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 인천시당 관계자들이 15일 오전 7시 부평역 앞에서 출정식을 연 뒤 시민들에게 안철수 후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사진 = 국민의당 인천시당 제공 )
1990년대 영종대교나 인천대교가 건설되기 전 월미도에서 영종도행 ‘용주2호’를 타고, 교사·의사·운전사 등 삼사의 역량이 요구됐던 모 학교에 재직할 당시 현관에 걸렸던 ‘君子三樂’의 글귀가 생각난다. 이것은 초대 교장 선생님께서 현관문을 드나들던 모든 이에게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교육을 통해 교사의 역량을 갖추라는 시금석(試金石) 같은 가르침이었는데 20여 년이 지나 그 의미를 깨달으니 뒤늦은 자책과 평생교육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君子三樂’은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가르치는 것(得天下英才而敎育之)'이다. ‘교육(敎育)’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됐다고 하며 ‘가르칠 교(敎)’ 자는 ‘회초리로 아이를 배우게 한다’이며, ‘기를 육(育)’ 자는 ‘갓 태어난 아이를 기른다’는 뜻이다. 물론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열악한 도서지역 환경에서도 100년 전부터 영재로 육성하기 위한 열정을 갖춘 곳이 있으니 바로 접적 지역인 대청도다. 대청도의 교육은 백령도, 소청도를 포함한 인근 세 섬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다. ▶ 동내동에 처음 ‘대청사숙(大靑私塾)’이 만들어지기까지 백령도에 백령
부평구경영자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을 다녀온 적이 있다. 동행한 분의 설명에 따르면 최부잣집의 덕과 인심이 워낙 유명해 동학, 일제시대, 6·25전쟁 등의 사회적 혼란기에도 폭도들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때문인지 지금도 400년 전통의 철학을 배우고자 국내는 물론 국왕, 정부 인사, 관광객 등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은 250년을 유지했다 한다. 이에 견줘 무려 400여 년 동안 경주에서 명성을 이어온 최부잣집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알 수 있다. 최부잣집은 병자호란 때 명장이며 공조참판과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던 최진립(崔震立) 장군의 부친 최신보(崔臣輔)로부터 최준(崔浚)에 이르기까지 13대 400여 년 간 만석꾼의 부(富)를 이어왔다. 국내 많은 유명 인사들이 반드시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으로 꼽는 1순위다. 우리 속담에 ‘작은 부자는 노력하면 되나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라는 말이 있다. ‘부불삼대(富不三代,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의 통설 속에 경주 최부잣집이 400년이나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6가지 실천 가훈이 있었
새단장을 마친 인천 제물포지하도상가가 9일 개장, 깔끔하고 산뜻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8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인천환경공단 송도자원회수센터에서 관계자들이 장비를 이용해 일회용기 쓰레기를 쌓고 있다. 센터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이 장기화하면서 일회용기 쓰레기양이 발생 이전보다 30%가량 증가했다"고 말했다. ( 사진 = 연합뉴스 제공 )
◈ 나무꾼의 하루 ▶ 땔감 구비의 경우 여러 명의 나무꾼이 필요했기에 3~5가구가 품앗이를 하는데, 대략 10명 안팎의 나무꾼으로 구성된다. 땔감 마련은 동시에 작업이 진행되며 나무를 하기 위해 약 일주일의 기간을 정했다. 정해진 날 새벽에 모여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해뜨기 전 아침 6시쯤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섰다. 땔감은 소나무를 비롯해 서어나무(일명 소사나무), 도토리나무, 솔 가래기, 나무뿌리(밑둥) 등 다양하며, 나뭇가지는 대체로 손가락 굵기 정도를 벴다. 한 아름 정도의 양을 모으면 준비한 칡 줄기로 단단히 묶어 단을 만들었는데, 하루에 성인이 벨 수 있는 양은 35~40단 정도였다. 귀가는 일몰 전에 이뤄졌으며 하루 일을 마치면 정성껏 마련한 밥상을 차려놓고 힘든 시간을 보상받았다. 음식 장만의 경제적 부담은 돌아가며 품앗이로 하는 일이기에 그다지 크지 않았다. ▶ 땔감을 운반할 경우 운반의 경우도 벨 때와 같이 품앗이에 따라 움직이는데 적어도 7~8명, 많으면 10명 정도 같이 움직인다. 운반하는 방법은 지게에만 의존하는 경우, 지게로 중간 지점까지 모아놨다가 달구지에 싣고 오는 경우가 있다. 농토가 거의 없는 모래울동 혹은 고주동에서는 주로
백령·대청·소청도로 이뤄진 대청군도는 섬마다 별칭이 있다. 백령도는 ‘먹고 남는 섬’이요, 소청도는 ‘쓰고 남는 섬’, 그리고 대청도는 ‘때고 남는 섬’이다. 1950~60년대 집집마다 달구지나 지게 지고 땔감 구하기가 식량 못지않게 중요했던 시절, 섬 가운데 위치한 삼각산(해발 343m)과 사방으로 뻗은 산줄기는 겨울철 집안의 온기를 채워주고도 남았기에 부르는 별칭인 것 같다. 연탄을 거쳐 보일러, 가스에 이르기까지 난방시설이 좋아졌지만 춥고 눈 많던 겨울철 산속에서도 어깨 펴고 살 수 있었던 원천, 대청도의 과거 땔감 준비는 어떻게 했을까? 50~60년 전 대청도의 땔감 문화에 대해 알아본다. 이 섬 인구는 2021년 12월 기준 721세대 1179명이다. ◈ 땔감 구비를 위한 준비물은 무엇이 있을까? 준비물은 낫, 톱, 숫돌, 칡줄기, 도시락, 지게, (가죽)장갑 등이다. 나무를 하는데 제일 중요한 낫은 대장간에서 육철을 쳐서 만든 조선낫(일명 우멍낫)으로 날은 두껍고 무겁다. 곡식을 베는 평낫(일명 왜낫)과는 다르다. 따라서 대청도 마을마다 대장간이 한 곳씩은 있어서 제작 의뢰했거나 인천에서 구입하기도 했고, 장사꾼이 사다주기도 했으니 집집마다 보통
박남춘 인천시장이 3일 영종하늘도시 제3연륙교 시점에서 건설현황을 보고 받고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 대외전략처장 윤태웅
백령도의 역사와 관련해 서적이나 전시관을 관람하면 꾸준히 등장하는 유물 한 점이 있는데, 무엇일까? 백령도의 기원전 역사를 얘기할 때 반드시 조개더미(貝塚)와 함께 이 유물이 언급되는데, 이유는 유물이나 유적이 많지도 않지만 형태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이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74년 발간한 ‘考古學(3집)’에 “백령도 진촌리에서 발견, 매장문화재로 신고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게 됐는데 자세한 출토 상황은 알 수 없다”고 언급되면서 알려지게 됐다. 아마도 1970년대라 하면 도굴꾼이나 고물상의 출입이 많았던 시절, 정식 조사가 아니었기에 도굴이나 수집 등 다른 방법에 의해 발견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 유물의 이름 유물의 이름은 검은간토기 일명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 이하 흑도)다. 흑도장경호 한자의 뜻을 모아 보면 ‘검을 흑(黑)’ ‘질그릇 도(陶)’ ‘긴 장(長)’ ‘목 경(頸)’ ‘병(단지) 호(壺)’인데, ‘긴 목의 검은 병(단지)’이란 뜻이다. 또한 손잡이(파수, 把手)가 부착돼 있어 ‘파수부 흑도장경호’라 한다. 다시 말하면 유물에 사용된 재료와 형태를 혼합해 부른 것이다. ▶ 제작 기법과 형태 앞선 자료에 의하면 유물에 대해 “(재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