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과 정경모. 두 분이 하루 사이에 연이어 별세함으로 인해 정경모 선생은 그다지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정경모는 요즘 말로 하면 작가다.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다 일본에 망명한 정경모의 본격적인 저술 활동은 광주항쟁으로 촉발되었다. 광주의 원혼들의 슬픔을 노래해주기 위해 1981년 ‘シアレヒム(씨알의 힘)’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잡지의 제6호(1983년 6월)에 여운형 · 김구 · 장준하의 구름 위 정담(三先覺雲上經綸問答)을 게재했고, 그것을 1984년 단행본으로 내놓은 게 ‘찢겨진 산하’다. 그 내용은 세 분 선각자의 말이기도 하고 작가 정경모의 생각이기도 하다. 주제의식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이 별개가 아니기 때문에 상호관련 속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민주화운동을 한다면서 통일운동을 경원시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킨 근원이 분단에 있기 때문에 둘을 분리시킨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동학농민혁명 사상에서 연유한다는 사실을 결론적으로 강조하면서 글을 마친다. ‘찢겨진 산하’는 정경모의 창작이지만 철저히 검증된 자료를 근거로 쓴 역사책이다. 해방 후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친일파들이…
2019년 말 발표된 논문 한 편이 근래 들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남성을 벌레에 비유하고 비하했다는 이유로 청와대 국민청원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 유명 유튜버는 이 논문이 자신을 ‘여혐’으로 몰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편 직접 학자의 연구실을 찾아가고, 학술단체 임원과 대화한 내용을 공개하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해당 논문을 읽어보면 주제가 불법 촬영의 근원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이 논문이 혐오와 차별의식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 억지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신랑‧신부의 초야에 문구멍을 뚫어 엿보거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무언가를 몰래 보고, 금지된 것을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시선이 남성을 중심으로 하며 범죄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관음증의 표현과 실행이 온라인으로 넘어오면서 더욱 강도가 세지고 집단화되고 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여자 친구와 애인, 엄마, 누나, 여동생, 사촌 등 주변 여성들의 샤워하는 모습과 옷을 갈아입는 장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모습을 공유하며 은밀함을 즐긴다. 갈수록 수위는 높아져 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약물을 투여해 집단 강간하고
지난 2월 24일 국회에서 KBS를 비롯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에 관련한 공청회가 열렸다. 방송관련법 개정안의 핵심은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 선임방식 변경 문제였다. 사실 지난 20여 년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비슷한 논의가 이어졌지만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민주당 의원들이 제출한 법안을 보니 이사와 사장 선임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한다. 사람들이 넷플릭스 같은 OTT(범용인터넷 동영상 서비스)와 개인맞춤형 콘텐츠에 매료되는 글로벌 미디어 시대에 공영방송은 철 지난 잡지 표지처럼 낡아 보인다. 영향력이 현저하게 낮아졌고 신뢰도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재정은 파산 직전인 것 같고, 보도의 공정성 시비에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이런 공영방송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제도인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문과 방송 같은 ‘레거시 미디어’ 체제는 언론인의 게이트 키핑과 수용자의 선택적 소비를 축으로 움직인다. 언론소비자 입장에서 편파적이거나 정파적인 내용을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체제다. 게이트 키퍼들도 수용자의 ‘확증편향’이 문제라고 반박하면 그만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빅데이터에 근거한
내일은 오곡밥에 지난해 말려 두었던 나물을 먹는 날이다. 예전에는 정월 보름하면 명절 못지않게 큰 명절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마을잔치를 벌이는데 윷놀이는 상금이 걸린 큰 놀이였고 여기에 아녀자들은 널뛰기 대회를 열기도 한다. 지방마다 행사 내용이 다르지만 내가 살던 김포에서는 윷놀이, 그네뛰기, 널뛰기, 달님에게 절하기, 액막이로 연 날려 보내기를 했다. 여기에 더하여 짚단에 불을 붙여 달님에게 절하며 소원을 비는데 남자 애들은 구멍 뚫은 깡통에다 불을 담아 회전시키며 불을 키우기도 했다. 아버지는 두꺼운 송판을 인천에서 사다 주셔서 언니 친구들이나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서 널뛰기를 하기도 했다. 지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윷놀이만 남은 것 같다. 시골에 가도 연날리기를 하거나 불놀이 할만한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귀하게 호두하고 땅콩 몇 알 얻어먹는 것도 기다려지는 일이다. 호두를 딱하고 깨트리며 그 소리에 귀신이 도망간다는 귀신 쫓는 방법이라는 말도 있으나 나중에야 조상들의 지혜라 할 수 있는 풍습을 알고 경이로웠다. 예전에는 영향 부족으로 오는 버짐이 심했다. 그래서 영향 보충의 일환으로 식물성 기름을 섭취함으로써 예방하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
작은 새 한 마리 골목길 담장 아래 쓰러져 있다 늦가을 볕이 수의 한 벌 지어오고 하늬바람이 조심조심 새의 주검을 감싸주었다 저 새가 불러준 노래의 부피만큼 세상은 맑아지고 슬픔의 무게도 덜어냈겠지 먼 허공에 길을 내어 캄캄한 별들에겐 등을 꺼내 주던 새 언제부턴가 노래가 울음으로 변한 새 눈물 없는 세상 차마 그리웠던 것일까? 감긴 눈 속에 파란 하늘 한 조각 담고 못다 부른 노래의 날개도 접었다 새를 잃어버린 허공이 부르르 슬픔으로 온 몸 떠는 것을 보았다 약력 ▶조은설(본명;조임생)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미네르바] 신인상 등단 ▶[한국일보] 여성생활수기 당선 ▶시집 [거울뉴런] 외 3권 ▶장편동화 [밤에 크는 나무들] 외 30여 권
시의적절한 우화 하나. "장자가 쌀독이 비어 말단관리인 친구에게 쌀 한 됫박을 얻으러 갔다. 친구가 말하기를, '걱정말어. 추수 끝나면 쌀 몇 가마니를 줄테니까.' 장자가 대꾸했다. '이 동네 오는 길에 뒤에서 누가 부르길래 고개 돌려 자세히 살펴봤지. 수레바퀴 패인 자국에 빗물이 조금 고였는데 거기서 물고기 한 마리가 헐떡거리며 날 부른 거였어. 왠 일인가 물었지.' '내 황해바다 용궁의 사신이오. 어찌어찌 하다가 이꼴 났으니 물 한 바가지만 속히 부어주오.' 내가 말했네. '걱정하지 마. 내가 황제를 설득해서 황해의 물줄기를 이쪽으로 끌어올테니...' 물고기는 눈 크게 뜨고 핏대를 올리며 나에게 온갖 저주를 다 퍼부었어. 지금쯤 죽었을 거네." 코로나19로 인하여 쌀독 비는 집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이 바이러스가 사실상 생사여탈권을 쥔 강적이다. 생업이 날로 위축되는 바람에 민초들은 지금 몹시 위태롭다. 특히나 제도의 사각지대는 기초생활 수급 대상에서 제외된 독거 노인들, 미혼모 등 소외계층, 부당한 계약으로 사실상 노예신분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존재의 위기로 몰고 있다. 이런 판국에 정치권은 '물 한 바가지'와 '쌀 한 됫박'을 놓고 정쟁을 멈추지 않는
말 그대로 미디어가 넘쳐나는 미디어 홍수시대다. 정보의 범람이고 미디어의 홍수다. 인쇄매체는 우후죽순격으로 등장한 인터넷신문으로 말미암아 맞춤법 안맞는 신문기사가 그리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주력신문의 위치는 아직 굳건하다. 반면 방송미디어는 판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ICT기술의 발달로 방송에 대한 접근루트가 다양화되고 (플랫폼의 다양화) 아무나 할 수 없던 콘텐츠의 생산과 전달이 누구에게나 오픈되면서 생긴 일이다. 이 시대 우리는 방송문화의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 프로슈머(prosumer)인 셈이다. 중국역사를 보면 주나라가 쇠하면서 춘추5패와 전국7웅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였다가 진시황에 의해 진나라로 통일되었다. 가히 방송은 춘추전국시대다. 지상파방송도 IPTV,케이블,위성방송이란 플랫폼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볼수 없는 구조이고 플랫폼은 자신이 직접 제공하는 영상서비스를(VOD) 통해 매출을 확대한다. 이젠 OTT라 부르는 넷플릭스가 한국시장을 장악해가고 있다. 넷플릭스의 경우 2020년 신용카드 결제액 추정매출이 5173억, IPTV 가입자 동시결제 매출까지 포함한다면 6천억원은 될것으로 추정한다. MBC는 간단히 넘어설 것
진리를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만이 사람들의 귀에 들리게 마련이다. (소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바느질을 잘하고 능숙하게 풀을 베고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과 그 이치는 똑같다. 그것은 바느질을 많이 하고 풀을 많이 배고 글씨를 많이 써본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아무리 애써도, 수없이 해보지 않은 일은 잘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하고 싶으면 그 일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일에 익숙해지려면 아무리 사소한 일에 대해서라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남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 완전히 습관이 되어버려서, 종종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신을 위장하기 쉽다. (라 로슈푸코)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내부에 뿌리내린 사상에만 진리와 생명이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책에서 읽은 남의 사상은, 이를 테면 남의 밥상 위의 먹다 남은 찌꺼기이며 이방인에게서 빌린 옷과 같다. (쇼펜하우어) 진리를 위해 진리를 사랑하는 현자들은 진리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서 진리와 만나더라도 감사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곳에 누군가의 이름
일반인인 조민씨에 대한 기성 언론의 낙인찍기는 무얼 뜻할까? 그 광기는 그저 하나의 미친 짓에 불과한 것일까? '조민 낙인찍기 현상' 이면에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을까? 일단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정반대 지점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나치 체제에서 유태인들을 죽음의 가스실에 몰아넣었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서 아렌트는 새로운 발견을 한다. 명령에 따라 악인 줄도 모르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한 아이히만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라는 통찰. 그의 죄는 '무사유'였다. 그렇다면 의식적 '사유' 속에서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유태인들을 낙인찍어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죽이라고 명령한 이들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악의 평범성? 악의 특별성? 누구나 악의 특별성이라고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의 특별성을 한국 사회에 대입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특별한 소수의 특별한 악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요소들이 장막의 역할을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다원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열린사회란 점도 하나의 장막일 것이다. 그 형식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작용해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어느 해 설날 아버지는 내 손목을 잡고 고샅길을 걸으시면서 ‘설’은 ‘서러워서 설’이라고 했단다. 라고 들려주셨다. 묻지도 않았는데 들려주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산촌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며 속상한 일 많을 것이니 미리 짐작하고 서럽더라도 참고 살아가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아버지의 이 말씀을 지금껏 기억하고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기억의 저장고 저변에 깔린 이 말씀이 내 삶의 중심으로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그 후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사회에서는 배고파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먹을 게 없고 입을 것 없어 서럽고 슬픈 세상은 아니다. 대신 어떤 죄 닦음인지는 모르나 ‘코로나’라는 역병으로 인하여, 여럿이 술·밥 먹지 말 것이요, 뭉쳐 다니지도 말고 집안에서 자중하며 고독하게 지내보란다. 질병관리본부에서 하는 말이 곧 코로나가 타이르는 말을 대신하는 듯. 이 집이나 저 집이나 TV 시청 시간이 늘었다. 안방에서나 거실에서나 TV에서는 ‘트로트 세상’이다. 장사 안되고 사업망치고 사람도 만나지 말라니 속 풀이나 하라는 듯 10여 개 방송사에서는 눈만 뜨면 궁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