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의 산책’이란 강의를 듣고자 길을 나섰다. Y마트라는 식료품 판매장 앞을 지나가는데 그 마트에 납품할 식재료를 싣고 온 청년기사가 손수레를 끌고 가면서 휘파람을 불고 있다. ‘이 시국에 휘파람 불며 일한다!’ 갑자기 젊은이의 인상이 좋아 보였다. 계절은 봄이라지만,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휘파람 불며 봄을 맞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에게도 젊은이처럼 휘파람 불며 일할 때가 있었던가! 과거를 생각하는 길목에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어금니가 시리다. 그동안 긍정의 힘으로 나를 끌고 가고자 노력했다지만 휘파람 불며 신명 나게 일을 해본 기억이 별로다. 그런데 고향에서 부모님이 농사지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이 생각났다. 그때 버들피리를 꺾어 불었고 풀 뜯는 소 등을 타고 아버지를 보며 웃었던 기억이 가슴속을 환하게 했다. ‘아버지 쟁기질 하고/ 어머니는 밭둑을 오선지 삼아/ 음표 찢듯 씨앗을 묻고/ 형은 두엄 뿌리고/ 나는 고무래로 흙덮기 하던 땅‘ 이란 시도 그 시절 선물이다. 젊은이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가던 길 가는데, ‘휘파람을 불며 가자 언덕을 넘어/ 송아지가 엄마 찾는 고개를 넘어/ 아가씨 그네 뛰는 정자나무 지나서/ 휘파람을 불며가자 어
얼마 전 은행을 방문했다. 최근에는 창구에서 필요한 은행업무를 보더라도 해당 은행의 앱을 함께 써야 하는 경우가 있다. 디지털기기에 잘 적응하는 것이 시대적 숙명이다. 하지만 50대인 나도 단말기 화면을 꼼꼼히 읽어가며 업무를 처리하기가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어르신들께서 참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얼마 전 한 노인이 예약 없이 미용실을 방문했다가 연이어 거절당한 사연이 전해졌다. 온라인으로 하는 예약이 어려운 탓이다. 이뿐인가!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기 위한 키오스크 사용법은 낯설고 어렵다. 비행기나 기차표 발권, 비대면 금융거래, 병원 예약 등 온통 온라인 세상인데 노인들의 경우 앱이나 디지털기기를 이용하기도 어렵고 혹 실수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23 노인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노인 중 전자상거래가 가능한 비율은 12.0%, 금융거래가 가능한 비율은 20.2%, 키오스크 활용이 가능한 비율은 17.9%였다. 특히, 75세 이상 노인들은 키오스크 활용률이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한, 지난해 서울디지털재단이 공개한 ‘2023년 서울시민 디지털역량실태
밭에는 봄이 온다. 봄풀이 돋아난다. 이맘때쯤 농부는 한해 작부 계획을 세운다. 이 밭에는 뭘 심고, 이 밭에는 뭐와 뭐를 같이 심고. 밭에서 자라는 풀들은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서로를 이겨내려는 싸움을 하기도 한다. 풀의 다양한 성질을 잘 알면 아는 만큼 밭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나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의 농부는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아는 수준이다. 흔히 ‘잡초’라 불리는 풀도 그 성질을 알면 ‘작물’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잡초’가 ‘작물’이 되기도 한다. 같은 풀도 내가 모르고 안 기르면 ‘잡초’고, 내가 알고 기르면 ‘작물’이 되니, 순전히 인간 중심적 작명이다. 그 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약이 되어줄 풀의 입장에서 보면 ‘잡초’라고 눙 쳐버리는 인간이 가엽고 멍청하게 보일 것도 같다.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지 않고 ‘너희들은 잡것이야’라고 건방 떠는 인간이 방자하게 보일 것도 같다. 이런 생각을 하기에 나는 이름 모르는 풀을 ‘잡초’라 하지 않고, ‘들풀’이라 부른다. 마치 학생 이름을 외우지 못한 교사가 그 학생을 ‘어이, 잡놈’이라 부르지 않고, ‘거기, 학생
탄핵 선고를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나 헌법재판관들 등 헌법기관을 향한 비방과 중상이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심각해지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 구성원들이나 헌법재판관들이 중국인이거나 중국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주장에는 헌법기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독일 형법의 입법자가 정치인에 대한 명예훼손을 가중처벌하도록 규정한 동기가 이해가 간다(StGB §188). 나치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적 기관과 공적 인물들에 대한 “공격”(Der Angriff)을 서슴지 않으면서 무서운 기세로 급성장하는 것을 방치했던 역사에 대한 후회와 반성의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입법은 공적 존재자들에 대한 공격적 표현을 특별히 가중해서 제재하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수정헌법 제1조에 대한 해석론은 정반대의 생각을 실현해 왔다. 워렌 코트(Warren Court)는 뉴욕타임스 대 설리반(Newyork Times v. Sullivan) 사건 판결을 선고하면서, 공직자에 대한 명예훼손은 원고의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가 증명되어야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비상계엄 선포(쿠데타) 이후 102일이 지났다. 헌재의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대한민국호가 폭풍우에 갇혔다.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탄핵찬반 군중들의 함성 속에 전국이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다. 문제는 에너지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이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돌아봄, 스스로 객관화하는 과정이 없다면 자칫 우리 공동체는 그릇된 확신 속에 파괴되고 말 것이다. 과연 대한민국은 무사할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이재명 과 민주당을 악마로 규정하는데서 출발했다. 그 악마가 총선에 압도적으로 이겼으니 부정선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자칫 악마가 정권을 잡는다면 나라가 망할 것이 뻔하니 군대를 끌여들여서라도 모조리 처단해야 했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윤석열 대통령의 인식이 그대로 극우세력에게 이식되고 증폭되었다는 점이다. 편향되고 맹목적인 확신은 무섭다. 서부지법이 초토화되었다. 헌재도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 아니, 지금 가장 위태로운 사람은 이재명 대표가 아닐까? 벌써 한차례 칼에 테러를 당한 이재명 대표가 아닌가? 공격깊이를 감안하면 생존자체가 기적이라 할만치 심각한 테러였다. (헌정사상 처음인 야당대표
우려한 사태가 발생했다. 헌정질서를 파괴한 내란죄로 구속된 윤석열 대통령이 52일 만에 석방되었다. 판사는 윤의 구속 시간이 초과하였다며 구속취소를 결정했고, 대한민국의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석방하였다. 검찰총장은 7일 이내에 항고해서 다시 한번 상급 법원의 판결을 기다릴 수 있었음에도 적법절차와 인권보장을 들어 석방지휘를 강행했다. 도대체 지금까지 범죄자들의 구속 기한을 산정할 때 날짜 기준으로 하다가 갑자기 윤석열에게만 시간을 기준으로 적용한 것은 무슨 연고인가. 일부 언론에서는 잘못된 관행을 깨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왜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앞으로 기존에 잡아들였던 모든 범죄자가 날짜가 아닌 시간 기준으로 해서 구속해야 한다면서 재심 신청하면 모두 석방할 것인가. 교도소마다 대혼란을 초래될 전조를 보이자 대검은 서둘러 앞으로는 날짜를 기준으로만 삼으라고 검사들에 지시했다. 결국 한 사람만을 위한 법적용이었다. 판검사들은 도대체 왜 여론과 이렇게 동떨어진 판결을 내린 것일까. 그들 모두 배울 만큼 배웠고 아니 최고의 엘리트들인데 왜 국민의 상식과 이렇게 다른 것일까. 영화의 대사처럼 “어차피 국민은 개돼지야. 금방 잊게 되어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긴 대표적인 독재자가 히틀러였다. 그는 국민을 무지한 존재로 여겼다. 조종 가능하다고 했다. 또 쉽게 망각하는 존재였다. 반복적이고 간결한 메시지로 선전(프로파간다)하면 조작이 극대화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인간의 존엄성은 안중에 없었다. 사회분열은 관심 밖이었다. 우리 역사에 갑자사화가 있다. 1504년, 연산군 10년이었다.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폐출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찬성했던 사람들에 대한 처벌과 복수가 이 사화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폐비 윤씨가 사사된 사건은 22년이 지난 일로 사화의 직접 원인이 아니었다. 근저에는 자신의 절대왕정 구축에 걸림돌이었던 사간헌과 사헌부 등 감찰기관을 무력화하고 깐깐한 비판 세력이었던 선비들을 제거하려는 의도였다. 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인 지난해 12월 5일 조선일보 주필은 ‘정말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는 제목의 칼럼으로 윤 대통령의 실상을 압축해 고발했다. “스스로 자폭했다”. “이성적이지 않고 극히 감정적이다”. “사려깊지 않고 충동적이다”. “남을 존중하지 않는다” 등 대통령의 자격 상실을 요건을 적나라하게 열거했다. 민주당의 몇 개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끝내라고 우크라이나를 압박한다. 우크라이나는 아쉬워도 끝낼 수 밖에 없다. 우크라이나가 열세에 있는 사이 러시아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려 필사적이다. 막판 최전방에 북한군을 세웠다. 수천명이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통계가 나왔다. 전우의 시체를 넘으며 싸우는 기술은 날로 늘어 전투력이 높아졌다는 소식이다. 국가는 병사를 전장에 내몰면서 참전 사실마저 부인한다. 그러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포로를 감출 수 없다. 처음 붕대를 감은 북한 군인을 뉴스로 보았을 때 가짜라 생각했다. 북한군인 참전은 사실로 나타났다. 휴전 협상에서 포로는 가장 큰 이슈가 된다. 이슈가 되는 북한군 포로를 놓고 벌써부터 신경전이다. 국가가 참전을 부인하니, 병사에게 국가는 없다. 그렇다고 러시아 군인도 아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병사는 한국을 희망한다. 이들을 국내로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병사는 한국으로 올 수 있을까. 참전을 부인하는 국가는 포로를 송환할 생각은 있는가. 존재조차 인정되지 않는 병사에게 어떤 선택이 있을까. 그들은 귀향할 수 있을까. 병사의…
새로운 기술로 등장한 인공지능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우리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기계의 행동은 실제 우리의 행동과 비교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용어가 세상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5년 전의 일이다. 1950년 수학자 앨런 튜링은 ‘컴퓨팅 기계와 지능’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기계에 지능을 부여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이게 바로 ‘튜링 테스트’ 개념이다. 그는 기계가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완벽하게 파악했다. 즉, 어떤 사람이 인간과 대화 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계와 대화 하고 있는지 구별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이즈음 워렌 위버는 기계가 자동으로 텍스트를 번역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냄으로써 인공지능에 의한 번역의 역사를 예고했다. 그로부터 단 5년 만인 1956년, 인공지능은 전 세계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미국의 명문 대학들은 앞 다퉈 인공지능 연구에 들어갔다. 기술 혁명은 점점 더 가속화됐고 많은 전문가는 인공지능이 2000년대에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혁명이 그리
보험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1%는 가족 간병에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가장 선호하는 간병 형태로 ‘재가서비스’를 선택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3년 노인 실태 조사’에서는 건강을 유지하면서 현재 거주지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하는 노인이 87%를 상회하였다. 내년 3월부터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돌봄통합지원법)이 시행됨에 따라 지역사회에 적합한 돌봄·의료 서비스 모델 및 보건의료와 연계한 통합 돌봄 거버넌스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전반적인 의료·돌봄·복지 수요를 바탕으로 재택의료센터를 확산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의료·요양·돌봄 서비스를 체계적이며 통합적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초고령사회 대응 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정부는 요양시설에 입소하지 않고도 내 집에서 필요한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하고 장기요양 공급 체계 전반에 대한 개편과 제도적 개선을 병행해 가기로 했다. 전국적으로 95곳에 불과한 재택의료센터를 2027년까지 250곳으로 확대함으로써 노인들이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진료받을 수 있도록 돕는 ‘재택의료’를 강화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