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기본을 다시 보자” 지난 8월 수원문화재단의 새 수장이 된 김현광 대표이사. 그는 출입 기자들과 가진 취임 인터뷰에서 재단이 10년간 축적한 문화적 역량들을 가지고 기초부터 다시 섬세하게 다져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재단이 그동안 여러 가지 성과를 이뤘지만 동시에 부족한 면도 있을 것”이라며, “그런 부분을 되돌아보고, 시민·지역예술가들과 더 친밀하게 소통하며 우리의 역할을 어떻게 정립해 나갈 건지 그런 기본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미래로 나아갈 때 중요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설립 10주년, 법정 문화도시 지정, 대면 행사로 돌아온 ‘힐링폴링 수원화성’ 개최 등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는 수원문화재단. 김 대표에게는 취임과 동시에 재단의 굵직한 사업들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김 대표는 “제8대 대표이사로 취임해 큰 영광이면서도 동시에 책임과 부담도 크다”며 “제 경영철학인 ‘시민중심’, ‘소통확산’, ‘변화와 혁신’을 직원들과 공유하고 재단의 미래 10년을 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함께 고민하고 소통하면서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고 취임 소감을 전했다. 지나온 10년을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황해도 연백에 살던 유승분 인천시의원(57·국힘·연수3)의 부모님은 전쟁을 피해 인천 동구 화수동에 자리를 잡았다. 피란민의 삶이 그렇듯 넉넉치 않은 형편이었지만, 1남 6녀의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1964년 집안의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60년대 말 철거민 이주정책으로 지금의 미추홀구 신기시장 일대인 신기촌으로 이사했다. 그의 유년기 추억도 이곳에 모두 깃들었다. 인천에서 태어나 문학초, 박문여중, 인일여고. 인하대를 졸업한 그는 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출판사를 나온 뒤로는 평생교육 강단에서 독서와 글쓰기 교육을 했다. 1999년엔 연수구에서 글쓰기 연구회를 조직해 독서 문화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함께 하던 후배들과 독서문화연구회 '입싹'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대중문화 운동으로 영역을 넓혔다. 이후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 사무처장을, 인천YWCA 부회장을 지낸 그는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4년간 하던 지속협을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를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유 의원은 이번 지방선거 경선에서 지인을 돕다 우연히 민현주 연수을 당협위원장을 만났다. 민 위원장이 먼저 출마 제안했고, 그도 제도권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
지난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1기신도시 5개 시장들과 국토부 장관과 간담회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재정비특별법 발의를 내년 3월로 앞당기기로 했다. 실무협의체에 시가 참여하는 방안도 합의했다. 하지만 하은호 시장은 만족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지난 정부에서 공급에 급급해 산본을 일자리가 없는 잠만 자는 도시로 만들었다. 용적률도 높아서 재건축도 어렵게 해놨다. 1기신도시특별법의 조속한 발의도 문제지만 그 속에 우리 군포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날 하은호 시장은 원희룡 장관에게 1기신도시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과 용적률 완화, 정비계획·수립 인가 권한의 위임 등을 요구했다. 특히 산본신도시의 문제가 20평 이하 소형 주택이 많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영구임대가 많은 특별한 사정을 강조하고 주차공간과 녹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강조했다. 기존도시에 대한 배려도 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희룡 장관은 ‘차관급으로 격상된 민관합동 전담팀에 지자체를 포함시키고 사업 추진에 속도를 내겠다’고 말했으며, 정부는 정비기본 방침을 맡고 지자체는 ‘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하는 등 ‘이원화’로 속도를 내 2023년 3월 중 특별법을 발의 하기로 했다. -국토부장관에게 1
인싸(주류) 친구들을 동경하던 아싸(비주류) 소년은 15년 뒤 대선과 지방선거 무대에서 누구보다 활발한 선거운동을 벌인다. 9대 인천시의회에 가장 젊은 나이로 합류한 더불어민주당 김대영(31‧비례) 의원이다. 그는 10년, 20년을 내다보며 인천의 정치인싸를 꿈꾸고 있다. 김 의원은 1992년 인천 서구 가좌동에서 태어나 줄곧 인천에서 살았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동구 송림동과 창영동, 미추홀구 용현동과 학익동 등 원도심에서만 여러 차례 이사 다녔다. 학교도 인천의 동명초‧신흥중‧인하부고를 나왔다. 대학은 부천대 사회복지과를 나왔는데, 그때도 인천을 벗어나진 않았다. 그의 학창시절은 열등감이 지배했다. 중학교 땐 4점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성적도 별로였고, 축구 같은 운동에도 소질이 없었다. 컴퓨터게임도 흥미가 없어 어울릴 거리가 부족해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가 달라진 건 고등학교 무렵이다. 소위 인싸 친구들의 유쾌한 모습을 동경하면서 소심한 자신을 바꾸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김대영 의원은 “잘하는 게 없던 나는 학창시절 열등감이 많았다”며 “열등감이 다행히 무력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돌아보면 열등감과 결핍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었다”고 말했다. 결
경기도(이하 도) 문화예술, 체육, 관광계 종사자들이 바라고 오랫동안 외쳤던 ‘문화체육관광 예산 3%’는 내년에도 이루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올해 세수가 줄고, 경제 위기 상황이 찾아오면서 심지어 더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관련 기사: '전국 꼴찌' 경기도 문화체육관광 예산…내년엔 더 줄어들 듯)도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부위원장인 황대호 의원(민주·수원3)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다음은 1문 1답. ◇ 도 문화체육관광 예산 현 수준은. = 2022년 도 문화체육관광국 예산은 경기도 전체 예산 대비 1.76%다. 도민 1인당 예산으로 하면 3만 9714원으로, 전국 17개 광역시도 중 최하위 수준이다. 문화체육관광국에 귀속되지 않은, 타 부서에 흩어진 관련 예산을 모두 모아도 전체 예산 대비 2.07%에 불과하다. ◇ 도 문화체육관광 분야 예산 3% 확보는 오래전부터 요구된 문제인데, 안 바뀌는 원인은 뭘까. = 아직도 문화, 체육, 관광이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조정이 가능한 여가라고 보는 시각이 크다고 본다.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한 내 삶의 필수 복지다. 그동안 도지사들이 공약만 지켰어도 예산 3% 시대는 이미 왔을 것이다. ◇ 예산이 적
“디지털 성범죄, 아동 학대, 아동 돌봄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 가족 분야 현안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이런 현안들에 대응하고, 도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 연구와 사업으로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005년 경기도가족여성개발원으로 개원한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이하 재단). 2008년부터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으로서 여성·가족 정책을 꾸준히 개발해 왔고, 2020년 12월에는 재단으로 발돋움했다. 이로써 경기도의 여성과 가족정책연구를 기반으로 한 정책 사업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관이 된 것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2019년 취임한 정정옥 대표이사가 있었다. 어느덧 취임한 지 3년. 정정옥 경기도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는 취임과 동시에 재단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제가 취임했을 때 ‘경기도 가족여성연구원은,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은 대체 뭐하는 데인가요?’라는 질문을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 기관이 어떤 곳인지 정체성과 해야 할 일을 정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 묻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정정옥 대표이사의 이같은 대화 노력은 그저 기관 내부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도내에 있는 ‘가
“미추홀구는 고도제한으로 인해 개발도 쉽지 않고 주민들이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규제완화와 원도심 발전이 이번 임기 목표.” 이봉락(국힘·미추홀3) 제1부의장은 1970년 인천에 터를 잡았다. 대구 남산초등학교, 청구중학교, 영남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집안 사업이 실패해 야반도주하다시피 인천으로 올라왔다. 인천에 오기 전 그의 집은 집이 꽤 잘 살았다. 당시만 해도 이 부의장은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집안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지자 좌절감이 크게 들었다. 그는 그 당시 송도 앞바다 홍륜사에 가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인천을 선택한 이유는 옹진군에 사는 친척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군생활을 마친 뒤 인천공업전문학교(현 인천대학교)에 다녔다. 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도 여러개 땄다. 롯데제과 기술부에서 근무하면서 집안형편이 차츰 좋아졌다. 그 후 일을 그만두고 신라제과점을 운영했는데 수완이 좋아 본점이 3개까지 늘어났다. 그의 아내는 신포동 고려삼계탕을 운영했다. 그러다 이 부의장은 제과점이나 음식점이 아닌 사회생활이 하고 싶었다. 그가 생각한 사회생활은 정치였다. 1986년 민주정의당 용현
주광덕 남양주시장은 18대,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지난 6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53.44%(15만8315표)의 득표율로 더불어민주당 최민희 후보를 누르고 제9대 남양주시장에 당선됐다. - 남양주는 고향이자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무대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시장이 되셨습니다. 시장에 도전할 계획이 있었습니까 = 사실 이전부터 거취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이 있었으나, 고향인 남양주의 슈퍼성장을 위해 민선 8기 시장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시민들과도 약속을 했었습니다. 힘든 과정을 거쳐 남양주시장이 돼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합니다. 남양주 발전과 시민 행복 지수를 최고로 높이기 위해 시장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74만 시민의 지엄한 명령으로 주어진 4년이라는 소중한 시간 동안 초지일관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입니다. 지금이 남양주가 불균형적 성장과 불합리한 규제 등에서 벗어나 자족 기능을 두루 갖춘 인구 100만 메가시티로 도약할 수 있는 골든타임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행정 혁신을 추진하면서 남양주에 꼭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 나가겠습니다. 부자도시 남양주, 대한민국 중심도시 남양주를…
인천 부개초등학교·부평서여자중학교·부평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인천 토박이다. 부평의 딸이라고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지금껏 부평구를 떠나본 적이 없다. 전라도 출신인 아버지와 서울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인천이 고향인 이유는 아버지가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군인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에게 최고의 자랑이자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 이후 집안 형편은 끝도 없이 어려워져야 했다. 어느 날은 쌀이 떨어져 밥을 먹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긍정적이었고 아버지는 매일 자식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모님의 긍정적인 성격은 자식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돼 힘들어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도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어린이집 교사와 방문 지도 교사를 하며 교육 쪽에서 일했던 것은 마찬가지로 방문 지도 교사를 했던 어머니 덕분이었다. 정치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어릴 적부터 자식들에게 정치의 중요성을 마르고 닳도록 얘기했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주요했다. 구의원 후보 시절 오랜 지병으로 병상에…
백경현 구리시장은 국민의힘 소속으로 지난 6월 민선 8기 지방선거에서 54.9%의 득표율로 더불어민주당 안승남 후보를 누르고 제17대 구리시장으로 당선됐다. 6기 시장 역임한 이후 4년 만의 컴백이다. - 지난 4년 동안 구리시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재기의 의지를 다지셨다고 하셨던데요. 다시 컴백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2018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후 무척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절치부심 매일 구리시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걸으며 시민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시민들이 제게 준 별명이 ‘구리아재’입니다.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제게는 아주 영광스러운 별명입니다. 당시 시민들로부터 질타의 말도 들었고, 희망의 메시지도 주고받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매일 시민과 만나서 들은 이야기, 제게 던져준 생활의 아이디어와 정책 제안들을 모아 5대 정책 10대 분야 100가지 공약을 만들게 되었고, 그런 진심이 전달되어 다시 일할 기회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 구리시민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반드시 더 행복한 구리시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 민선8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