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나리’영화가 인기몰이다. 지극히 평범한 이 영화는 미국으로 이주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비교되는 인기몰이를 하며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코로나로 텅 빈 영화관을 독차지하고 ‘미나리’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이삭 감독이 ‘미나리’를 호명하여 어떻게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려고 했는지를 스크린을 통해 보았다. ‘네 얼굴은 왜 그렇게 납작하니?’ 데이빗(엘런 김)에게 건네오는 낮선 곳에서 친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국의 화투를 배우고 가지런히 칫솔을 하며 서로를 닮아가는 척박하지만 인간미 있는 그곳,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울컥했던 것은 모니카(한예리)가 한국에서 온 어머니를 눈물로 포옹하는 장면이다.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감동적인 설정인가? 그리고 어머니가 꺼내 놓는 멸치를 받고 또다시 울컥해하는 모니카(한예리), 고향의 언어는 잊혀진 것을 기억하게 하는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미나리의 약효인지 손자의 병은 기적적으로 호전되고 대신 할머니가 병을 얻고 그의 실수로 그동안 일궈온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손자의 안내를 받으며 집으로 되돌아가는 할머니, 그곳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
내 인생의 또 다른 아침이다. 산으로 가던 발길을 강으로 돌렸다. 기찻길 건너 테니스장을 지나니 00중학교다. 손녀딸이 다니는 학교다. 이 학교는 오래전부터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를 하면 꿈을 이룬다.’는 글귀를 교문 위에 걸어 놓고 있다. 중학생이 된 손녀는 속이 야무지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겠다고 작정한 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어젯밤에는 그 녀석 생일이라고 가족과 함께 식사했다. 나는 작은 용돈과 함께 정성 들여 황금빛 색지에 축하의 덕담을 적어 봉투에 넣어 주었다. 손녀딸은 집에 가서 보겠다며 엄마의 가방에 넣어두라고 한다. ‘녀석은 용돈 액수가 궁금할 뿐 내가 쓴 문장과 그 의미는 뒷전일 것이다. 하지만 ‘책 읽고 글 쓰시던 할아버지로 기억할 수도 있겠지-’ 싶기도 했다. 학교를 지나 어느 교회를 뒤로하고 높직한 강 언덕에 올랐다. 청양 한 공기가 숨길을 새롭게 하였다. 산과 하늘과 태양 빛이 달라 보였다. 자연스럽게 곡선을 이룬 길과 강의 흐름이 조화로웠다. 큼직큼직한 디딤돌을 재미있게 딛고 강의 중심에 이르렀다. 며칠 전 비가 내렸다고 강물은 넉넉한 품세로 흘러가고 있었다. 대표에세이 동인들과 ‘흐르는 것이 물뿐이
1. 영화 ‘왓 위민 원트’는 할리우드가 허용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최대치가 아닐까. 주인공인 멜 깁슨은 여자를 아주 우습게 아는 남성우월주의자인데, 새로 온 여성 상사에게 밀려난다. 어쩌다 초능력이 생겨서 여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초능력으로 승승장구하는데, 자기에게 늘 쌀쌀맞게 굴던 식당 종업원을 홀려 하룻밤을 보내기도 한다. 꿈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뒤로 연락도 않던 퇴근길, 그에게 바람맞았다고 생각한 마리사 토메이가 길을 막아서고 묻는다. 너 게이지? 게이가 아니라면 그렇게 멋진 밤을 보내고 어떻게 이렇게 연락 두절하고 잠수 탈 수 있어? 게이 맞지? 그녀의 마음을 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멜 깁슨은 그렇다, 나는 게이라고 말한다. 여자 마음을 읽게 된 뒤로 그가 변했다는 유쾌한 증거로 웃어넘기면 그만이다만, 사실 양성평등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변혁은 가진 자의 자각과 양보로 이뤄진 적이 없다. 변화는 언제나 제도가 바뀌고, 법으로 보장되며, 지키지 않으면 처벌당하는 강제 규정이 마련된 뒤에야 더디게 온다. 2. 코로나 시국 이후로 우리나라가 알고 보니 세계적인 모범국가이고 선진국이더란 보도가 잇따른다. 아닌…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철따라 고운 옷 갈아 입는 산/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 20여년전 처음 금강산을 방문했을 때 노래가사의 의미가 그렇게 적확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 철따라 금강, 봉래, 풍악, 개골산이라 불리어지는 의미를 만끽했던 그 추억들을 그리며 이제 내 가족 친구들과 함께 소풍가길 소망하며 그 가능한 방안을 생각해 본다. 단순하게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포기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UN 안보리와 미국의 제재가 지속되어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탓이라는 생각은 너무 유치한 생각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의 근본 국익을 평가하고 우리의 역할과 나아갈 방향을 생각한다면 북한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재개가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먼저 당사자인 우리와 북한의 국익을 생각해 보자. 북한의 속내는 이제까지의 북미, 남북협상내용과 그들의 주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체제와 정권의 확실한 담보가 없는 한 먼저 핵포기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일관된 주장이다. 2018년의 북미 싱가포르공동선언만 실질적으로 행동에 옮긴다면
인류 사회의 진보와 향상을 위한 진지한 첫걸음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 주된 원인으로서 신앙의 역할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가르침은 사회의 개선에 언제나 무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가르침이 훌륭한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방식에는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훔친 불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니)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고 건강한 사회 기구를 위한 첫걸음은 언제나, 땅에 대한 당연하고 평등하며 빼앗을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럼으로써 그 밖의 모든 것이 한결 수월해진다. 그 보장이 없는 한 다른 모든 것은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헨리 조지) 사회는 공통의 신앙과 공통의 목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적인 활동은 종교에 의해서 성립된 원칙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마치니)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다. 어쩌면 “옛 성인들에게서 배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상은 격변하여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국제관계와 국제질서는 ‘국가’를 전제로 하여 상호 대결적인 배타적 개념의 틀 안에서 전개되어 왔다. ‘국가안보’는 물리적 국방력을 가장 중시하는 ‘군사안보’ 위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인류가 공멸하게 될 수도 있을 유례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안보 문제는 국가주의적 개념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류의 존립과 평화를 위한 개념으로 새롭게 정의 정립되어야 할 시대가 되었다. ‘국가안보’라는 개념이 자국의 이익 보호 및 확대만을 위한 이기적 테두리를 벗어나 인류 안보, 지구촌 안보라는 ‘신흥안보’로 대안적인 개념으로 전환돼야 할 때가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창발로 인해서 변환을 겪고 있는 세상의 복합적인 양상을 염두에 둘 때, 아직 한창 벌어지고 있는 현상 임에도, 코로나19의 세상을 보는 이론적 분석을 보면, 코로나19는 ‘신흥안보’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흥안보’로 보는 코로나19사태는 ‘지정학의 임계점’을 넘어서 창발하는 복잡계의 위험이다.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단순한 개인건강의 문제이겠지만, 이것이 양적으로 늘어나서 일정한 임계점
‘비판언론’이라는 신화가 있다. 정치권력 비판이라는 언론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주로 조선일보가 이런 주장을 해왔는데, 요즘에는 진보언론의 젊은 기자들까지 물이 들은 것 같다. 언론학자들도 언론의 자유를 절대적 권리로 신봉하는 편협함으로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비판언론이라는 신화는 허구다. 저널리즘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최근까지 저널리즘은 신문이 주도해왔다. 포털과 종편에서 그 영향력을 이어가고 있는 대한민국 주류신문의 정체성은 비판언론이 아니라 정파신문이다. 지독한 정파성을 은폐하기 위해 비판언론이라는 신화를 앞세워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본분은 맹목적인 비판이 아니라 시시비비의 정신으로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근대의 언론은 봉건체제의 말기에 상업적 목적으로 대두되었다. 토지가 재산이요 권력이던 봉건사회에서 화폐가 재산이요 권력인 사회로 이행한 후 화폐는 자본이 되었다. 자본의 세력이 극대화되었을 때 혁명이 수반되었고, 신문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신문의 비판 대상은 봉건지배세력이었다. 신문은 자산가들에게 비판의 무기였다. 자본주의 사회가 정착되어가면서 신문은 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상업주의 저널리즘으로서의 성격을 형성해왔
수상한 이메일이 날아왔다. 수신인은 ‘소혹성 B612에 사는 어린왕자’였고, 발신인은 ‘지구별을 여행하는 늙은 왕’이었다. 어떻게 이 수상한 메일이 ‘소혹성 B612에 사는 어린왕자’에게 가지 않고, 내 메일함으로 날아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스팸메일로 신고를 하였지만, 어느 곳에서도 사건접수를 해주지 않아 신문을 통해 수상한 이메일의 원문을 공개한다. - 지구별 여행 108일째.(흐림, 미세먼지 때문이라는데 그게 뭔지 모름) 어린왕자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려줬다는 인간(비행기 조종사)은 오늘도 찾지 못했다. 네가 그려준 얼굴 그림이 있지만, 마스크란 것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살아서 인간의 얼굴은 구별하기가 힘들구나. 도움이 될까 싶어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보다가 지구별에 사는 무서운 동물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름을 대자면, 호랑이, 사자, 곰, 악어, 뱀, 상어 같은 것들이다. 그 동물들이 사는 곳에서 해마다 몇 명의 인간이 목숨을 잃는지 숫자를 알려주며, 그 지역을 여행할 때는 각별히 주의하라는 말도 하더구나. 어린왕자야. 혹시 너에게 그림을 그려준 인간도 동물들에게 잡아먹히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서둘러 찾아 나섰단다. 못된 동물들을 벌주기…
현대과학의 가장 큰 해악은, 어차피 ‘모든 것’을 연구하지는 못하고 종교의 도움 없이는 ‘무엇을 연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올바르지 않은 생활을 보내고 있는 과학자가, 자신에게 ‘좋고 필요한 것’만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공허한 지식욕의 만족이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유리한 현재의 체제이다.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예지는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예지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이 가장 필요한 지식이고 어떠한 것이 덜 중요한 지식임을 아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은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가, 즉 어떻게 해야 악을 적게 행하고 선을 많이 행하며 살 수 있는가에 관한 지식이다. 현대인들은 필요 없는 온갖 학문은 연구하면서, 정작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무엇이 가장 큰 불손일까? 우리 인간이 모르는 것은 신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깔뱅) 지식이 적은 사람은 말이 많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대개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흔히 지식이 적은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
지난 40여 년간 일본의 최고액권 지폐인 일만엔권의 초상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일본의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서양문명의 도입을 선도한 후쿠자와 유키치를 일본인들은 지금도 근대화의 아버지로 숭앙한다. ‘하늘은 사람 위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그의 저술 '학문의 권장'의 첫 문장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70년대에 발표한 이 책이 22만 부가 팔렸다고 주장했다. 인쇄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학문의 권장'이 실제 그만큼 팔렸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일본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할복자살도 마다하지 않는 사무라이 문화를 향해 통렬한 비판의 포문을 연 것도 그였다. 정부가 국민에게 베푸는 시혜는 정부가 해야 할 당연한 책임이므로 국민이 고마워하며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일격을 가한 것도 그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조선을 평하자면 문자를 아는 야만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개혁 방법을 논하면서 일본의 선례를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무력을 보여주며 그들의 개화와 진보를 독촉했는데도 따르지 않으면 다음에는 채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