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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온고지신] 봉오동 최운산 장군

 

그는 1885년 연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중국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혔다. 아버지 최우삼은 약관 20세에 고종으로부터 연변의 도태(道台. 오늘의 도지사)로 임명된 큰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운산이 차남이다. 중국사람들 보다 중국말을 더 잘했다. 

 

운산은 그 탁월한 능력으로 중국의 고위인사들과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청나라의 토지정리 사업을 도왔는데, 그 때 능력을 높이 인정받았다. 그 대가로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실은 그 땅이 쓸모 없는 황무지여서 큰돈 들이지 않았다. 운 좋게도 소유지 여러 곳에 도시가 생기면서 땅값이 치솟았다. 이십대에 연변갑부가 된 것이다.

 

1908년, 운산은 자신의 여러 소유지 가운데, 사람 살지 않는 한 시골로 조모, 부모, 형 진동 등 4형제와 그 가솔들과 함께 이주했다. 두만강 건너 고향 함경도 온성의 최씨집안 친인척과 지인들을 불러들여 신한촌(新韓村)을 세웠다. 이 마을이 바로 봉오동(鳳梧桐)이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전설이 작명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초거대 농사와 목축업에 더하여 국수, 콩기름, 비누, 성냥, 술, 과자 등 생필품 공장을 차렸다. 제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신한촌 전체 농사의 1개월 수입 보다 공장의 하루 수입이 더 컸다. 소를 한번에 500두씩 러시아 군부에 납품했다. 20세기 초, 운산은 조선 최고의 부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만주 일대에는 수많은 비적들이 준동했다. 운산은 그 도적떼를 압도했다. 당시 동북3성의 사령관 장작림(張作霖. 1875~1928)과 특수관계였다. 이는 운산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당시 그 지역에서 왕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신한촌의 치안을 위하여 운산이 자경단(自警團)을 운영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치안대도 군인들처럼 무장하고 상시적으로 훈련을 하는 전사들이었다.

 

운산은 또한 러시아 연해주에 드나들면서 거기서 활동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으며, 그들을 적극 지원했다. 안중근 이상설 등도 대상이었다. 3.1만세 운동 이후, 특히 북간도로 넘어오는 청년독립운동가들이 급증했다. 운산은 그들을 모두 받아들여 제대로 된 독립군으로 양성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으며, 천문학적인 재산을 쾌척했다.

 

영화나 드라마의 독립운동 전투장면들은 특정인물들을 지나치게 신비화함으로써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후손들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사실(史實)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왜곡은 실은 목숨 바쳐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고 일신의 영달을 포기한 청년독립군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 중 한 사례가 봉오동-청산리 전투다.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붙은 러-일전쟁에서 승자가 된 후 일본은 파죽지세로 종횡무진했다. 그러한 일본군을 상대로 과연 장군들 소수의 역량과 열혈청년들의 정신력만으로 이길 수 있었을까. 이 상식적인 문제제기는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번도 없었다. 

 

그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봉오동에서 수천 명 규모의 대한북로독군부에게 참패한 것이다. 일본 수뇌부는 충격을 받았다. 이어진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이 설욕하려다가 궤멸당한 봉오동 전투의 연장전이었다. 

 

이 전투의 총사령관은 최진동, 총참모장은 최운산 형제였다. 그 독립군들은 운산이 러시아에서 구입하여 지급한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싸웠다. 그리고 운산의 소유지인 십리평이라는 지역에 신흥무관학교 못지 않은 훈련소를 설치 운영했다. 들어가는 모든 예산과 비용은 운산의 사재로 충당했다.

 

이 전투에서 최운산 장군 휘하, 1연대장은 김좌진, 2연대장은 홍범도였다. 이승만에게 발탁되어 초대 정부의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겸했던 이범석은 이 훈련소의 교관이었다. 운산은 일본과 싸우다가 순국한 독립군 유가족들 돕는 일도 독립운동하듯 했다. 그 일은 부인 김성녀 여사의 몫이었다.

 

운산은 해방을 한 달 앞두고 평양에서 1945년 7월, 61세에 그 위대한 인생을 마감했다. 빈번한 옥살이와 고문후유증 탓이었다. 다수의 혈맹동지들은 전사하고, 병사하고, 밀정에게 낚이어 끌려가 고문사하고, 아사했다. 그의 7남매도 힘들게 연명하면서 북한과 중국, 남한에 흩어져 대를 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창공의 별과 같은 우당 이회영家, 석주 이상룡家, 왕산 허 위家에 비해 손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운산家의 대하드라마 가족사가 통째로 독립운동사였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어서 널리 알려지길 빈다. 

 

추신:최봉우는 5.16 직후 선친의 서훈신청 하라는 정부의 통지서를 받고 상경했다. 1961년 어느 날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담당 공무원이 돈봉투를 요구한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아구통을 맞고 쓰러졌던 그 자도 지금은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운산의 서훈이 완료된 건 그로부터 장장 16년이 지난 1977년이었다. 그것도 만주에서 독립운동했다는 증거만 제출하면 주는 흔한 등급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이 정권을 잡았으니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명예를 높여드리기 보다는, 되는대로 다수에게 훈장을 주어 리더십의 친일색깔을 희석시키는 계기로 활용하려는 분위기가 대세였을 것이다.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공무원들은 그 분위기에 편승, 겁도 없이 그렇게 뇌물을 챙겼던 것이다. 

 

운산의 후손들은 죽을 고생하면서도 그 큰 명예를 붙들고 신산고초를 겪으며 험산준령을 오르내렸다. 봉오동 역사 바로잡는 큰 과업을 운산의 장남 최봉우의 5남매가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를 세워서 수행하고 있다. 쉽지 않지만, 책도 내고, 학술세미나도 하고, 봉오동 방문도 하며 의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최성주 대표(장손녀)가 가족을 대리하여 이끌어가고 있다. 이 단체에 관심 갖고 후원하는 일은 명예로운 일이다. 깊이 생각해보면, 실은 오늘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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