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있었던 나토(NATO) 정상회의에 대해서 타임지는 지난 10년간의 국제회의 중 가장 중요한 회의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북대서양의 유럽국가들 군사 동맹체인 나토가 이렇게 주목받게 된 것은 단순히 윤석열 대통령이 국제무대에 데뷔했다거나, 쏟아지는 뒷이야기 때문이 아니다. 나토가 군사방어의 영역을 태평양으로까지 확대하고 그 방어의 대상도 러시아와 중국이라고 명백하게 한 회의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새로운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을 재현한 신냉전 시대(new-cold war)의 개막을 알린 회의였다는 것이다. 1945년 2차대전이 종결되면서 세계는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을 예상했지만 뜻밖의 이념대립이라는 냉전이 시작되었다. 냉전의 주역인 미국과 소련은 직접 전쟁하지는 않았지만 두 국가의 대리전쟁은 지구상 곳곳에서 치러졌다. 하나같이 자신들의 체제 우월을 주장하는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들이었다. 우리의 6.25 참변이 대표적인 전쟁이었다. 그러나 1989년 독일 베를린장벽이 기적처럼 무너지면서 냉전은 종식되었고 강대국 소련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이후 미국 유일의 슈퍼 파워로서 절대적 패권이 인정되는 국제질서가 지속되는 듯했지만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한 중국이
1959년 시카고대학의 찰스 라이트 밀즈(C. W. Mills. 1916∼1962)가 쓴 『파워엘리트(Power Elite)』는 출간과 동시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관료집단과 군수업자 그리고 군부 등 세 집단이 삼위일체가 되어 미국의 주요한 정책결정을 내리니 이들을 ‘파워엘리트’라고 하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집단은 이해관계를 같이하며 공동목적을 향해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나머지 미국인들을 이에 추종케 한다고 주장했다. 밀즈는 이같은 미국 사회는 결코 다양한 여러 집단 간의 유화(宥和)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맹비난을 하였다. 밀즈에 의하면 미국 사회는 결코 기회의 나라도 아니고, 다양성의 나라도 아닌 것이다. 권력은 항상 그들 파워엘리트들에 주어져 있고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그것을 행사해 미국을 점차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 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외쳤다. 사람들은 그를 분노의 사회학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별명을 얻기에는 파워엘리트의 전횡만을 고발해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밀즈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권력이 대물림되고 있는 미국 사회였을 것이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파워엘리트의 권력
내 이름은 소크라테스이다. 2500년 뒤의 사람들은 친숙하게 테스 형이라고도 부르기도 할 것이다. 오늘 나는 아테네 법정이 내린 독배형을 받으러 간다. 죄명은 아테네가 성립해 놓은 신(神)을 믿지 않고, 젊은 청년들을 유혹해 타락에 빠트렸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눈물로 탈출을 권했지만 나는 기꺼이 독배를 들기로 했다. 내가 독배를 들고자 한 이유는 결코 악법도 법이라 지켜야 한다는 천박한 주장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무지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경고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함이다. 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참여해 아테네를 지키는 데 나름의 일조를 한 건강한 아테네 시민이었다. 군인을 은퇴하고 노후를 보내기 위해 평생을 바쳐 수호한 고향 아테네에 돌아왔건만 놀랍게도 아테네는 너무도 변화되어 있었다. 참 진리와 지혜(episteme)를 나누는 전당인 공공장소는 모두 저마다의 속견인 독사(doxa)만을 소리높여 주장하는 무지한 시민들과 그들의 뒤에서 교묘한 논리로 포장한 허위의식을 마치 진리인 양 떠버리는 소피스트들의 궤변만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동안 아테네가 자랑하던 진정한 진리를 탐구하기를 즐기던 현명한 군중(賢
우리 역사에는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이 많다. 특히 엄혹한 시대에 일신의 안일함보다는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분들이 그러하다. 의암 손병희 선생도 그중에 한 분이다. 3·1독립혁명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대표임에도 정작 3.1혁명에 우리가 기억하는 인물은 유관순 누나뿐이다. 하물며 손병희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 최고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동학혁명 하면 무조건 전봉준을 떠올리지만, 손병희는 글쎄다. 그러나 손병희는 30만 동학군의 총지휘자였다. 1차 동학혁명은 호남지방에 국한된 거사였지만 그해 9월의 2차 기포는 동학교주 해월 최시형에 의해 전국의 동학도가 총동원할 것을 천명한 항일전쟁이자 진정한 혁명이었다. 해월은 1차 기포에서 전투력과 지휘력을 인정받은 전봉준을 호남의 최고지도자로, 그리고 영남과 충청, 강원 그리고 경기도와 이북지역 동학군의 총지휘관으로 당시 34살의 손병희를 임명했다. 안타깝게도 동학혁명은 무능한 정부와 왜군에 의하여 좌절되었지만, 보국안민·광제창생·척양척왜의 기치 아래 전국을 들불들의 함성으로 뒤덮었다. 혁명의 참여자들 대부분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1980년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대처 총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자유주의를 넘어서 경제영역에 국한되었던 시장논리를 전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즉, 사회는 없고 오로지 시장만 존재하므로 모든 사회구조는 시장의 논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고,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서는 자유경쟁 체제의 도입과 복지정책의 축소, 노동자의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노동유연화정책, 기업활동의 자유를 위해서는 모든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두 슈퍼 강국의 주도하에 신자유주의는 세계화라는 타이틀로 포장되어 전 세계를 장악했다. 우리도 1990년대 후반 IMF 구조기금을 받아야 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합류되었다. 세계화는 능력주의라는 미명하에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세계관, 사회 구조적 모순까지 개인과 집단의 능력문제로 환원해 버리는 21세기판 사회진화론으로 고착되었다. 자유주의가 20:80의 사회라고 한다면 신자유주의는 1:99의 사회로 상징되는 양극화의 시대였다. 신자유주의의 주장 중에서도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공기업의 민영화이다. 공기
금방 끝날 것 같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두 달째 지속되고 있다. 인터넷상으로 퍼지고 있는 부차 지역 등 절규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참혹한 동영상은 차마 끝까지 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벌써 난민이 5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다시 한번 전쟁을 규탄하면 절망에 빠진 우크라이나 국민의 안녕을 기원해 본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보도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소식은 대부분 서방 언론을 통해서이다. 당연히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악의 화신이자 전쟁광이고 상대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영웅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청맹과니가 아니라면 한쪽의 시각만으로 국제정세를 논해서는 안 된다. 전쟁의 원인제공을 누가 했는지, 모든 책임을 푸틴에게 돌리는 것이 정당한지, 우크라이나의 친나치세력(유로마이단)에 의하여 돈바스 지역에서 1월부터 러시아계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하고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민스크협정은 깬 자들은 누구인지. 미국은 경험없는 젤렌스키를 부추겨서 되지도 않을 EU와 NATO 가입을 선동하고 적당한 무기와 자금지원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아닌지. 모두 공정한 시각을 요구하는 질문들이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이 거론되고
지난주 일본 문부성은 고등학교 2학년 이상이 배울 14종의 검인정 교과서를 발표했다. 예상대로 이번에도 어김없이 우리의 인내심을 포기하게 하는 내용이다. 강제로 동원된 한국인들은 그저 돈을 벌러 동원된 노동자일 뿐이고,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간 종군위안부를 스스로 찾아온 위안부였다고 표현하였다.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일본의 국경선을 긋고 독도는 한국이 불법 점유한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주장도 변함이 없었다. 일본 극우 언론인 산케이신문은 아직도 (일본)정부의 검인정 기준에 부합하지 않고 있는 교과서가 5종이나 된다며 분개하고 있다. 도대체 미래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주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긴 기시다 정부도 작년 말에 한국에 고통을 주는 정책을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있으니 더 무슨 기대감이 있겠는가. 정책을 통해서 이웃 나라를 고통을 주겠다는 공공연하게 말하는 나라가 일본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다. 그 첫 정책이 더욱 강화된 역사왜곡인 것이다. 발전적인 한일관계는 과거를 묻지도 기억하지도 말고 일본이 하라는 대로 하라는 식이다. 이러면서도 북핵 위기를 핑계 삼아 한미일 동맹을 강조한다. 스스로 말하기 뭣하니까 미국을 통해서 압력을 행사하는 모양새이다. 작년
대선의 결과로 인한 트라우마가 꽤 오래가고 있다. 의학적 용어인 정신적 외상(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이 선거 후유증으로 전환되어 뉴스도 보기 싫고, 의욕 상실에 식욕부진까지 겹치고 있다.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의 충격으로 나온 선거 후 스트레스장애(Post Election Stress Disorder)를 나도 겪는가 보다. 그러나 이젠 일어나야 하는데 벌써 나오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들이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승리가 확정된 후 윤석열 당선자는 자신은 젠더, 성별로 갈라치기 한 적이 없다며 투표 결과는 다 잊었다고 한다. 글쎄? 국민통합을 위해서 투표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미라며 백번 환영이지만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이재명 후보보다 더 받은 표는 겨우 24만여 표였다. 0.73% 차이는 역대 최소 차이이자 다른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힘들 정도의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그만큼 나라가 양단 났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대통령 당선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갈라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정책과 비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투표 결과는 다
급기야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몰린 애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안전과 위로를 그리고 당신들의 애국적인 항전 소식에 감명하고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음을 밝힌다. 침략자 러시아의 야만적인 공격이야 당연히 가장 먼저 규탄하지만, 사태를 여기까지 몰고 온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행태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코미디언 출신인 정치 신인이라고 치부하던 언론이 이재명 후보가 정치 초짜의 어리석음 때문에 전쟁이 터졌다고 하자 한순간에 구국의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다. 수도 키예프를 지키며 결사항전을 지휘 중인 그의 행동은 분명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어설픈 언행이 러시아의 푸틴을 자극하였고 그것이 전쟁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1차 투표에서 30%, 결선투표에서 73%의 지지율로 당선된 전직 코미디언인 그는 자신의 소속사 대표를 비서실장에 앉히고 작가와 PD 등 가까운 지인과 인척들을 무수히 정부 요직에 배치하였다. 그 모습에 뉴욕타임스에서는 전문가, 외교관 없는 정부, 장군 없는 군대라고 비아냥거렸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크라이나의 EU와 NATO 가입을 강경하게 외쳤다. 그러
1960년 9월 26일 역사상 최초로 미국 대통령 후보들의 TV토론이 개최되었다. 미국 인구의 3분의 1인 7000만 명이 시청하였다. 공화당의 닉슨 후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 8년을 한 최고의 정치인이었고 민주당 후보는 40대의 무명 신인인 케네디였다. 연설에 자신이 있었던 닉슨은 아무런 예행연습도 없이 회색빛의 양복으로 출전하였고, 야심에 찬 케네디는 옅은 화장에 눈에 잘 띄는 짙은 색의 양복을 입고 나섰다. 케네디의 도발적인 질문에 논리적인 대응으로 시종일관 받아넘기는 닉슨은 왠지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반면 케네디는 건강한 구릿빛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으며 만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시청자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TV토론은 4차례 더 진행되었고 미국인들의 선택은 젊고 매력적인 케네디였다. TV토론을 통해 미국인은 베일에 가렸던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을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20대 대선 후보들의 TV토론이 지난주 시작되었다. 누구는 밋밋했다, 장학퀴즈 같았다는 냉랭한 평가도 있지만 날 선 공격과 어설픈 방어 그리고 논리적 주장과 억지 주장 등 시청률 39%에 이를 만큼 관심이 집중되었다. 물론 TV토론을 보고 후보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