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생각나서 웃네 /이종문 그때 생각나서 웃네, 그녀를 괴롭히는 그 자식이 빠지라고 물웅덩이 메운 뒤에 그 위에 마른 흙들을 덮어뒀던 그때 생각 그때 생각나서 웃네, 그 자식은 안 빠지고 어머야 난데없이 그녀가 풍덩 빠져 엉망이 되어버렸던 열두어 살 그때 생각 그때 생각나서 웃네, 어떤 놈이 그랬냐며 호랑이 담임 쌤의 불호령에 자수했다, 열흘간 변소 청소를 도맡았던 그때 생각 그때 생각나서 웃네, 혼자 남아 청소할 때 그녀가 양동이에다 물을 떠다 날라주어, 세상에 변소 청소가 그리 좋던 그때 생각 ■ 이종문 1955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저녁밥 찾는 소리』 『봄날도 환한 봄날』 『정말 꿈틀, 하지 뭐니』 『묵 값은 내가 낼게』 『아버지가 서 계시네』 『그때 생각나서 웃네』으로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했다.
자작나무 숲 /박찬선 마음이 자작자작 여며지거든 자작나무 숲으로 가요. 다 재워버리고 하얀 몸으로 바꾼 자작나무 숲으로 가요. 초록빛 이파리 같은 초록빛 옷을 입고 자작나무 숲으로 가요. 팔 벌여 서 있는 나무들 사이에 서면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요. 하늘 높이 치솟는 나무가 되어요. 서로 기대어서 이뤄진 움막에는 전설 같은 옛 이야기가 솟아나요. 어디선가 흰 엽서를 보낸 사람이 올 것 같은 하얀 숲의 궁전 나무들이 흔들리며 노래 불러요. 우리 생각이 넘치는 유월에는 자작나무 숲으로 가요. 숲에 사는 새들의 꿈을 꾸어요. ■ 박찬선 1940년 경북 상주 출생. 197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시집으로 『돌담 쌓기』 『상주』 『세상이 날 옷을 먹게 한다』 『도남 가는 길』 『우리도 사람입니다』와 평론집 『환상의 현실적 탐구』시극 『때가 되면 다 된다』 설화집 『상주이야기』 1-2외. 흙의 문학상을 남겼다. 경상북도 문화상(문학) 제1회 상주시문화상. 대한민국향토문학상. 이은상문학상. 펜경북문학상을 수상했다.한국문인협회경북지회장, 국제펜클럽경북지역위원회장, 한국문인협회부이사장 역임했고 한국시인협회원이다.
눈발 전단 /김연대 누구의 맨손인 듯 누구의 맨발인 듯 어느 시절의 그리운 얼굴인 듯 눈발이 흩날린다 아득한 높이에서 뿌리는 전단 찢어진 흰 옷자락의 이름 없이 부서진 뼈의 흩날림 성이 없이 산화한 피의 점적 억울한 눈물의 투신 백의고혼白衣孤魂 비애로 얼룩진 백년사초百年史草 광장은 읽지 않고 굽 높은 구두는 외면하고 번쩍이는 차들이 흙탕물을 씌우며 짓이기고 간다 ■ 김연대 1941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89년 《예술세계》 시로 등단했다. 시집은 「꿈의 가출」, 「꿈의 해후」, 「꿈의 회향」, 「아지랑이 만지장서」, 「나귀일기」 등이고, 아시아 시인·작가협의회 시예술상, 녹야원문학상, 이상화시인상을 수상했다.
소금 꽃 /노재연 염전은 말이 없다, 품은 것을 토해낼 뿐 가슴을 비움으로 채워지는 흰 꽃송이 얼마나 상실의 날을 피 말리며 견뎠으랴 햇빛이 키워낸다, 암석 같은 물의 골격 여윈 몸 육탈시켜 하얀 사리 피워낸다, 내게는 해탈의 현세(現世)가 사막처럼 낯설건만 이승의 현관에서 시대가 타락하고 흰피톨 제 몸 던져 부패에 저항한다 영롱한 보석 한줌이 영혼까지 맑게 하리 ■ 노재연 1941년 전주출생으로 수성고등학교장을 역임했고, (사)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인협회 회원이다.시조집은 <달빛 세레나데>, <알타이어의 미학>이 있고, 한국시조협회 시조문학상 대상, 홍재문학상, 수원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표류도 /송소영 정처 없이 떠돌던 섬 하나 내게로 와서 모래톱이 되었다 하루 종일 파도가 몰려왔다 몰려가며 더욱 더 단단해지곤 하는데 단단한 모래땅 밑으로 가끔씩 지열이 끓는 줄도 모르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듯 숨구멍조차 막혀갔다 드디어 멱차오른 마그마는 의식도 못한 채 분출되어 한순간에 모래톱을 뻥 뚫어버렸다 다시 표류하는 섬 하나 내 가슴에 가시처럼 걸렸다 ■ 송소영 1955년 대전 출생, 2009년 《문학·선》 신인상으로 등단해 백봉문학상, 수원문학인상을 수상했고, 시집 『사랑의 존재』를 출간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수원영화인협회 부회장을 지내고 있다.
헤어지자 /구명숙 파도는 나를 유혹한다 내 맘 안다고 다 이해한다고 숨차게 달려오고 또 달려온다 칼날도 없이 철석철석 인연의 질긴 줄을 끊고 핑계도 흔적도 없이 다시 물이 되어 살리라 ■ 구명숙 1950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시문학』, 『시와시학』 시인으로 등단해 만해 ‘님’ 시인상, 시와시학 우수작품상 수상했으며,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로 있다. 시집 『그 여자 몇 가마의 쌀 씻어 밥을 지어왔을까』, 『걷다』, 『산다는 일은』, 『하늘 나무』, 『꽃들의 화장법』, 『너, 피에타』, 『뭉클』 등이 있다.
검은 등 뻐꾸기 /문용희 수백 년 된 팽나무 숲속 병영성을 울려오는 새의 노랫소리 홀딱버꼬~ 세상의 어두운 가면과 내 마음의 무거운 짐 다 벗고 싶네 세상 끝 날 주 앞에 설 때 내 모든 것 다 드러나면 검은 등 뻐꾸기의 노래처럼 모든 것 홀딱 벗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을지 ■ 문용희 1955년 전남 완도 출생으로 한울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옴. 완도군청에서 공직생활을 했으며, 한울문학상을 수상했다. 전남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완도문인협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연필이 지우개에게 /신진호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는군 뽀오얀 피부빛이 눈길을 끌었지 네모이면서 묘한 말랑말랑함도 매력이었어 더구나 그 특유의 풋풋한 향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지 널 만난 뒤로 좋지 않은 기억은 저장되지 않았어 온전한 것만 남도록 네 몸을 문질러 내 잘못을 지워버렸거든 때론 연필깎이 몸단장에 새신랑 같다며 환히 반겨주곤 했지 세월이 강물처럼 느껴지는 날 우리 둘 모두 점점 작아지는 서로의 모습에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길 바래 조금씩 닳아져 간다는 것 너와 나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잘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잖나 이 친구야 ■ 신진호 1964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졸업. ≪대한문학≫으로 〈억새〉 초회 추천(2017. 가을호), 〈젓가락이 숟가락에게〉 추천완료(2017. 겨울호). 시집: 《젓가락이 숟가락에게》 대한문학작가회, 지송문학회 회원.
걷는다 /박영식 다리 힘 남았을 때 더 많이 걷고 싶다 가능한 씩씩하게 뱃살도 줄이면서 다시는 못 일어날 때 미련 후회 없게끔 어설픈 직립으로 첫 발을 뗐던 그날 어머닌 손뼉 치고 기쁨도 크셨겠지 가다가 넘어졌을 땐 일어나라 하셨을 요즘에 차 없다고 빈정대는 이 있지만 부르면 냅다 오는 친절한 콜 있겠다 걱정도 팔자라더니 공염불을 하시나 걸으면 작은 것도 잘 보여 참 정겹다 어깨 툭 치는 순간 돌아보면 어 친구야 반갑다 낮술도 한잔 못할 것도 없잖니 ■ 박영식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조문학》 2회 추천 완료, 김상옥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한국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외 다수 수상. 저서로는 『백자를 곁에 두고』, 『굽다리접시』, 『자전거를 타고서』, 『가난 속의 맑은 서정』, 외 다수가 있고,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울산시조시인협회 회장 역임. 서재 「푸른문학공간」
공존의 힘 /손증호 사람들 티격태격 편 나눠 다퉈도 우리네 사는 행성 어둡지만 않은 까닭 티베트 수행자들이 하늘지붕 닦은 덕분 대지와 하나 되어 온몸으로 읽은 경전 그 맑은 기운이 탁한 숨길 겹게 틔워 세상은 삐거덕대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지. ■ 손증호 1956년 경북 청송 출생, 2002년 《시조문학》 신인상, 부산시조작품상, 전영택 문학상 등 수상. 시조집 『침 발라 쓰는 시』 『불쑥』 현대시조 100인 선집 『달빛의자』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