과 차이가 없다. 국가간 정치외교도 그렇다. 나라의 대표들이 참모들과 함께 국리민복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디어가 잠든 시간에 주먹 쎈 쪽의 마음대로 이미 결론을 내놓은 것이다. 점잖고 매끄러운 어휘들로 이루어진 문장으로 힘의 논리를 가리웠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건달들의 법칙이다. 4.10 총선이 야권의 압승으로 끝났다. 부정선거 논란이 없는 걸 보면, 윤패는 이길 것으로, 적어도 반타작은 할 것으로 전망했던 것 같다. 한달이 지났다. 그 사이,
임오군란(1882년. 고종 19년)이 터졌다. 신식군대 별기군에 대한 구식군대의 불만이 원인인 것 같지만, 실은 나쁜 권력자에 대한 분노였다. 병졸들이 궁궐(창덕궁)로 쳐들어간 것은 민비를 잡아죽이려는 것이었다. 중전은 측근 장정에게 엎혀 현장을 빠져나가서 멀리 충주까지 도망갔다. 군인들은 1년 넘게 월급을 받지 못하다가 받은 쌀가마니에 겨와 모래가 반이나 섞여있는 걸 보고 폭발했다. 그 사이 "월급을 달라!"고 항의하는 군인들을 끌고가서 혹심하게 고문했다. 척족들이 이렇게 빼돌린 쌀이 10만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민비는 왕실과 조정의 요직에 전부 여흥민씨들을 30명 넘게 앉혀놓았다. 핵심 참모집단을 일가친척으로 구성한 것은 통치를 맘대로 하기 위함이며, 같이 해먹는 게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휘다. 그는 선혜청(나라의 곳간)이라는 정부기관의 당상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것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조선갑부 민영휘의 부정부패였다. 민비는 자식 넷을 잃고 세자 하나를 건졌다. 그래서 모성애가 특별했다. 은신처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중전에게 민응식이 무녀 하나를 소개했다. 그 영매가 "50
1901년 3월 13일 평안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곧 탄신 123주년이다. 1916년 북쪽의 영재들이 모이는 평양고보에 입학한다. 수줍고 평범했다. 평고의 연락책으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훗날 사상계에 실렸던 큰 문장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ㅡ1959년 3.1절에 부치는 글ㅡ에 따르면, 그는 전날밤 숭실학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 감격하였다. 평양경찰서 앞에서 뿌리고 시가행진에 참가했다. "내 60 평생,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그때처럼 상쾌한 적이 없었다. 목이 다 타 마르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꽂은 일본군인과 마주 행진을 하며 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히고 일어서고, 평소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정말 먹었던 대동강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하였다." 이 진술은 신생아 분만현장을 연상케 한다. 저 평안도 이름없는 어촌의 소년이 한 집안의 아들에서 세상의 아들로 거듭난 것이다. 학교는 퇴학당했다. 반성문을 써내면 복교할 수 있었지만 거부했다. 남강 이승훈의 민족사립 오산학교에 편입하여 다석 유영모 교장과 특별한 사제관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