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참 좋아한다. 특히 홍시(紅柿). 조계사 경내에 있는 까페 ‘나무’의 홍시 쥬스, 일품이다. 지인들과 거기 앉아 한 잔 씩 하면, 소통도 참 잘 된다. 그 높은 값의 평화, 늘 홍시가 가져다준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지난 주 젊은이들에게 '맹자'를 강의했다. 스물 다섯 살 복학생의 그 뜨거웠던 여름방학, 선풍기도 없는 강의실에서 공부했던 맹자원전 강독의 감동은 30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 감동, 앞으로 30년 또한 변함없이 이어지길 빈다. 스물 다섯 전후의 젊은이들과 함께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아버지’ 맹자(孟子)를 읽고 토론한 후, 몇 마디 보탰다. "하늘높이 달려 있는 저 홍시가 仁이다." 따지 않고, 까치의 밥으로 놓아둔 조상들의 그 인자한 가슴은 눈물겹다. 언제나 뭉클하다. 철학적이다. 이 무한 우주의 운행 안에서 그 보다 더한 어진 마음 어디서 또 접한단 말인가. '대지(大地)'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故 펄 벅 여사가 방한하여 경주에 갔었다. 천년 古都 여기저기를 돌아댕기다가 높이 달려 있는 홍시를 보고서는 “따기 힘들어서 그냥 둔 거냐?”고 물었다 한다. 1960년이었다. 당시 수행했던 젊은 기자(故 이규태 선생)가 “겨울을 나는
李完用! 우리 민족사에서 참으로 특별한 이름이다. 그는 1858년 지금의 판교 낙생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시시했다. 열살 때, 먼 친척의 양자가 된다. 장대높이뛰기와 다름없는 그의 성공가도에 첫번째 기회는 바로 이 입양이었다. 양부 이호준은 당시 한성판윤 등을 지낸 정계거물. 흥선 대원군의 절친으로, 사돈이기도 했다. 내성적인데다 집안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자랐다. 양부 계보의 큰 지식인들에게 사서삼경을 배웠다. 선생들은 그의 뛰어난 머리와 높은 성취욕을 지적했다. 이 두 가지 장점이 이후 그의 삶을 그렇게 이끌었다. 당시 고종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무능하고 불행하고 측은한 지도자였다. 안으로는 아버지 대원군과 부인 민씨가 각각 설치며 죽기살기로 싸우고, 밖으로는 청나라 러시아 일본과 멀리 미국까지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 풍전등화였다. 국내 국제정치의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 나라의 운명은 영원히 이 변경불가한 지정학의 종속변수일 수 밖에 없다. 리더십의 수준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최선이 아닐 경우는 우리나라는 피할 수 없이 재앙의 현장이 된다. 위기의식이 하늘을 찌르는 처지의 임금에게 구
1887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나 평양의 일신고보를 졸업했다. 1904년 하와이로 노동이민 갔다가 본토로 옮겨 도산 안창호의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에서 도산의 지도를 받으며 활동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토쿄를 거쳐 귀국했다. 국권회복이 목표였다. 1907년. 스무살이었다. 100년 전, 뜻있는 약관의 청년들은 대개 이와 같았다.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황제와 함께 평양에 온다는 정보를 듣고 동료들과 평양역에서 대기하다가 도산 안창호의 '전략적 만류'를 받아들여 연해주로 떠났다. 그 해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그 '동양 제1적'을 쏘아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목표를 이완용으로 바꿨다. 백범일지 '민족에 내놓은 몸' 편에 보면, 이재명과의 인연이 상세히 나온다. 의사는 미국서 돌아와 오인성이라는 여교사와 결혼했다. 부인은 남편의 계획을 듣고 강하게 반대했다. 이견으로 다투다가 오발이 발생했는데, 집밖에서는 그 총성을 심각하게 여긴 것 같다. 동네 유지가 마침 그 마을에 와서 머물던 백범에게 청년을 데리고 왔다. 백범이 타일러서 총을 챙겼고, 함께 있던 노백린 장군이 "서울에서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거인은 얼마 후
이쪽은 노무현 때고, 저쪽은 고이즈미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은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과하게 하여 모든 언론이 이를 비중있게 보도했다. 그 어느 날, "고이즈미에게 편지나 한 통 써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장은 없었다. 최근 한일관계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80%다. 이는 정부여당에 대한 심정적 탄핵을 뜻한다.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가 결정타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군사협력 관계 등 핵심사안들이 상식과 여망을 지나치게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독도에 대해서도 그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단호함과 당연함'이 변질될 것 같다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취임 이후, 윤석열 정부의 친일 저자세가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편지 한통을 꺼내 읽으면서, 등장인물들만 바뀌었을 뿐, 한일간의 정치외교는 단 1센티미터도 발전이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곱절로 악화되고 퇴보하였다. 고이즈미 총리께! 저는 한국의 서울에 사는 40대 중반의 가장입니다. 제가 선생께 편지를 쓰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물론 금지된 일도 아닙니다. 이는
2023년 8월 3일, 광복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정체성 선포식'이 열렸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이승만 기념관' 프로젝트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 사업은 이승만을 신격화하여 건국대통령으로 몰아가려는 것이다. 그건 '괴물기념관'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처사"라고 말했다. 이어서 "문대통령이 1919년 4월 11일(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이라고 했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그날 '대한제국'이 끝나고 '대한민국'이란 공화정이 처음으로 헌장에 채택된 것이다. 왕조는 망하고 흥하고 반복되었지만, 나라는 지속되어왔다"고 주장했다. 2023년 6월 28일, '이승만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라는 단체가 출범하였다. 위원장은 이명박 때 국무총리 김황식. 위원들은 대부분 보수인사들로, 이인수 박지만 김현철 김홍업 등 전직 네명의 대통령 아들들이 들어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대미, 대일관계에서 심히 우려되는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밖에서는 굴욕적이고, 안에서는 불친절하다. 그래서 모욕적이다. 이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의 12년 독재를 상기시킨다. 기념관 논란에서 이승만의 '나쁜 정치'와 그로 인
100년 전, 일제 치하, 경상도 진주에 국채보상운동, 3.1 만세 운동, 학교설립, 백정 해방운동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젊고 의로운 인물이 있었다. 백촌 강상호(1887년생) 선생이다. 국채보상운동 경남 책임을 맡았을 때, 스물 한 살이었다. 진주공립보통학교(진주초)의 학무위원이 된 건 스물 아홉. 그 무렵, 긴 가뭄과 대홍수가 지역사회를 초토화시켰다. 이웃들은 쌀독이 비어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백촌은 양친과 함께 곳간을 열었다. 그리고 동네의 가가호호에 부과되는 호세ㅡ주민세와 유사한ㅡ10년치를 대신 냈다. 거금이었다. 서른 살이었다. 4-50대 중견인사들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나 할 수 있는 일들을 그 나이에 농부들 벼 베듯 해낸 거다. 훗날 주민들이 백촌의 자당을 기려서 시덕불망비(施德不忘碑)를 세웠다.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다'는 착하고 아름다운 합창이다. "부족한 곳 누추한 마을 복전을 돌보아 농사짓게 해주시고, 천금을 바르게 쓰시어 많은 집이 돈을 얻으니 그 혜택이 산과 바다와 같으매 은덕이 높고 넓음을 돌에 새겨 잊지 않고 백세에 전하리라 1917년 가좌리 주민 일동" *복전(福田:복을 거두는 밭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가난한 사
1760년, 충청도 예산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서녀였다. 여자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대에, 완숙은 그 악조건에 굴하지 않고, 남자형제들 공부할 때 옆에서 성실하게 귀동냥했다. 훗날 학자들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 총명한 딸을 특별히 사랑했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가 사나운 팔자이니 재취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하여 부모는 결국 그 점괘를 받아들였다. 이내 향리에서 알아주는 양반집 홍씨네 며느리가 된다. 남편은 어린 아들 하나를 둔 사별한 홀아비였다. 독한 시집살이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에, 양반집 며느리로서, 또 전처소생에게는 계모로서, 완숙의 덕행은 완벽했다. 자신의 딸을 포함하여, 남편을 제외한 4인 가족은 완숙의 헌신과 지혜 덕에 참으로 좋았다. 그는 고품격이었다.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행복은 짧았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비극이 들이닥쳤다. 망국적인 파당정치였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임금도 얼마든지 손을 볼 수 있었다. 노론 벽파가 자파세력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현군(賢君)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 그 한 사례다. 그와 같이, 당파싸움에 몰두한 패거리들은 정적이나 위협세력은 필요한 경우에 얼마든지 개돼
그는 1885년 연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중국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혔다. 아버지 최우삼은 약관 20세에 고종으로부터 연변의 도태(道台. 오늘의 도지사)로 임명된 큰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운산이 차남이다. 중국사람들 보다 중국말을 더 잘했다. 운산은 그 탁월한 능력으로 중국의 고위인사들과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청나라의 토지정리 사업을 도왔는데, 그 때 능력을 높이 인정받았다. 그 대가로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실은 그 땅이 쓸모 없는 황무지여서 큰돈 들이지 않았다. 운 좋게도 소유지 여러 곳에 도시가 생기면서 땅값이 치솟았다. 이십대에 연변갑부가 된 것이다. 1908년, 운산은 자신의 여러 소유지 가운데, 사람 살지 않는 한 시골로 조모, 부모, 형 진동 등 4형제와 그 가솔들과 함께 이주했다. 두만강 건너 고향 함경도 온성의 최씨집안 친인척과 지인들을 불러들여 신한촌(新韓村)을 세웠다. 이 마을이 바로 봉오동(鳳梧桐)이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전설이 작명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초거대 농사와 목축업에 더하여 국수, 콩기름, 비누, 성냥, 술, 과자 등 생필품 공장을 차렸다. 제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신
"독도! 끝내 창씨개명 되는건가. 왜놈들이 조만간 이곳에 대나무를 심을건가. 그리하여 마침내, 다께시마, 竹島로 소유권 이전을 완료할건가. 세찬 바닷바람 몰아치는 대숲 한가운데서 욱일기 당당하게 펄럭일건가." '2023년 대통령 3.1절 기념사 쇼크' 이후, 나는 홀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계제에 독도 관련 서책들을 여러 권 읽어보았다. 그 중 조선 숙종 때 인물 안용복 장군(1658~ ?)과 6.25 참전 상이용사 33인이 결성한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1929~1986)의 삶에 특별히 마음이 쏠렸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 여당 사람들이 한결 같이 이 위대한 인물들의 대칭이기 때문이다. 야당의 정치모리배들도 별 차이 없고. 역사적으로 '우산국(于山國)'이었던 울릉도는 신라 지증왕이 복속한 때(512년)부터 우리 영토로 되어 있다. 우산국은 신라가 강성해지는 과정에서 먹힌 군소 왕조의 저항세력들이 도주하여 건너가서 세운 나라였다. 대마도와도 가깝기 때문에 오랫 동안 왜인들도 다수 거주하거나 왕래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울릉도와 독도를 중시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관심 밖이었고, 왕래는 죽음의 리스크를 져야만 했다. 세종조차 울릉도를 무인도로 만들어버리는
1894년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났다. 1989년에 작고했으니 100년 가까이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오사카로 나가서 자전거 가게의 점원이 된다. 기차역에서 눈물을 훔치시던 엄마를 생각하며 밤마다 울었다. 소년에게 돈벌이 현장은 갓 입대한 신병이 투입된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나는 세 가지 은혜를 받고 태어났다.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온갖 힘든 일을 하며 세상살이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다. 허약하게 태어나서 운동을 꾸준히 하여 건강하게 되었다. 무학(無學)이라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선생으로 여기며 배우고 익히는데 힘썼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어린 시절은 비범하다. 선생에게는 신산고초(辛酸苦楚)의 시간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매사에 정면대응하여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 어떤 난제도 포기하지 않고 궁리를 거듭했다. 심지어 경쟁사ㅡ소니社ㅡ대표를 찾아가서 묻고 흡족한 답을 얻기도 했다. 평생 머리맡에 늘 수첩과 펜을 놓고 잤다. 고뇌하는 사람들의 짧은 메모 한 줄이 경우에 따라 역사를 바꾼다. 출중한 경영자의 메모 한쪽이 기업을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비약시킨다. 인간들은 예외없이 연약하고 빈약하다. 미미하다. 유한하다. 그 한계를 보완하는 지혜가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