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 벽의 심우도(尋牛圖)는 소를 찾는 그림, 불교의 오래된 상징 중 하나다. 상징은 말과 글의 세계, 나아가 문명의 씨앗이다. 소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읽자. 우리 불교와 사상, 정서적 전통에서도 이미지 크다. 만해(卍海)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다. 뜻 크고 깊은 스님 만해, 아름다운 시 언어로 인류를 가르쳤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3·1 독립선언에 나섰고, 끝내 그 연꽃 마음 변절하지 않았다. 그의 종교의 친정은 인제 백담사다. 만해기념관 부근 계곡은 단풍이 극치여서 찾는 이 더 많았다. 매서우면서도 그윽한 이율배반적인 눈길, 만해 조각상에 마음 숙였다. 저런 스승 있으매 오늘 우리가 이리 당당하리라. 마침 이재명 이낙연 두 후보의 재회(再會) 배경 벽면에 우연히 걸린 찾을 尋(심)자 액자에 주목하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우연일까, 허나 중요한 만남의 상징으로 여겨 그 시사(示唆)하는 바를 찾는 것이겠다. 한자가 그림임을 잘 보여주는 글자다. 손 모양 계(彐) 아래 만들 공(工)과 입 구(口)다. 다시 쓰면 左(좌)와 右(우)다. 아래는 손목에 점찍은 마디 촌(寸)이다. 암중모색(暗中摸索), 어둠 속 안개바다를 좌우로 손 내밀어 한…
선생은 당대 러시아 소설가로서 대문호 톨스토이와 솔제니친 등을 잇는 현존 최고의 작가다. 1939년생으로 여든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정력적으로 쓴다.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미술대학, 고리끼 문학대학에서 공부했다. 6공 때 한-러 수교 덕분에, 1989년 9월, 세계 한민족 체전 참가자의 일원으로 우리 정부가 보낸 전용기를 타고 '조국' 땅을 밟는다. 100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는 돌아가면서 친구 인 번역가 김근식 교수에게 자신의 뿌리를 확인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 얼마 후 실로 경천동지 할만한 편지를 받게 된다. "고개 숙여 존경하는 시인이여! 이렇게 하여 나는 당신의 후예임을 알아내고 한없이 기뻤습니다. 이제 내 운명에서 풀리지 않았던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의 결심과 행동으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왔던 나는 결국 많은 면에서 당신의 길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 놀 라운 소식에 형언키 어려운 기쁨을 느끼면서도 어이하여 나는 울적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일까요?" 김시습이 아나톨리 김의 17대 직조(直祖)였던 것이다. 이 문장은 선생이 당시 한 일간지에 기고했던 에세이 "나는 한국인인가, 러시아인인가?"의 첫대목이다. 그 기사를…
개는 골목에서 큰길로 걸어 나왔다. 다리는 짧고 몸통은 길쭉한 개였다. 목줄에 묶인 개는 주인의 바짓가랑이 주위를 요리조리 누비며 걸었다. 걷던 개가 처음 멈춰 선 곳은 전봇대 앞이었다. 개는 뒷발 하나를 전봇대에 걸치고 오줌을 갈겼다. 오줌은 벌려진 개의 뒷발 각도와 높이에 상응하는 자국을 전봇대에 남겼다. 전봇대에 새겨진 오줌 자국에서 김이 모락거렸다. - 가난한 사람은, 부정식품도 먹을 수 있게 존중하고. 다른 개는 반대편 인도에서 걸어왔다. 송아지인지 개인지 구분하기 힘든 개였다. 목줄에 묶인 개를 따라 주인은 아등바등 끌려 다녔다. 개가 주인을 끌고 나온 건지, 주인이 개를 끌고 나온 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다른 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봇대에 오줌을 갈긴 개를 향해 다가왔다. 다가서는 다른 개를 향해 다리가 짧고 몸통이 긴 개가 짖어댔다. - 일을 할 거면, 일주일에 120시간 바짝 일하고. 송아지인지 개인지 구분하기 힘든 개의 주인은 여전히 아등바등 끌려 다녔다. 끌려 다닐 때마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는데, 앞말과 뒷말이 연결되지 않고 뜬금없어서, 말의 속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난 건지, 만나던 애인에게 딱지를 맞은…
예수는 이미 그 도덕적 기초가 흔들리고 있던 기존 사회의 종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활 질서의 물질적 상징인 신전은 더욱 완전한 것의 건설을 위해 무너져야 한다.’고 예언했다. 그리고 그는 조만간 실현될 그 예언 위에, 훨씬 훗날 실현될 똑같은 사태에 대한 예언을 덧붙이며, 그 사태를 당시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하던 모습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우리는 지금 그가 예언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전 세계의 끝에서 끝까지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 기초가 되는 모든 시설과 질서를 살펴보면 튼튼한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곧 모두 붕괴되어 예루살렘 신전처럼 신전의 돌 위에 돌멩이 하나 남지 않는 상태가 되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라므네)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평지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빨리 해돋이를 본다.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육체적인 생활만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빨리 영적인 해돋이를 본다. 그러나 얼마 후 때가 되어 해가 솟아오르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이게 된다. 지금까지 종종 사람들이 남을 위해 죽는 것이 쉽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결정됨에 따라 내년 3월 9일 치러지는 대선의 대진표가 사실상 확정됐다. 주요 정당으로 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함께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다. 여기에 가칭 ‘새로운물결’의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등이 있다. 국민들은 이제 4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이 인물과 정책 대결로 대선의 격을 높이는 축제의 장이 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대선은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의 선거로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가 앞서는 게 사실이다. 먼저 후보 경선이 끝난 민주당은 최종 후보 선출과정에서 불거진 경선 불복 논란이 외형적으로는 봉합된 상황이지만 일부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에 끝난 국민의힘 경선은 민심과 당심이 충돌한 끝에 결국 당심으로 판이 가려지며 파장을 낳고 있다. 우선 최종 경선에서 2위로 탈락한 홍준표 후보에 압도적 지지를 보낸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탈당과 지지세 이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역대 경선을 보면 당심이 민심에 수렴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번 국민의힘 경선은 당원들에 대한 장악력이 높은 의원과 당협위원장이 대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화해 정착을 위한 노력을 요청하고 북한을 방문해줄 것을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에는 유엔 기조연설을 통해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종전선언 추진상황을 설명하고 회원국들의 적극적 지지와 협조를 구했다. 이를 위해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을 미국에 보내 한반도 정책 관계자들을 만나 종전선언의 당위성을 설득하도록 하기도 했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의 남북 평화정착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평가할 만하다. 돌이켜 보면 한반도의 분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미국이 주도한 것이다. 분단이 운명이라면 마땅히 전범국가 일본이 그 짐을 지어야 했음에도 미국 등 강대국은 한반도에 그 업보를 뒤집어씌운 셈이다. 미국은 일제 강점기 친일 민족반역자 집단을 재기용함으로써 민족 내부의 갈등을 촉발하고 급기야 동족상잔의 전쟁에 이르게 했다. 이 죄업은 두고두고 미국이 갚아야 할 역사적 책무를 상기시킨다. 또한 미국은 군정을 통해 민족 내부에서 일어났던 정당한 단독정부 반대운동을 유혈 진압(4·3 사건)했을 뿐 아니라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남북 협상을 방해함으로써 민족국가 형성과 평화 정착 노력을 초기부터 깨트린…
우리의 생명의식과 신의 관계는 우리의 감성과 세계 또는 사물과의 관계와 같다. 감성이 없으면 우리는 세계와 사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생명의 의식이 없으면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신을 섬기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고 이성이 주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자유의사를 가지면서도 역시 정의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신이다. 대체로 우리의 마음이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인식을 이성에 전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어려운 일이다. 또 과연 이성은 마음 없이 저 혼자 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신을 인식해야 이성이 그것을 탐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리히텐베르크) 신의 이념은 확실히 위대하지만, 그것은 결국 무한하게 정화되고 무한하게 높여진 우리의 정신적 자질의 이념이다. 신성 이념의 기초는 우리의 내부에 있다. (채닝) 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 좋은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엔젤리스 실리시어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작품이 있다. 와카타케 지사코가 쓴 소설도 있고 오키타 슈이치가 만든 영화도 있다. 75세 노년 여성 모모코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고독하다. 한편으로는 고독을 즐기는 것도 같지만 속살을 보면 고통의 나날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여성은 55세에 남편이 죽자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혼자가 됐다.’ 그러나 그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며 산다. 거의가 다 독백이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1분 진료를 했다’라든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상의, 허구의 인물이 늘 머리맡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다. ‘그냥 더 누워 있어. 일어나 봐야 별다른 일도 없잖아?’ 하지만 이 ‘노친네’ 모모코는 굳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의 무심하고 무례한 병원 진료를 보는 일과 같은 루틴의 일상을 시작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보고 있으면 노년의 삶이 지녀야 할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파편화된, 고립된 개인만의 삶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 노년층들, 더 나아가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