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의 어여쁜 두 소녀가 피아노 앞에 있다. 한 소녀는 악보를 응시하고 다른 소녀는 건반을 두드리고 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Jeune filles au piano)'.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대표작이다. 파리에서 모델 살 돈이 없어 시골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르누아르. 마흔아홉에 행운을 잡았다. 프랑스정부가 룩셈부르크 뮤지엄에 전시하기 위해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산 것이다. 큰돈을 번 르누아르. 난생처음 파리에 집을 사고 에소이(Essoyes)에 아틀리에도 열었다. 늦게 인생이 활짝 피었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무지하게 고생한 흙수저였다. 재봉사인 아버지와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그. 부모님은 가난을 탈출하고자 세 살배기 르누아르를 업고 파리로 이사했다. 하지만 도회지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열세 살의 어린 르누아르는 결국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도자기공장에 취직해 문양을 넣고 부채를 그리고 장롱에 문장을 넣었다. 이때 8년간 야간학교에 다니며 장식예술과 데생을 공부했다. 그 덕일까. 르누아르는 스물한 살 때 프랑스 최고의 미술학교, 파리 에꼴 데 보자르에 합격했다. 여기서 모네를 만나 친구가 됐다
“거긴 가지 말아요! 그 나쁜 놈들은 빵을 만드는데 악마가 발명한 수증기를 사용한단 말이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의 숨결인 북풍과 동풍을 이용해 일을 하고 있소.”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풍차방앗간의 편지(Les Lettres de mon moulin)』다. 어두운 파리와 빛나는 프로방스를 대비시킨 이 단편은 도데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이 소설의 무대는 프랑스 남쪽 끝 퐁비에이유(Fontvieille).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무대인 아를(Arles)과 길쌈의 마을 파라도(Paradou) 사이에 있다. 옛날에 이곳엔 풍차방앗간이 많았다. 프로방스 사람들이 밀방아를 찧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파리에서 온 사람들이 기계방앗간을 세우면서 풍차방앗간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웬일인가. 언덕 위의 코르니유(Cornille) 영감님 풍차방앗간은 돌아갔다. 이 영감님은 빈 방아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밀을 안 마을사람들은 모든 밀을 코르니유 영감님께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 후 이 영감님은 절대로 일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골사람들의 인정과 의리가 산업화와 기계문명의 거대한 회오리를 막아낸 감동의 대서사시다. 프랑스
“바스크의 촉망받던 군인 돈 호세. 자신에게 꽃을 던져준 집시여인에게 영혼을 빼앗겼다. 착하고 얌전한 고향처녀 미카엘라와 결혼하려고 맘을 돌려 보지만 그 집시여인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비극의 오페라 카르멘(Carmen). 이 곡의 작곡자는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다. 그 역시 너무나 천재적 이어서였을까. 서른여섯의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 않던가. 카르멘을 두고 한 말 같다. 비제는 파리에서 가발을 만들고 이발사를 하다 가곡 선생이 된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였을까. 피아노에 소질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건 어머니다. 비제는 어려서 피아노와 작곡 경연대회를 모두 휩쓸었다. 오페라를 작곡한 건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아름다운 ‘진주조개잡이(Pêcheurs de Perles)’는 스물다섯에 만들었다. 하지만 비제는 아직 성공한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에게 찬스가 온 건 파리 오페라 코미크가 카르멘을 주문했을 때. 비제는 야심찬 꿈을 갖고 부기발(Bougival)로 거처를 옮겼다. 센 강 둔치의 한적한 곳에서 카르멘을 쓰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그가 쓴 원고
“진실은 땅 속에 묻히면 점점 자라며 숨이 막혀서, 결국 그것이 터지는 날에는 모든 것을 날려버릴 만한 폭발력을 얻게 된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 에밀 졸라(Emile Zola)의 고발문이다. 진실의 은폐로 간첩이 된 드레퓌스(Alfred Dreyfus) 대위. 유대인이었기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이에 분노한 정의의 기자 졸라. 펠릭스 포르 대통령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자뀌즈(J'accuse: 나는 고발한다)!” 이는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고, 마침내 지식인들의 선언문을 이끌어 냈다. 재판은 뒤집혔고 드레퓌스는 누명을 벗었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두 동강 나게 한 “드레퓌스 사건.” 이를 종식시킨 졸라. 프랑스 양심의 표상이 됐다. 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존경은 하늘을 찔렀다. 오죽했으면 사후 6년 만에 프랑스 위인들의 성전인 팡테옹에 그를 모셨을까. 하지만 졸라의 인생초년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모자라는 듯 말을 더듬고 국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타지에서 온 학생이 이처럼 꺼벙하니 프로방스 학생들은 그를 괴롭혔다. 이때 세잔이 나타나 구해줬고 그 둘의 우정은 시작됐다. 졸라는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도 연거푸 낙방했다. 대학을 결국 포기했고
투박한 남프랑스 사투리에 겁 많고 소심했던 폴 세잔(Paul Cézanne). 놀랍게도 큐비즘(입체파)의 거장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됐다. 이런 세잔의 그림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예쁜 사과였다. 왜 그랬을까. 세잔에게 사과는 우정과 아량, 인간애의 징표였다. '사과바구니'와 '7개 사과의 정물'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세잔의 사과가 이처럼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다. 19세기 중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의 부르봉(Bourbon) 중학교. “파리에서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그 학생은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이를 본 한 학생이 그 전학생을 도와줬다. 그 전학생은 어느 날 사과바구니를 들고 찾아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바구니를 선물 받은 학생은 그 후로 계속 사과가 있는 정물만 그렸다.” 사과를 준 학생은 훗날 프랑스 대문호가 된 에밀 졸라(Emile Zola)이고 사과를 받은 학생은 세잔이다. 이 둘이 주고받은 학창시절의 우정. 이 추억이 세잔 그림의 주요 모티브였다. 세잔하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생트-빅트아르(Sainte-Victoire) 산이다. 이 산은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대장주다. 하늘까지
레퀴엠(Requiem).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이다. 그래서일까. 무섭고 장중하고 근엄하다. 하지만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의 레퀴엠은 전혀 다르다. 지옥불처럼 요동을 치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아주 상냥하고 평화롭다. 죽음은 결코 황망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 이것이 포레의 철학이다. 그의 파반느(Pavane) 역시 너무도 아름답다. 피아노 선율과 트럼펫 소리는 우리의 심연을 오묘하게 파고들어 흔든다. 독일풍이 아닌 프랑스풍을 구가했던 포레. 키는 작았지만 뚝심의 사나이였다. 그의 고집은 프랑스 음악을 바그너 음악으로부터 탈피시켰다. 그가 격찬 받는 이유 중 하나다. 포레는 베를리오즈 시대가 가고 드뷔시의 시대가 오기 전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가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은 건 아니다.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유명하게 되자 비평가들은 흔들어댔다. 그러나 포레를 괴롭힌 건 혹평이 아니라 신체적 장애였다. 귀머거리 작곡가하면 베토벤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포레 역시 그러했다. 선율을 들을 수 없다면 작곡가의 인생은 끝난 게 아닌가. 하지만 역경 속에서 더 찬란했던 사람들이 있다. 포레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청각을 잃으면서부터
콩브레(Combray) 역에 도착한 꼬마 푸르스트. 마중 나온 고모 부부를 따라 꽃향기 그윽한 산사나무와 오래된 장미나무가 찬란한 예쁜 정원의 오베핀(Aubépines)호텔로 갔다. 목가적인 전원 속에서 꼬마 푸르스트는 하룻밤을 자고 조개 모양의 마들렌느 빵을 먹었다. 거장 마르셀 푸르스트의 유년의 추억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한 콩브레 마을. 파리 남서쪽 90킬로 지점에 있는 외르-에-르아르(Eure-et-Loir) 지방의 일리에(Illiers) 시가 모태다. 이곳은 푸르스트의 보물 창고이자 뮤즈였다. 푸르스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간의 소실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시간 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이 해답을 찾고자 그는 시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은 곳은 일리에. 그리곤 1913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1권을 발행했다. 그의 처녀작이었다. 푸르스트는 이 책으로 프랑스의 셰익스피어란 찬사를 받았고, 스탕달에 버금가는 스타로 등극했다. 한 오스트리아 공작부인은 푸르스트에게 결혼을 신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푸르스트는 독신으로 지냈고 스스로를 벼룩으로 자신의 저술을 소화 불가능한 누가(nougat)
2022년 1월 10일 15시. 파리 8구 마들렌느 대성당. 프랑스 전 장관 뤽 페리(Luc Ferry), 작가 라파엘 앙토방(Raphaël Enthoven), 방송인 시릴 아누나(Cyril Hanouna) 등 프랑스의 유명인들과 유고슬라비아 엘렌느 공주 부부 등 해외인사, 그리고 익명의 프랑스인 1000여 명이 모였다. 보그다노프(Bogdanoff) 형제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방송인 보그다노프 이고르(Igor)와 보그다노프 그리슈카(Grichka). 이들은 일란성쌍둥이다. 바늘과 실처럼 항상 붙어 다녔던 그들. 영혼의 반쪽이었을까. 그리슈카가 코로나 19로 세상을 떠나자 이고르도 6일 만에 같은 길을 걸었다. 데칼코마니를 보는 듯한 그들의 형상. 할리우드 배우 뺨치게 핸섬했었다. 그런 그들이 우주복을 입고 나타나 미래로 시간여행을 하고 천체의 신비와 빅뱅, 외계인 등을 '땅 익스(Temps X)'에서 거침없이 보여주면 시청자들은 홀딱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인기는 이 프로를 10년간 장수케 했다. 그 덕에 과학과 공상과학(Science fiction)이라는 딱딱한 주제가 대중과 아주 친밀해졌다. 물론 이고르와 그리슈카는
상반신의 여인 모나리자. 그녀의 살짝 머금은 미소는 백만 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그 미소를 찾아 파리 루브르 박물관으로 모여드는 세계인은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다. 500살이 넘는 그녀. 하지만 여전히 젊고 찬란하다. 이 신비의 여인을 탄생시킨 장본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éonard De Vinci). 다 빈치는 프랑세스코 델 지오콩도(Francesco del Giocondo)의 부인 플로랑틴 리자 게라르디니(Florentine Lisa Gherardini)를 보고 이 유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불어 이름은 모나리자가 아니고 조콩드(Joconde)다. 이 조콩드를 프랑수아 1세는 매우 사랑했다. 예술의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스카우트된 다빈치.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 뚜렌느(Touraine)로 왔다. 그는 여기서 말년을 보내며 왕의 수석 화가이자 기술자·건축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의 직업은 이 밖에도 과학자, 발명가, 해부학자, 조각가, 도시계획가, 식물학자, 음악가, 시인, 철학자, 작가 등 어마어마하다. 인간이라기보다 신에 가까웠던 다 빈치. 그의 수많은 예술작품과 발명품은 혁명 그 자체였다. 그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는 물론 지금까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마치 꽃들이 동 트는 새벽의 입맞춤에 피어나듯! 하지만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여, 더 잘 내 눈물을 말리기 위해, 그대 음성을 더 들려주세요! 영원히 데릴라의 곁으로 돌아온다고 말해 주세요! 너무도 애절한 아리아다. 용맹한 이스라엘 장군 삼손. 그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필리시테인 여인 델릴라. 백성을 배반하고 한 여인을 택하는 나약한 남자의 비극.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는 이 이야기를 '삼손과 델릴라(Samson et Dalila)'에 담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오페라곡은 탄생 당시 공연 금지명령을 받았다. 성경과 달리 묘사된 삼손이 프랑스 교회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결국 국경을 건너 독일로 갔다. 리스트는 생상스를 도와 바이마르 대공 오페라하우스에서 삼손과 델릴라를 연주하게 해 줬다. 고진감래라던가.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관객들의 찬란한 박수가 쏟아졌다. '동물의 사육제'로 더 유명한 생상스. 그는 파리 자르디네(Jardinet) 3번지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작곡을 시작했고, 열 살 때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가 됐다. 천재란 말을 다시 한번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상스의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