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밤, 오~ 사랑의 밤. 오~ 사랑의 아름다운 밤이여!” 미녀 쥘리에타와 그녀를 마중 나온 니클라우스의 2중창. 애틋하고 달콤한 이 노래는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그 유명한 호프만의 뱃노래다. 주인공 호프만은 세 명의 여성과 비극적 사랑을 나눈다. 무대는 베네치아. 대운하의 물결 위로 곤돌라가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사랑의 밤은 시작된다. 오펜바흐는 베네치아를 항해하는 곤돌라의 정겨운 풍경을 보고 이 곡을 작곡했다. 틀을 깬 천재 작곡가 오펜바흐. 1819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프랑스인으로 살다 파리 몽마르트르에 묻혔다. 오펜바흐가 프랑스인이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이삭 쥐다 오펜바흐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유대인 음악가였던 쥐다는 바이올린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아들을 파리 음악학원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자크는 1년도 못돼 학교를 팽개치고 나와 파리 오페라 코미크 단원이 됐다. 이때 짤막한 메들리를 작곡해 인정을 받았고, 코메디 프랑세즈의 단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5년 만에 여기도 청산하고 손수 극장을 만들어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희가극과 오페레타를 처음으로 고안해 냈다. 그가 명성을
인류가 최초로 달을 밟은 건 반세기전. 1969년 아폴로 11호를 타고 닐 암스트롱은 달에 도착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겐 커다란 도약이다.” 이 역사의 순간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류의 끝없는 도전과 응전의 결과다. 쥘 베른(Jules Verne)도 그중 한 사람이다. 베른은 후세의 달 착륙을 일치감치 예견했다. 1872년 그는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저서에서 한 세기 후 인간이 우주비행으로 달에 착륙할 거라 보았다. 예지의 왕 베른. 1828년 프랑스 북서부 낭트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인 아버지는 아들이 그의 뒤를 잇길 원했다. 따라서 법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전공보다 문헌을 모으고 분류하는데 몰두했다. 도서관에서 불철주야 탐험소설을 읽고 과학의 신기술에 관한 자료를 모아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상에 나온 ‘5주간의 풍선 여행’은 기상천외했다. 하늘에 만족하지 못한 베른은 바다 속에도 도전했다. 15년간 요트를 타고 대서양과 지중해를 오가며 모험을 벌였다. 이는 불멸의 저서 ‘해저 2만리’로 탄생했다. 베른의 기발한 이 상상력은 끝없는 여행과 탐구의 결과였다. 하지만 말년
프랑스 낭만파 음악의 거장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사랑에 눈이 멀어 살인자가 될 뻔했다. 약혼녀 마리 모케(Marie Moke)와 피아노 제조업자 카미유 플레옐의 염문설이 돌자 이들을 죽이려 했다. 꿈에 그리던 로마상. 다섯 번의 도전 끝에 결국 쟁취했다. 로마의 빌라 메디시스에 도착한 그. 낯선 곳에서 마리-모케의 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안달이 난 베를리오즈. 그때 마침 장모가 될 ‘하마’로부터 편지가 왔다. 마리와의 파혼을 알리며 그녀가 피아노 회사 플레엘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절망에 빠진 베를리오즈. 곧 분노로 치달아 살인극을 꿈꿨다. 1803년 12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라코트생탕드레(La Cote-Saint-Andre)에서 태어난 그. 아버지 루이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에서 내놓으라하는 의사였다. 루이는 아들이 자기와 같은 길을 가길 바랐다. 엑토르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 채 파리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수술실에서 실습 도중 냅다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수술실 한 귀퉁이서 쥐들이 모여 사람 척수를 정신없이 갉아먹고 있는 장면을 보고 구역질이 났기
“다량의 빛과 그늘을 찾아라. 나머지는 저절로 온다. 그것은 종종 별로 중요치 않다.” 별로 중요치 않은 것, 이것이 현대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예술혁명의 화신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이야기다. 화폭의 새 지평을 연 그를 세기의 지성 에밀 졸라는 경탄했고, 미셸 푸코는 100쪽이 넘는 글로 분석했다. 1832년 1월 23일 파리 7구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마네. 부친 오귀스트 마네는 법무부장관의 비서실장이었고, 모친 외제니 데지레는 스톡홀름에 주재하는 외교관의 딸이었다. 근엄한 가문에서 자랐지만 상당히 엉뚱하고 왕정주의자였던 외삼촌 덕에 일찍 예술계에 눈을 떴다. 해군 함장이었던 외삼촌은 에두아르와 그의 동생 외젠을 데리고 자주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그는 조카들에게 대가들의 그림을 비평했고, 특히 스페인관을 찾을 때는 더욱 열정적이었다. 해군장교에서 화가로 꿈을 돌린 마네 열두 살에 마네는 뤽상부르공원 근처 롤랭중학교에 입학했다. 공부에 흥미가 없어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그의 귀중한 자산이 될 앙토냉 프루스트를 만났다. 마네는 푸루스트과 함께 외삼촌을 따라 루브르
1980년대 한국.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낭만과 인정은 살아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갈망으로 시위가 끊이지 않고 이들을 저지하는 경찰 기동대는 살벌했다. 사이렌이 울리고 돌과 화염병이 날아가고... 모진 풍파 속에서도 대한민국 청년들은 꿋꿋하게 그들의 젊음을 만끽했다. 대학가요제가 열리고 청바지에 통기타를 맨 선수들이 출전해 멋들어진 노래를 하고, 수상작들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이런 여유 덕에 우리는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것이 아닐까. 그 추억 속에 ‘모모’가 있다. 가수 김만준 씨가 불러 대히트한 곡.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이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수 없다는(...)” ‘모모’는 모하메드의 애칭 발랄하고 경쾌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우리는 그저 흥얼거렸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결코 간단치 않다. ‘모모(Momo)’. 모하메드의 애칭이다. 열 네 살의 알제리계 소년. 그는 파리 20구 벨빌(Belleville)에 있는 로자 아줌마네 집 7층에 산다. 이 아줌마는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해 매춘부 생활을 했
분수가 흐르고 계단 위에 한 사람이 정갈히 손을 포개고 앉아 있다. 우리의 소녀상을 흡사 닮았다. 단지 이 주인공은 콧수염을 가진 사나이다. 슈바이처 박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주가 그를 기리기 위해 생 토마 광장에 만든 청동상이다. 알베르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행동하는 인간이자 인도적 지원의 파이오니아였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다 끝내 그곳에 묻혔다. 그는 ‘생명에 대한 외경(Respect de la vie)’을 중시했고 이 윤리를 잊으면 인류문화는 안녕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이를 높이 평가한 스톡홀름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거룩한 휴머니스트는 1875년 1월 프랑스 동부 카이제르베르(Kaysersberg)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6개월 된 그를 안고 발령지인 뮌스테르의 귄스바흐(Gunsbach)로 갔다. 거기서 세 명의 누나,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 선물을 슈바이처는 자연스런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스러워했다. 조숙하고 사려 깊었던 꼬맹이 슈바이처. 또래 아이들과 많이 달랐다. 그의 감성은 남과 다른 특별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벨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라는 프랑스 말이다. 문학, 음악, 미술 등이 활짝 핀 19세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 문화융성기를 주도한 건 단연 문학이었다. 쥘 베른,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보들레르, 모파쌍, 조르주 상드, 발자크, 플로베르, 스탕달. 이 뛰어난 작가들은 화가들, 작곡가들과 함께 모든 예술을 인류사상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 중 스탕달(Stendhal)은 프랑스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쓴 ‘적과 흑’은 바깔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 자주 등장한다. 이 소설은 사회의 모든 계층을 넘나드는 활기찬 개인주의자 줄리앙 쏘렐(Julien Sorel)을 통해 역사적 과도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이전의 스탕달은 무명에 본명은 앙리 베일(Henri Beyle)이었다. 그렇담 스탕달이란 이름은 어디서 연유한 걸까. 스탕달은 베일로 살던 1807년과 1808년 프랑스 동부 라인강 하구의 빌헬민 그리에쉐임에 살았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독일의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예술비평가인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고향인 삭사날(Saxe-Anhalt: 독일어 발음은 작센 안할트)이 있었다. 빙켈만을 존경했던 베일은 이 마을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20세기를 빛낸 찬란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울림이 있는 색상과 심플한 형태로 자기만의 화법을 개척했다. “예술가는 본능과 직감에 의해 이끌려야 한다”는 명제로 예술을 새롭게 창조한 마티스. 그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북부 카토 캄브레시스의 외할아버지 댁이었다. 하지만 유년기를 보낸 건 외가에서 15킬로 떨어진 보엥 앙 베르망드아의 부모님 집이었다. 부친은 곡물과 그림을 파는 가게를 했고 모친은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가 자란 곳은 베틀을 짜는 직물염색공업이 발달했다. 마티스의 색감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마티스는 청년기까지 전혀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법률보조인으로 일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일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급성맹장염 수술을 받고 한 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 때 어머니는 그에게 화구상자를 주었다. 이는 정녕 신의 한수였다.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마티스는 인생의 재미를 느꼈다. 결국 직장을 접고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학창시절 마티스는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낀 채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아~베`마리~~아(Ave Maria)!~’ 한국어로 번역하면 ‘안녕하세요 마리아님!’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를 찾아와 예수를 수태한 사실을 알리며 건넨 인사라고 한다. 이를 모태로 슈베르트가 ‘아베마리아’를 작곡했고, 카치니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아름답고 손색이 없지만, 아베마리아는 역시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으뜸이다. 이 곡은 천재 작곡가 샤를르 구노(Charles Gounod)가 1853년 바흐의 서곡에 가사를 넣어 만든 것이다.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진정되고 영혼이 맑아진다. 프랑스 그랑 오페라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 구노. 그는 1818년 파리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어린 구노는 어머니께 레슨을 받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피아노를 배웠다. 그 후 파리음악원에 들어 가 앙뚜안 레이체의 지도를 받으며 화성을 공부했고, 스무 살 때 이미 로마 대상을 받았다. 구노는 초년기 종교음악에 몰두했다. 하지만 세속적 영감으로 눈을 돌렸고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가 첫 오페라 사포(Sapho)를 작곡한 건 1851년. 그로부터 5년 후 걸작 ‘파우스트’를 발표했다. 하지만
‘세상의 근원.’ 여성의 하체를 노골적으로 그린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걸작이다. 너무도 사실적인 이 그림은 오랜동안 초록색 실크 베일 뒤에 숨어 있었다. 세간을 놀라게 한 스캔들의 화가 쿠르베. 그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중 가장 파워풀했다. 프랑슈 콩테 오르낭(Ornans)의 지주 아들로 태어난 쿠르베. 딸 부잣집의 장남이었던 그는 유년기 아버지의 농장에서 소를 치고 농사를 직접 지었다. 동네에 나가 산사람들과 사냥꾼, 어부, 나무꾼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가 미술을 시작한 건 초등학교 시절. 이 생활은 브장송 왕립학교에 입학해서도 계속됐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공학도가 되길 원했다. 뜻을 거역하지 못한 그는 공과대학 입학시험을 쳤다. 그러나 낙방했다. 진로를 바꿔 스무 살이 되던 해 법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로 상경했다. 그러나 법 공부대신 매일 그림만 그렸다. 자식 앞에 장사 없다던가! 결국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자기 길을 가도록 허락했고, 발 벗고 나서서 지원해 줬다. 너무도 자유분방했던 이 화가는 학교 대신 루브르 박물관을 좋아했다. 매일 거기에 나가 거장들의 그림을 복사해 연습했다. 쿠르베는 스무 살 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