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거대한 대기가 내 책을 폈다가 다시 접는다. 가루 같은 물결이 바위에서 솟아난다! 날아가거라 정말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희열하는 물로 부숴라. 삼각돛들이 모이를 쫓고 있는 이 지붕을. 계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거대한 바람, 치솟는 파도, 부서진 포말. 시원하고 거침없는 한나절의 해안가 파노라마다. 해변의 묘지(Le Cimetière marin). 20세기 최대의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대표작이다. 이 시를 발레리는 그의 고향 세트(Sète) 언덕에 있는 한 공동묘지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 스산한 공동묘지. 그 묵중함을 경쾌한 미로 승화시키는 이 마법. 거장 발레리가 아니면 누가 감히 이 기교를 부릴 수 있겠는가. 이 마법은 발레리의 고향 세트로부터 나왔다. 발레리의 정신적 동반자였던 세트. 그의 시의 원천이자 사고(思考)의 모태였다. “항구 근처의 비탈길과 골목길, 박물관, 고등학교, 방파제 근처의 원형교차로, 공동묘지, 등대.” 세트의 경치를 노래하기 위해 발레리가 자주 동원한 단어들이다. 자기 고향을 너무도 사랑했고 예찬했던 천재 시인. 그는 어느 날 예술가 친구
11월의 어느 날. 프랑스 북부 해안가 아치형 절벽 밑에서 한 남자가 그만 화폭을 접는다. 그리곤 곧장 연인에게 편지를 쓴다. “이곳은 지금이 제일 좋아요. 이 모든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 무능함에 화가 납니다.” 끌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이야기다. 이 남자를 절망시킨 곳. 그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에트르타(Etretat). 파리 북서쪽 200킬로 지점에 있는 알바트르(Albâtre) 해안가의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희한하고 아름다운 석회암 절벽들이 있다. 이 절벽들 위로 미끄러지듯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광선은 신비 그 자체다. 코끼리 형상의 절벽 끝에 나 있는 성문의 실루엣은 어떠한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닮았다. 여기에 풍요로운 전원, 울퉁불퉁한 절벽에 출렁이는 바다, 해안에 좌초된 배까지. 이 보다 더 완벽한 그림 구도는 없다. 에트르타 마법. 이 마법에 걸린 모네는 50여 점이 넘는 그림을 여기서 남겼다. 사실 모네 하면 아름다운 수련(Nymphéas)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수련 연작은 모든 걸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모네는 자연 속에 빠져 풍경을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그중 하나가 에트르타
딴 따다다 다 따다다 다~ 딴딴 따다다 다~~ 드럼이 조심스럽게 장단을 쳐 들어간다. 플루트가 마법의 소리를 내며 합류한다. 환상적 듀엣의 하모니는 반복적으로 계속된다. 첼로와 바순, 클라리넷은 혹여나 지루할까 끼어든다. 드럼은 첫 동작을 한 치의 흐트럼 없이 반복하고 플루트는 톤을 높여 재등장한다. 하프, 기타, 바이올린, 트럼펫, 피콜로, 트롬본, 심벌즈... 이 세상의 온갖 악기가 하나씩 합세하며 오케스트라는 절정에 도달한다. 지극히 단순한 템포와 리듬.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리드미컬하고 몽환적이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기발하다. 볼레로(Boléro). 독창적인 이 곡은 기존 음악의 틀을 완전히 깼다. 라벨은 이 곡을 당대 최고의 러시아 무용수 이다 루빈시테인(Ida Rubinstein)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이 곡은 라벨이 스페인 안달루시아 춤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라벨과 스페인.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 라벨은 1875년 피레네-아틀란티크 주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759킬로 떨어진 서남단의 작은 마을 시부르. 이곳은 프랑스의 끝 지점이고 스페인의 시작 지점이다. 우뚝 선 피레네산맥과 푸른 대서양
천재는 요절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이야기다. 1960년 1월 4일 새해 벽두, 에트랑제(이방인)의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46세 카뮈의 갑작스런 죽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지 겨우 3년째 되었을 때였다. 카뮈는 이날 루르마랭(Lourmarin)에서 프랑스 최고의 출판사 갈리마르 사장 부부와 함께 파리행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신의 장난인가. 그가 탄 자동차는 목적지에 거의 도달해 가로수를 들이받고 산산조각 났다. 얄궂은 신의 질투였다. 카뮈가 마지막 자동차를 탔던 보클뤼즈(Vaucluse) 루르마랭. 그는 여기서 수많은 소설을 잉태했다. 카뮈는 이곳에 살기를 오랫동안 염원했다. 그가 처음 이곳을 방문한 건 서른 살 때. 시인 친구 앙리 보스코(Henri Bosco)를 만나러 갔다. 둘은 그날 전갈(scorpions)이 가득한 루르마랭 성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그 후 카뮈는 이곳에 둥지를 틀고자 꿈을 더욱 키웠다. 꿈꾸는 자 꿈을 닮는다고 했던가. 카뮈의 경우가 그랬다. 1957년 10월 스톡홀름은 그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줬다. 노벨문학상으로 받은 거액의 상금. 수상 소감을 마치고 연단을 빠져나오는 카뮈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카뮈 씨
한 남자가 거울 앞에 앉아 있다. 손에는 가위를 들고 있다. 그 남자는 그만 자기의 귓불을 싹둑 자르고 만다. 이 잔인한 남자는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였다. 1888년 크리스마스이브. 일요일, 온종일 비가 내렸다. 마을은 인적이 끊겼다. 창녀촌과 우체국만은 예외였다. 이 시절 우체부는 일요일도 근무했다.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 고흐는 환청과 환각으로 몸부림쳤다. 그때 우체부가 동생 테오의 편지를 들고 왔다. 프랑스 남부 아를(Arles)에 있는 고흐의 노란집이었다. 비극! 하지만 아를은 고흐에게 영혼의 문이었다. 고흐가 아를에 정착한 것은 순전한 우연. 2년간의 파리생활을 접고 고흐는 남쪽으로 햇빛을 찾아 떠났다. 번잡한 도시생활과 북쪽지방의 살벌한 날씨에 짓눌려 따뜻한 태양이 그리웠다. 무엇보다 새로운 화법을 완성하기 위해 프로방스의 빛과 색깔들이 필요했다. 따라서 마르세유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사고 아닌 사고가 났다. 아를에 반하고 말았다. 결국 마르세유를 배신해야 했다. 아를의 농촌은 고흐에게 필요한 것을 다 줄 것만 같았다. 고흐가 도착한 건 2월. 엄동설한이었다. 그러나 곧 포근한 봄이 왔다. 고흐는 온통 헤집고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피아노곡은 단연 짐노페디(Gymnopédies)다. 이곡은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의 대표작이다. 짐노페디란 무엇일까. 프랑스어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어다. 문학을 즐겼던 사티는 플로베르의 소설 살람보(Salammbô)와 고대 그리스춤에서 영감을 얻어 ‘짐노페디’를 만들었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추는 춤.” 사티는 몽마르트르를 오가며 말라르메, 베를렌느, 꼭도, 피카소 등을 만나 우정을 쌓고,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이는 그의 음악에 큰 영향을 줬다. 주옥같은 그노시엔느(Gnossiennes)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어 ‘크노소스’에서 영감을 얻었다. 인생은 아이러닌가. 피아노에 소질이 없다는 평가를 받던 사티가 피아노의 대가가 됐으니 말이다. 사티는 노르망디 옹플뢰르(Honfleur)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파리로 오지만 갑자기 어머니를 잃고 형과 함께 다시 옹플뢰르 할머니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다시 파리로 아버지를 찾아오게 된다. 열 살 연상의 피아노 선생과 재혼한 아버지. 그 여인이 사티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것이다. 사티는 주로
1999년 중국령이 된 마카오. 하지만 50년간 중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특별행정구(Macau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SAR)다. 오랫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유럽풍 도시다. 서구식 건물들과 즐비하게 늘어선 카지노. 세계 제1의 도박 도시가 되기에 충분하다. 카지노로 연간 벌어들이는 돈은 약 200억 달러(약 22조원). 국내총생산액의 40%다. 마카오 정부는 이 돈으로 시민들에게 국가 보너스를 지급하고 있다. Wealth Partaking Scheme(부의 분할계획). WPS는 2008년부터 마카오 특별자치 정부가 마카오 거주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시민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정책이다. 주요 목적은 경제발전의 과실을 주민들과 공유하고 인플레이션을 완화하는 것이다. 수급 조건은 거주증명서를 가지고 있거나 증명서 갱신이 가능하면 된다. 2008년 프랜시스 탐(Francis Tam) 마카오 재정경제사장( Secretary for Economy and Finance)은 모든 영주권자와 일시거주자에게 각각 5000 파타카(patacas, 약 75만원)와 3000 파타카(450000)를 기본소득으로 지급했다. 이해 11월 8일 마
일본이 기본소득제에 관심을 갖은 건 최근. 2001년 사회학자 다케가와(武川 正吾)는 학생들이 기본소득을 공부할 수 있도록 ‘사회정책 교과서’를 출간했다. 그러나 처음 5년간, 기본소득은 실현 가능한 정책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발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2006년 이후부터 상황은 반전해 기본소득제 연구가 활발해졌고, 2010년까지 출판된 논문은 108개나 됐다. 특히 야마모리(山森 亮) 교수는 《기본소득 입문(ベーシック・インカム入門)》을 출판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금상첨화로 2010년 “기본소득 일본네트워크(BIJN)”가 창설됐다. 이때부터 일본 정치권은 기본소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2010년 참의원선거에서 신당일본(新党日本)이 처음으로 기본소득을 거론했고, 모두의당(みんなの党)은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기초연금과 생활보호수당을 통합한 미니멈 인컴’을 공약했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정치적 어젠다로 크게 부각된 것은 2017년 중의원선거. 동경 도지사 고이케(小池 百合子)가 이끄는 희망당(希望の党)이 인공지능시대를 맞이하여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를 기본소득제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모두의 당과 신당일본 역시 기본소득을 공약했고, 일본 사
인도는 중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우리의 20배가 넘는 13억이다. 이 중 3분의 2는 빈곤상태에 놓여있다. 아동 두 명 중 한 명은 영양실조다. 특히 인도 중부의 마디아 프라데시(Madhya Pradesh) 주의 고다쿠르(Ghodakhurd)와 자그말 피팔야(Jagmal Pipalya) 마을은 가장 심하다. 영양실조와 설사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반전을 기대한 걸까. 마디아 프라데시 주 정부는 기본소득 실험을 단행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 간 고다쿠르와 자그말 피팔야, 그리고 다른 일곱 개 마을의 주민들에게 성별, 나이, 신분, 직업에 관계없이 매월 200루피(약 3160원)를 지급했다. 아동들에게도 100루피(약 1580원)를 줬다. 수혜자들은 총 6000명. 이들은 기본소득을 받아 식료품비, 보건비, 교육비 등 필요한 곳에 사용했다. 이 소득은 직장 없이 살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는 유용했다. 유니세프(UNICEF)는 2014년 12월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회의에서 마디아 프라데시의 기본소득 실험 보고서를 영어와 힌두어로 출판하고, 성공 사례로 소개했다. 더욱 더 혁명적으로 기본소득을
석유 수출국 이란은 부자다. 그러나 이란엔 가난한 사람들이 참 많다. 아이러니다. 토크빌이 1833년 영국을 방문하고 부자 나라에 웬 가난한 사람들이 이리 많냐며 깜짝 놀랐던 장면을 떠올리면 이 상황이 좀 이해가 갈까. 아무튼 이란의 불평등은 정책의 실패. 국가의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구 8500만 명, 이 중 3분의 2는 도시에 거주한다. 인플레이션도 늘 존재한다. 이란정부는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국가의 원조를 받지 못하고 소외된 채 사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공적원조는 대부분 에너지, 밀가루, 우유, 식용유, 설탕을 사는 데 필요한 보조금 정도. 이 중 에너지 비용은 보조금의 약 90%. 국내 총생산의 30%였다. 이는 과도한 에너지 사용과 밀수를 조장했다. 게다가 에너지 보조금의 70%는 상위 30%에게 돌아갔다. 1인당 식량 소비는 모두 비슷한데 에너지 소비는 상위 10분위가 하위 10분위보다 5배 더 많았다. 이란 정치인들은 이러한 불합리한 정책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지도자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다행이 라프산자니(Rafsanjani) 정부(1989–97)와 하타미(Kh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