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그가 죽은 지 어언 200년이 넘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살아있는 전설임은 분명하다. 매년 프랑스 일요신문이 공개하는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역사인물 Top 10’의 선두주자는 어김없이 나폴레옹이다. 왜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를까. 프랑스에 최고의 영광을 가져다줬기 때문일까? 물론 그 이유도 클 것이다. 요즘처럼 가세가 기울어가는 프랑스에서는 그가 더욱 그리울 테니 말이다. 이 남자의 군사적 수훈도 중요하지만 그가 프랑스인들의 일상에 남긴 업적은 지대하다. 프랑스에서는 주소 하나만 들고 택시를 타면 못 찾아갈 곳이 없다. 주소를 손에 들고도 전화를 하고 또 해야 겨우 목적지를 찾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이 편리함은 나폴레옹이 ‘거리에 번호 매기기’를 창안한 결과다. 쓰레기 수거 역시 프랑스는 18세기부터 실시했다. 이 또한 그의 아이디어였다. 어디 그뿐인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학사학위를 만들고,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를 고안한 것도 그였다. 사방팔방의 파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제1의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그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의 일부다. 이 다리는 파리 15구에 실제로 도도히 서 있다. 작자 기욤 아폴리네르. 그의 진짜 이름은 기욤 아폴리 나리 드 코스트로비츠키(Guillaume Apollinaris de Kostrowitzky). 1880년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신민으로 로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폴란드의 귀족 여인이지만 아버지는 누군지 모른다. 그는 대학도 가지 않은 괴짜다. 대학입학시험에 한 번 떨어지자 다시는 도전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공부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첫 직장으로 독일 귀족의 가정교사가 됐다. 그 집의 젊은 가정부를 사랑해 추근거렸지만 거절당했다. 실연의 고통을 어쩌지 못한 스무 살 청춘은 시로 발설했다. 이어 르뷔블랑슈에 ‘레레지아르크’라는 콩트를 발표했다. 이때 기욤 아폴리네르라는 사인을 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아폴리네르는 프랑스군에 참가하길 원해 프랑스 귀화를 결정했다.
왼팔을 턱에 괴고 무언가 골똘히 사색에 잠긴 남자. 고뇌하는 인간의 형상이 이처럼 고귀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 오귀스트 로댕(August Rodin)의 조각상이다. 예순두 살에 완성한 작품답게 원숙미가 물씬 풍긴다. 이 유명한 작품의 제작자 로댕. 그는 신성불가침 시대 인간의 본능과 관능, 그리고 고통을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한 시대의 예술을 이끈 거장이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초라했다. 근시로 인해 학습장애를 겪고 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학습 부진아였다. 이런 그가 유일하게 흥미를 갖고 즐거워 한 것은 스케치. 그의 부모님은 열네 살 된 아들을 데생과 수학을 공부할 수 있게 파리의 특수학교에 입학시켰다. ‘작은 학교(Petite École)’라 불리는 이 학교에서 로댕은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각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리의 명문인 에꼴데보자르(미술대학) 콩쿠르에 세 번이나 낙방했다. 데생 점수는 넘쳤지만 조각 점수는 언제나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 카리에-벨뢰즈를 만난 것이다. 로댕은 이 대가와 일하면서 그의 아틀리에에서 5년간 머물렀다. 이 협
화가 이중섭이 좋아한 시인 폴 베를렌느. 그는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스케치하러 나가기 전 귀여운 당신이 그리워 설레는 마음으로 폴 베를렌의 시를 적어 보내오.”라고 썼다. 그 시는 아마도 다음 시가 아니었을까. 거리에 비 내리듯/마음엔 눈물이 흐른다. 이토록 마음 깊이 스며드는/이 서러움은 무엇일까? 견딜 수 없는 마음엔/아 아, 비의 노래여! 다정한 비의 속삭임을/땅 위에도 지붕 위에도(.......) 베를렌느가 쓴 ‘거리에 비내리듯’이다. 허전한 마음을 유연하고 음악적인, 그리고 우수어린 운율로 노래하고 있다. 그의 애조 섞인 음조는 비운의 화가 이중섭의 감수성을 터치하기에 손색이 없다. 불멸의 시인 베를렌느. 1844년 봄, 프랑스 북동부 메츠에서에 태어났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 하지만 판사가 되려고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가세가 기울자 중퇴하고 보험회사에 취직했지만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문학서클과 고답파 시인들을 찾아다니며 시를 썼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외동아들이 시를 쓴답시고 파리의 보헤미안들과 어울리는 것을 심히 걱정했다. 결국 그녀는 베를렌느를 서둘러 결혼시켰다. 그렇다고 그가 시를 포기할리
“아름다운 밤, 오~ 사랑의 밤. 오~ 사랑의 아름다운 밤이여!” 미녀 쥘리에타와 그녀를 마중 나온 니클라우스의 2중창. 애틋하고 달콤한 이 노래는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그 유명한 호프만의 뱃노래다. 주인공 호프만은 세 명의 여성과 비극적 사랑을 나눈다. 무대는 베네치아. 대운하의 물결 위로 곤돌라가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사랑의 밤은 시작된다. 오펜바흐는 베네치아를 항해하는 곤돌라의 정겨운 풍경을 보고 이 곡을 작곡했다. 틀을 깬 천재 작곡가 오펜바흐. 1819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프랑스인으로 살다 파리 몽마르트르에 묻혔다. 오펜바흐가 프랑스인이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이삭 쥐다 오펜바흐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유대인 음악가였던 쥐다는 바이올린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아들을 파리 음악학원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자크는 1년도 못돼 학교를 팽개치고 나와 파리 오페라 코미크 단원이 됐다. 이때 짤막한 메들리를 작곡해 인정을 받았고, 코메디 프랑세즈의 단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5년 만에 여기도 청산하고 손수 극장을 만들어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희가극과 오페레타를 처음으로 고안해 냈다. 그가 명성을
인류가 최초로 달을 밟은 건 반세기전. 1969년 아폴로 11호를 타고 닐 암스트롱은 달에 도착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겐 커다란 도약이다.” 이 역사의 순간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류의 끝없는 도전과 응전의 결과다. 쥘 베른(Jules Verne)도 그중 한 사람이다. 베른은 후세의 달 착륙을 일치감치 예견했다. 1872년 그는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저서에서 한 세기 후 인간이 우주비행으로 달에 착륙할 거라 보았다. 예지의 왕 베른. 1828년 프랑스 북서부 낭트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인 아버지는 아들이 그의 뒤를 잇길 원했다. 따라서 법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전공보다 문헌을 모으고 분류하는데 몰두했다. 도서관에서 불철주야 탐험소설을 읽고 과학의 신기술에 관한 자료를 모아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상에 나온 ‘5주간의 풍선 여행’은 기상천외했다. 하늘에 만족하지 못한 베른은 바다 속에도 도전했다. 15년간 요트를 타고 대서양과 지중해를 오가며 모험을 벌였다. 이는 불멸의 저서 ‘해저 2만리’로 탄생했다. 베른의 기발한 이 상상력은 끝없는 여행과 탐구의 결과였다. 하지만 말년
프랑스 낭만파 음악의 거장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사랑에 눈이 멀어 살인자가 될 뻔했다. 약혼녀 마리 모케(Marie Moke)와 피아노 제조업자 카미유 플레옐의 염문설이 돌자 이들을 죽이려 했다. 꿈에 그리던 로마상. 다섯 번의 도전 끝에 결국 쟁취했다. 로마의 빌라 메디시스에 도착한 그. 낯선 곳에서 마리-모케의 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안달이 난 베를리오즈. 그때 마침 장모가 될 ‘하마’로부터 편지가 왔다. 마리와의 파혼을 알리며 그녀가 피아노 회사 플레엘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절망에 빠진 베를리오즈. 곧 분노로 치달아 살인극을 꿈꿨다. 1803년 12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라코트생탕드레(La Cote-Saint-Andre)에서 태어난 그. 아버지 루이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에서 내놓으라하는 의사였다. 루이는 아들이 자기와 같은 길을 가길 바랐다. 엑토르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 채 파리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수술실에서 실습 도중 냅다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수술실 한 귀퉁이서 쥐들이 모여 사람 척수를 정신없이 갉아먹고 있는 장면을 보고 구역질이 났기
“다량의 빛과 그늘을 찾아라. 나머지는 저절로 온다. 그것은 종종 별로 중요치 않다.” 별로 중요치 않은 것, 이것이 현대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예술혁명의 화신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이야기다. 화폭의 새 지평을 연 그를 세기의 지성 에밀 졸라는 경탄했고, 미셸 푸코는 100쪽이 넘는 글로 분석했다. 1832년 1월 23일 파리 7구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마네. 부친 오귀스트 마네는 법무부장관의 비서실장이었고, 모친 외제니 데지레는 스톡홀름에 주재하는 외교관의 딸이었다. 근엄한 가문에서 자랐지만 상당히 엉뚱하고 왕정주의자였던 외삼촌 덕에 일찍 예술계에 눈을 떴다. 해군 함장이었던 외삼촌은 에두아르와 그의 동생 외젠을 데리고 자주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그는 조카들에게 대가들의 그림을 비평했고, 특히 스페인관을 찾을 때는 더욱 열정적이었다. 해군장교에서 화가로 꿈을 돌린 마네 열두 살에 마네는 뤽상부르공원 근처 롤랭중학교에 입학했다. 공부에 흥미가 없어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그의 귀중한 자산이 될 앙토냉 프루스트를 만났다. 마네는 푸루스트과 함께 외삼촌을 따라 루브르
1980년대 한국.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낭만과 인정은 살아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갈망으로 시위가 끊이지 않고 이들을 저지하는 경찰 기동대는 살벌했다. 사이렌이 울리고 돌과 화염병이 날아가고... 모진 풍파 속에서도 대한민국 청년들은 꿋꿋하게 그들의 젊음을 만끽했다. 대학가요제가 열리고 청바지에 통기타를 맨 선수들이 출전해 멋들어진 노래를 하고, 수상작들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이런 여유 덕에 우리는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것이 아닐까. 그 추억 속에 ‘모모’가 있다. 가수 김만준 씨가 불러 대히트한 곡.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이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수 없다는(...)” ‘모모’는 모하메드의 애칭 발랄하고 경쾌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우리는 그저 흥얼거렸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결코 간단치 않다. ‘모모(Momo)’. 모하메드의 애칭이다. 열 네 살의 알제리계 소년. 그는 파리 20구 벨빌(Belleville)에 있는 로자 아줌마네 집 7층에 산다. 이 아줌마는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해 매춘부 생활을 했
분수가 흐르고 계단 위에 한 사람이 정갈히 손을 포개고 앉아 있다. 우리의 소녀상을 흡사 닮았다. 단지 이 주인공은 콧수염을 가진 사나이다. 슈바이처 박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주가 그를 기리기 위해 생 토마 광장에 만든 청동상이다. 알베르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행동하는 인간이자 인도적 지원의 파이오니아였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다 끝내 그곳에 묻혔다. 그는 ‘생명에 대한 외경(Respect de la vie)’을 중시했고 이 윤리를 잊으면 인류문화는 안녕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이를 높이 평가한 스톡홀름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거룩한 휴머니스트는 1875년 1월 프랑스 동부 카이제르베르(Kaysersberg)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6개월 된 그를 안고 발령지인 뮌스테르의 귄스바흐(Gunsbach)로 갔다. 거기서 세 명의 누나,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 선물을 슈바이처는 자연스런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스러워했다. 조숙하고 사려 깊었던 꼬맹이 슈바이처. 또래 아이들과 많이 달랐다. 그의 감성은 남과 다른 특별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