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성 위해시에 사는 김일제의 후손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성씨와 가문의 계보에 대해 연구하는 보학(譜學)을 전근대적인 학문으로 격하시켰다. 그 결과 보학은 역사연구 대상에서 완전히 쫓겨나 소수 문중학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임금부터 시골유생에 이르기까지 보학을 모르면 이른바 양반행세를 할 수 없었던 조선에 비교하면 보학이야말로 일제 때 가장 강력하게 탄압받은 학문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중화사상이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는 중국은 보학연구가 대단히 활발하다. 중국의 성씨 중에 총씨(叢氏)가 있는데, 이들을 연구하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은 씨(氏)보다 성(姓)이란 표현을 더 많이 쓰는데, 총성(叢姓)의 시조를 흉노왕족 김일제(金日磾)로 모시기 때문이다. 총성은 중국 북방에 주로 거주하는데 그 숫자는 약 41만여 명으로 중국에서 233번째로 많은 성씨다. 중국의 성씨 연구자들에 따르면 총성의 연원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데 가장 빠른 것은 이기씨(伊耆氏)의 후예라는 것이다. 《국명기(國名紀)》나 《성씨고략(姓氏考略)》, 《장자(莊子)》 같은 문헌사료에 의하면 요임금 시대에 숭(崇), 지(枝), 서(胥), 오(敖)라는…
◇장남을 죽여버린 김일제 흉노 휴도(저)왕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의 자는 옹숙(翁叔)이었다. 그의 장남은 김농아(金弄兒)였는데, 무제는 농아를 총애해서 항상 곁에 두었다. 농아는 때로 무제의 목을 껴안을 정도로 허물없이 지냈는데, 하루는 이를 본 김일제가 눈으로 꾸짖자 농아가 무제에게 달려가 “옹숙이 화났다”고 울면서 일렀고, 무제는 “왜 내 아이에게 화를 내느냐?”고 김일제를 꾸짖을 정도로 허물이 없었다. 무제의 총애에 고무된 농아는 급기야 무제의 궁녀들을 희롱하기에 이르렀고 김일제는 그 음란함을 미워해 농아를 죽여 버렸다. 이를 안 무제가 크게 화를 내자 김일제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농아를 죽인 상황을 갖추어 말하자 무제는 크게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閼氏)가 병으로 죽자 무제는 궁중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려 감천궁(甘泉宮)에 걸어놓았는데, 그림의 제목이 〈휴도왕알씨(休屠王閼氏)〉였다. 알씨가 김일제와 동생 김윤(金倫)에게 법도를 잘 지키라고 가르쳤고 무제가 이를 훌륭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서》는 무제가 “김일제를 마음으로 존경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김일제 또한 무제를 잘 알았다. 무제의 총애는 재앙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바닷 속에 묻힌 신라 문무왕 신라 제30대 문무대왕(文武王:재위 661~681)은 부왕 태종무열왕의 유업을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달성했다. 또한 옛 백제 및 고구려 강역을 차지하려던 당나라 군사와 나당전쟁(신당전쟁)을 치러서 옛 백제 및 고구려 강역을 신라 강역으로 포함시켰다. 이런 문무왕에 대해서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아들 아들인 신문대왕이 부친을 위해 세웠다는 동해 바닷가의 감은사(感恩寺)다.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나오는 이야기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끝마치지 못하고 붕어(崩御)해서 해룡(海龍)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開耀)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 동쪽으로 굴을 뚫어 열어두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둘러싸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조(遺詔:황제의 유언)로써 유골을 간직한 곳의 이름을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나는 형상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삼국유사》)” 《삼국사기》는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서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세속에서 왕이 변해…
…남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했다. “자자. 첫 잔은 스트레이트. 첫 잔부터 아이스 샤워를 시키는 것은 우리 로얄 살루트 34세 황제 폐하께 대한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 청담동에서 김미리가 안내해서 간 호화 빌딩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에서 내리자 고급스러운 흑경(黑鏡) 타일로 장식된 외양을 갖춘 업소가 나타났다. 크지 않게 붙어 있는 ‘아프로디테’라는 상호의 디자인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김미리를 따라 들어간 내부의 색다른 인테리어가 윤희를 압도했다. 출입문 안쪽 벽면을 가득 채운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이 주황색 조명을 받아 휘황하게 빛났다. 질감 양감이 다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서 제대로 모사한 유화 같았다. “미리 씨 왔어?” 귀부인 태가 나는 양장차림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미인인 데다가 목걸이 귀걸이에서 호화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여성이었다. “예.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여사장이라는 부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색안경 너머로 윤희를 뜨거운 눈길로 찬찬히 훑었다. 김미리가 얼른 양쪽을 번갈아 보며 소개했다. “소개할게요. 여기는 저의 동료 연극배우 김윤희 씨. 그리고 이쪽 분은 이 아프로디테 대표이신 비너스…
◇흉노에게 공격당하는 한나라 중국에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는 곳이 있다. 하서(河西)라는 약칭으로도 불리는데 주랑(走廊)은 복도, 또는 회랑 등을 뜻한다. 중국 감숙성(甘肅省)은 성도(省都:성의 수도) 난주(蘭州)에서 돈황(燉煌)까지 서북쪽으로 좁고 길게 이어져 있는데 이 하서주랑 때문이다. 황하 서쪽 감숙성(甘肅省) 서북부의 기련산(祁連山)이 북쪽을 가로막고 있고, 합려산(合黎山)이 남쪽을 가로 막고 있는데, 난주에서 신강(新疆) 가까운 돈황까지 1천여 1천여 km의 긴 회랑이다. 하서주랑은 황하의 서쪽 지류가 흐르는 복도라는 뜻인데, 북쪽은 산맥 아니면 내몽골 몽케 텐그리(騰格里“Monke Tengri)사막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청해성 주랑남산(走廊南山) 등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하서주랑을 통하지 않고는 서역(西域)으로 갈 수 없었다. 서기전 2세기 경 이 하서주랑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 기락 김씨의 조상이라는 김일제(金日磾)의 부친 휴도왕(休屠王)이었다. 흉노는 황제인 선우(單于) 아래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었는데, 휴도왕은 우현왕이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쪘다는 뜻의 ‘천고마비(天高馬肥)’를 우리는 ‘독서의 계절 가을’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지만
*문정창이란 역사학자 가끔 김해 김씨나 경주 김씨를 만나면 자신은 흉노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의 뿌리를 찾아보면 문정창(文定昌:1899~1980)이라는 역사학자를 만나게 된다. 문정창은 1923년 경상남도 동래군 서기를 시작으로 1943년 황해도 은율군수를 거쳐 1945년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 패전을 맞았다. 1941년에는 《조선의 시장(朝鮮の市場)》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관료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이병도·신석호도 뒤늦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 같이 등재되었지만 문정창과 이병도·신석호의 광복 후 행보는 사뭇 달랐다. 이병도·신석호는 광복 후 친일세력이 다시 집권하자 조선사편수회 경력을 발판삼아 역사학계를 장악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定說)로 승격시켰다. 반면 문정창은 일제 때 관료경력을 반성하면서 이병도·신석호가 고착화시킨 일제 황국사관을 올바른 민족사관으로 바꾸는 일에 남은 생애를 바쳤다. 한국의 모든 대학 사학과를 장악한 이병도·신석호의 제자들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고를 써가면서 조선총독
◇소호 김천씨를 지우려했던 사마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소호 김천씨를 지우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마련했다. 잘 알려진 소호 김천씨라는 이름 대신 누구인지 잘 모르는 현효(玄囂)라는 이름을 쓴 것도 소호를 지우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소호 자체를 지울 수는 없었다. 소호는 황제(黃帝)의 큰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첫 부인은 서릉씨(西陵氏)의 딸 누조(嫘祖)였는데, 이에 대해 《사기》 〈오제본기〉는 이렇게 썼다. “누조는 황제의 정비(正妃)가 되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가 천하를 얻었다. 그 첫째가 현효(玄囂)인데, 이 이가 청양(靑陽)이다(《사기》 〈오제본기〉)” 이 현효가 바로 김수로왕과 김유신의 조상이라는 소호 김천씨다. 사마천은 잘 알려진 소호라는 이름 대신 현효, 청양 등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을 쓰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청양은 강수(江水)로 내려가 살았다. 그 둘째가 창의(昌意)인데, 약수(若水)로 내려가 살았다.” 황제의 큰 아들인 청양, 곧 소호 김천씨는 강수에 살았고, 둘째 아들인 창의는 약수에 살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고대의 역사강역을 크게 확장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강 이름들도 마
김유신 비문의 수수께끼 김수로왕은 수수께끼의 인물인데, 그 조상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기사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있다.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김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했다. 김유신의 비문에도 또한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후손이다’라고 했으니 즉 남가야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이 기사에는 김수로왕의 조상이라는 두 임금이 등장한다. 헌원과 소호이다. 헌원은 황제(黃帝) 헌원씨를 뜻하고, 소호는 소호 김천씨를 뜻한다. 황제 헌원씨와 소호 김천씨는 모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고대 군주들이다. 그것도 사마천의 《사기》 첫 대목인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등장하는 군주들이다. 사마천은 중국사의 시작을 다섯 명의 제왕을 뜻하는 오제(五帝)로 설정했는데, 첫 제왕이 황제(黃帝) 헌원씨다. 《사기》의 첫 구절은 “황제는 소전(少典)의 아들이고 성은 공손(公孫)인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중국사가 황제 헌원씨부터 시작한다고 말한 것인데, 〈김유신 비문〉은 김수로왕이 황제 헌원의 후예라는 것이다. 소호 김천씨는 황제의 맏아들이다. 황제는 서릉
…거기까지 듣고 있던 윤희가 돌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는 외쳤다. “불결하고 천박해요! 언니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러나 이민지는 흥분하기는커녕 쓰디쓴 미소를 띠면서…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밥 한 숟가락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 아침 뉴스에서 경찰서 조사를 받고 나오는 백두 단장과 최현규를 보았다. 수갑 찬 손목을 까만 수건으로 둘둘 말아 가린 그는 초췌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눈빛이 빛난다는 게 신기했다. 그는 예의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게도 신념에 찬 어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오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무죄라고도 주장하지도 않겠습니다. 모든 진실은 제 예술 안에 있습니다. 모두가 예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벌인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예술이 뭔지 아는 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쯤에서 경찰은 기자들을 가로막고 백 단장을 호송 차량으로 이끌고 가서 머리를 누르면서 태웠다. 이어서 최현규가 나타났다. 언제부터 피해자에게 범행을 저질렀습니까? 몇 번이나 그랬나요? 기자들이 잇달아 소리쳐 물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푹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호송차로 걸어가
*아주 구체적인 가락국 건국 사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모두 김수로왕이 서기 42년 가야를 건국했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그 내용이 아주 구체적인데, 핵심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개벽 이후 가야지역에는 나라의 이름과 군신의 칭호가 없었다. 다만 아도간·여도간·피도간·오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이라고 불리는 9간(干)이 7만5천여 명의 백성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서기 42)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북쪽 구지봉(龜旨峯)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구간과 2,3백여 명의 백성이 모였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사람의 소리 같은 것이 들였다. “황천(皇天)께서 내게 이곳에 가서 새로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해서 이곳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불러라.” 그러면서 부를 노래를 직접 가르쳐 주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드러내어라, 드러내지 않으면 구워먹겠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면서 기뻐 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간 등이 이 말처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