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이 주는 선물 ‘밀레니얼 세대 이후 코로니얼 세대가 왔다’고 누군가 말했다. 항상 언제 어디서든 접속할 수는 있지만 늘 외로운 세대로부터, 실제로 접촉하지는 않지만 늘 소통하고 공유해야만 살아남는 세대로 넘어간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20세기 말에 온 밀레니얼 세대는 지금의 디지털 생활을 창조했다. 하지만 왕성한 스마트 소통 속에서 줄곧 원자의 고독을 느껴왔다. 그런데 코로나19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세대가 왔다. ‘팬데믹’이라고 부르는 감염의 세계적 대유행 속에서는, 고립될 수밖에 없지만 더욱 공감을 위해 노력하는 콜로니얼 세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21세기가 시작 될 무렵부터 20여 년 간,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창의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미레니엄 이후 세대들의 활약을 보아왔다. 서구에서는 X세대 다음으로 찾아온 N세대들이 청년기에 그 주역을 담당하였다. 한국사회에서는 호황의 꽃에 해당하는 1990년대 신세대, 혹은 ‘서태지 세대’라는 존재들 다음에 그런 존재가 등장했다. IMF 이후 세대, 혹은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는 불황의 꽃들로서, 경기침체 속에 세상에 나간 21tpl의 청년들은 적어도 사이버 세상에서만큼
디지털 이전의 카메라에는 필름이 들어가 있었다. 필름회사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디지털 카메라에는 필름이 들어가는 자리를 칩이 대체하였고 찍은 사진을 저장하게 되었다. 아나로그 필름은 한통으로 사진 24장이나 32장을 찍을 수 있었는데 디지털 저장장치는 손톱만한 크기에 수백장을 저장하고 지우고 다시 찍을 수 있어서 잘 관리하면 수년간 재활용이 가능해졌다. 그러니 필름으로 큰 수익을 얻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도산위기를 맞은 것이다. 필름시절 부부 단체관광을 가면 카메라를 가진 남편들이 인기가 높았다. 오전에는 명소에서 단체사진만 찍었다. 포토뷰가 좋아도 개인사진을 찍지 않았다. 부부사진, 최소 7~8인 소그룹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필름이 비싸기 때문이고 사진을 뽑는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술 한잔을 하신 우리의 사진사 남편은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한다. 과감히 개인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풍광사진을 촬영한다. 사진사 아내는 필름값은 어찌하고 그렇게 찍어대면 다 뽑아줄 것인가 따라다니면서 따진다. 결국 사진촬영은 부부싸움으로 번지고 술취한 남편은 버스 앞자리에, 화가 난 아내는 뒷자리에 가서 몸져 눕는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남과 북의 흥겨웠던 시간은 어느새 백년은 지났나 싶게 아득하다. 실제 백년 전쯤으로 한번 돌아가볼까. 1898년은 “제국 아메리카의 시발점”이다. 미국은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와 필리핀을 독립시키겠다며 노쇠한 스페인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사실은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쿠바와 필리핀은 독립은커녕 졸지에 주인만 바뀐 식민지로 다시 전락했다. 1895년 청일전쟁으로 조선반도에서 중국을 몰아내고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선언했으나 조선을 식민지 비슷하게 거머쥔 일본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자 조선의 식민지화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어디 그게 일본 혼자의 힘이었던가. 러일전쟁 자체가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치러진 전쟁인데다가 태프트-카츠라 조약에 따른 거래가 깔려있지 않았는가? 그 거래라는 게 뭔지 이제는 다 안다. 필리핀의 주인은 미국이고 조선의 주인은 일본으로 하자는 거 아니던가. 미국의 이른바 아시아 태평양 체제는 이렇게 우리에게 역사적 고통을 강요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러니 미일전쟁(美日戰爭)이기도 한 아시아 태평양 전쟁 마무리를 한 19
아이 하나가 엉엉 울면서 내게 다가온다. 보통은 다른 친구가 우는 아이를 토닥이며 데리고 온다. 눈물을 쏟는 아이를 달래며 자초지정을 묻자 친구 A가 자신을 때리면서 욕했다고 말한다. 한참 성토대회를 열던 아이는 이때부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낸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고 폭력을 쓰는 건 선생님께 혼나야 하는 일이니까. 친구가 얼마나 혼날지, 내가 어떤 판결을 내려줄지 기대감이 차오른다. 막상 A를 불러서 삼자대면 해보면 나쁜 행동을 저지른 나름의 이유가 있다. B가 먼저 놀리고 도망쳤거나, B가 먼저 때렸거나, B가 예전 어느 날에 자신을 놀리면서 때렸거나. 보통은 셋 중 하나의 이유로 귀결된다. 장난치려고 먼저 때리는 경우는 있어도 아무 이유 없이 욕하면서 건드리는 경우는 드물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마음 속에 남아 있다가 갑자기 행동으로 드러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상담하면서 두 아이 모두가 잘못한 점을 발견했을 때 담임교사인 나는 홀가분한 마음이 된다. 잘못의 경중을 크게 따지지 않아도 되고, 서로 사과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 걸로 종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지만 본인들도 잘못한 점
쩡~ 하고 가슴이 뚫리는 그것이 생각난다. 눈이 푹푹 내리는 날 소랭이를 옆구리에 끼고 집 앞에 파묻은 김치움으로 간다. 땅속에 묻은 김칫독은 영하 30˚에 꽁꽁 얼어있다. 봉인된 김칫독을 열면 두툼한 얼움이 하얗게 깔려있다. 조심히 얼음을 비껴내면 세 번의 발효과정을 거친 김치가 빨간 국물 속에 얌전히 누워있다. 신비감을 주는 이 것은 몇 달의 숙성 과정을 거쳐 새콤하고도 달콤한 향기를 낸다. 김치는 김칫독의 아래로 내려갈 수 록 더 맛있다. 국자로 얼음이 버석거리는 김치와 국물을 푹 퍼 담는다. 상위에 오른 김치는 손으로 죽죽 찢어 밥 위에 얹어 먹었다. 배추 사이 사이 넣은 명태는 발효의 작용으로 이미 명태가 아닌 김치다. 눈이 푹푹 내리는 날, 앞집 뒤집 오가며 뉘집 김치가 맛있나 채점하면서 먹었던 쩡~ 한 맛의 함경도 김치. 고향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춥다. 함경도 김치는 동해바다의 특산인 명태를 넣고 김장을 한다. 지금은 어획량이 줄었지만 1980년대 까지만 해도 명태가 많이 잡히는 어장이었다. 그래서 함경도 김치라 함은 명태김치를 말한다. 김치의 종류도 통김치, 갓김치, 총각김치, 동치미, 백김치 등 다양하다. 배추는 비료가 부족해서 남한 것처럼
우리나라 선박이 이란 혁명 수비대에 의해 나포됐다. 이란 측이 나포의 이유로 드는 것은, 이른바 “환경오염”이다. 그런데 해당 선박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는 이런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환경을 오염시킬만한 물건을 선적하지도 않았고, 또 환경을 오염 시켰다면 위성으로도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란은 과거 영국이나 다른 국가들의 선박을 나포했을 때도, “해양 오염” 과 같은 이유를 든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란 측의 주장을 믿기는 매우 어렵다.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 계좌에 동결된 이란 석유대금 70억 달러와 관계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한은에 예치된 일반은행의 초과 지급준비금의 90% 이상이 이란 멜라트 은행 서울지점이 맡긴 돈이고, 기업은행과 우리은행에도 이란 중앙은행 명의로 원화 계좌가 개설돼 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2018년 이란 중앙은행을 제재 명단에 올려, 그때부터 이 계좌를 통한 거래가 중단됐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란 정부는, 이 동결 자금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우리 정부도 인도적 거래는 허용된다는 점에 착안해서 이 돈으로 코로나 19 백신을 구매해 이란에 제공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이란
요즘 새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집을 나설 때 무의식적으로 마스크를 챙긴다는 점이다. 마스크 없이 집을 나서면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외출한 것처럼 찜찜하고 불안했다. 우리는 이 습관에 더 강력하게 길들여지기 위해 자석고리를 철문에 붙여놓고 마스크를 걸어두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 깜빡할래야 깜빡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이런 삶이 몇 개월은 귀찮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 당연함 속에 불편함도 녹아 있었다. 마스크 쓰게 되면서 얼굴의 반이 가려져서 상대를 단숨에 알아보는 일은 둔해졌다. 유심히 쳐다보지 않으면 누구인지 도통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50년 넘는 세월을 살면서 이런 시절은 한 번도 없었으니 지금의 시간들은 낯선 경험이 될 터였다. 지난 늦가을 잠깐 동안 대면 수업이 2주 정도 허용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학교 강의를 가야했고 강의실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수업해 줄 것을 권유받았다. 한번은 강의실이 있는 6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수강생이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음에도 서로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강의실에 들어가셔야 나는 강사고 그는 수강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두 주 대면 강의를 했는데 몇몇이 비대면이 수업이 더
오늘은 합주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합주실이란 말 그대로 합주(合奏)를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장소이다. 각 시나 도에서 운영 중인 곳도 있으나, 작업실이나 합주실 앞에 개인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 경우 대부분 사설 대여 합주실을 지칭한다. 마치 노래방과 같이 시간당 일정 금액을 내고 합주할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하는데, 리허설 스튜디오도 같은 개념이다. 방의 크기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내부에는 방음, 차음 시설이 되어있고 드럼 세트, 기타와 베이스 기타 앰프, 믹서, 마이크, 스피커 등 연주에 필요한 장비들로 채워져 있다. 아마 이 땅에서 밴드를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거쳐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예전 내가 밴드를 시작했던 시기에 서울에는 유명한 합주실이 몇 개 있었다. 서대문의 서문 합주실 그리고 종로의 세화 합주실, 강남의 화이트 합주실 등이 유명했는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수많은 밴드와 뮤지션들이 이곳들을 거쳐 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개인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던 밴드는 드물었기에, 수많은 밴드 뮤지션들이 모였던 이곳에서 많은 음악과 이야기가 탄생했다. 나는 주로 세화 합주실로 연습하러 다녔는데, 당시 처음 본 합주실의 이미지는 굉장히 강렬했다. 종
딱히, 바둑이 너무 좋아서라거나 치매예방에 효과적인 뇌운동이라거나 종일 얼굴 맞대어야 하는 답답한 시선을 피해서만 아닙니다 평생 이루지 못한 신의 한 수를 찾아 오늘도 하염없이 바둑판을 응시합니다 기기묘묘한 알박기를 위해 죽었던 돌이 다시 살아나고 한 수 삐끗하면 판 전체가 끝장나는 긴장이 맴도는 그런 대국, 마지막 돌을 던지는 순간에도 장고하는 건 일생일대의 대결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잡을 수 없는 생의 족적을 비우기 위한 절묘한 수가 어딘가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나의 숨소리와 마주앉은 이의 숨소리가 한 테이블에서 흑백의 생을 재단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큰 집을 짓기 위해 허물고 허물어지며 바둑판 거미줄에 생을 걸쳐 놓습니다 시간이 똑, 똑 떨어집니다 거꾸로 세워놓은 석간수 한 통 다 비워지는 저녁 갈 길은 먼데 다시 급한 곳부터 포석을 정비합니다 아직도 지을 집이 많습니다 ◇ 김정인 시인 약력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도록 내 안에서] [누군가 잡았지 옷깃] 산문집: [엄마는 7학년] 등 교육서 다수
섬은 수평선(水平線) 위에 뜨고 산은 지평선(地平線) 위에 선다. 수평선에 뜨지만 바다일 수 없는 섬처럼, 지평선에 서는 산 또한 들녘이 될 순 없다. 섬은 섬이고 산은 산이다. 그래서 둘은 외롭다. 타고난 팔자 따라 섞이지 못하고 도드라질 운명이랄까. 그런 점에서 섬과 산은 닮았다. 섬이 바다에 떠있는 산이라면, 산은 들녘에 서있는 섬이다. 지치고 힘든 것들이 섬으로 산으로 마음을 여는 것도 그래서다. 섬 같은 산에 오른다. 갯벌에 찍힌 새 발자국처럼 생긴 산이다. 새 발자국 같은 그것이, 밑으로 함몰하지 않고 위로 도드라지며 간신히 산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세 갈레로 갈라진 발가락 끝이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을 가리키는데, 발톱이 박힌 세 지점에 각기 다른 지하철역이 들어섰다. 지하철 역사의 출입구는 산을 눈앞에 둔 기대감으로 종일 요란하다. 먼 길을 돌아 온 사람들이 세 갈레로 갈라진 발가락 끝에 기대고 산에 오른다. 와우고개는 갈라진 세 발가락의 한 가운데 있다. 산의 옛 이름이 와우산(臥牛山)인 것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소의 해 첫날을 ‘누운 소’의 등허리를 밟으며 맞이한다. 누운 소는 봉우리랄 것도 딱히 없어서,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꼬리가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