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 자기 무덤에 묘비명에 새길 글이라든가 세평(世評)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전부터 가훈, 급훈, 교훈이나 인간 개개인의 좌우명이 있다. 가훈, 급훈, 교훈 등은 실제로 피부에 닿지 않으므로 공허한 표현들이다. 개인의 좌우명은 인생을 겪으면서 가슴에서 생성된 길잡이 역할을 했던 글귀이므로 공감이 가고 외우고 가슴에 간직하고 싶은 내용이 되겠다. 나는 좌우명이라 할 것도 없지만 마음에 새기는 말은 “베풀지는 못할지라도 빚은 지지 말고 살자”이다. 나잇값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하다가 한 달에 만 원이면 학생 일곱 명의 한 달 학비가 된다고 하여 기부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도 6년제라면 14명 정도는 초등학교를 졸업했겠다. 되돌아보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받은 만큼 갚지도 못하니 이 또한 빚이고, 미국에서 프리웨이에서 보닛이 뒤집혀 좁은 갓길에 겨우 차를 정차하자 수많은 차가 서행하므로 체증이 시작됐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보다는 당장 저 많은 사람들한테 누를 끼치므로 빚을 졌다는 생각에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요즘 LH 불법투기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고 자살하는 모양을 보며 자신
프랑스 하원이 건국이념 조항인 헌법 1조에 "공화국은 생물다양성과 환경보전을 보장하고, 기후변화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인류사회 전체가 직면한 시대적 요청을 명문화할 것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상원을 통과하면, 마크롱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확정하게 된다. 역시 프랑스답다. 이는 "프랑스는 '슬로우 푸드(slow food), 슬로우 라이프( slow life)'를 구가하는 나라가 되겠다", 는 천명이다. 실로 감동적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스 대혁명(1789~1799)의 기치와 가치가 이 품격 선언의 뿌리다. 역사적 사건들은 우연 같지만 예외 없이 필연이다. 과거는 현재의, 오늘은 내일의 원인이다.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했지만, 3년 후 '슬로우 푸드(slow food) 선언'이 파리에서 채택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 전세계 180개국에서 10만명 넘게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그 선언문의 일부다. "산업혁명으로 최초로 기계가 발명되었다. 기계는 오늘날 우리 생활의 모델이 되었다. 우리는 속도의 노예가 되었다. 기계는 우리의 소중한 관습을 망가뜨린다. 사생활을 침해하고 식사시간을 줄여서 일하도록 '패스트 푸드'(f
당분간, 이라는 말의 쓸쓸함이 쓸쓸함의 지도를 펼치네 어느 봄날 보고 싶은 쓸쓸함이, 죽은 시계를 보는 쓸쓸함이, 벽만 바라보는 쓸쓸함이, 내 시를 생각하는 쓸쓸함이, 이름도 모르는 약을 매일 삼키는 쓸쓸함이, 쓸쓸함을 만끽한 어느 시인의 쓸쓸한 죽음이, 푸릇한 가시를 거느리고 우르르 떠내려 오네 밟으면 추락하는 껍질 같은 오늘이 어제의 쓸쓸함과 내일의 쓸쓸함 사이에 있네 약력 ▶충남 논산 출생 ▶'미네르바'(2004)로 등단 ▶시집 '오답으로 출렁이는 저 무성함', '빛의 뿌리' ,'동박을 뒤적이다 외 미네르바문학상, 서정주문학상
“연천군 중면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인근에는 그간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오랜만에 평온함이 감돌았다. 마을에는 주민들이 따뜻한 봄의 온기를 느끼며 여유롭게 담소를 나눴으며, 농부들은 추수를 대비한 농사짓기가 한창이었다.”(본보 22일자 1면) 이지은 기자·박환식 수습기자의 르포 기사 ‘대북전단금지..선물처럼 온 평화’를 읽으며 모처럼 가슴이 따듯해졌다. 민통선은 늘 긴장감으로 팽팽한 지역이다. 특히 이맘때면 연천에 보수·탈북단체 등의 대북전단 살포가 이뤄져 접경지역 주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전단 살포 때마다 민통선의 출입이 통제돼 생계 수단인 농작물을 방치해야 했던 농민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관광객도 감소했다. 한 주민은 북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일반적으로 관광객의 60~70%가 발길을 끊었다고 말했다. “지난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힘들었는데, 대북전단 살포 등이 이어지면서 더욱 고된 한 해였다”는 그의 말에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주민들은 대북전단 살포 강행을 반대하는 집회를 하거나 직접 저지에 나서는 등 탈북자단체들과 대립했다. 이들은 안전과 생계 피해를 호소하며 대북전단 살포를 막
"진보를 자신의 특허품인 양 떠드는 진보 꼰대나 상식조차 지키지 않는 수구 꼰대나 거기서 거기 같아요." 한동안 20대들하고 책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계급장'을 떼고 매번 수평적으로 토론을 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속내가 드러났다. 여론조사나 경제통계 수치 등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20대들의 감성을 들여다본 것이다. "우리는 알바족이잖아요. 술집이나 음식점, 편의점, 백화점 등에서 생활비를 벌기위해 감정 노동을 하죠. 기성세대들에 대한 이미지는 그들과 부딪혀서 생긴 감정의 결과물이죠." 재일 동포 철학자 강상중 전 도쿄대 교수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사계절)에서 인간의 이성은 변화가 가능하지만 감성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보통 관념과 정반대 사유다. 감성을 인간 이해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일테면 20대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진보든 수구든 하나의 달걀 꾸러미에 넣어 계열화해서 자신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분류한다. 이처럼 감성의 성은 생각보다 크고 견고하다. 이제 여론조사 분석이 가능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벌이는 정치…
내가 살던 곳은 지방의 소도시였다. 요즘 같은 봄날, 주택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아직 모내기를 하지 않은 논과 모종을 심지 않은 밭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마땅한 놀이감이 없던 국민학교 아이들은 무작정 들판에서 뛰어 놀았다. 깡통 안에 돌을 넣어 주둥이를 틀어막으면 훌륭한 놀이감이 되었다. 깡통차기에 지치면 논두렁에 나란히 앉아 들판을 바라보며 숨을 돌렸다. 들판 저 멀리에서 겨울에는 볼 수 없었던 구불구불한 무언가가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지랑이는 태양의 복사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간 지표면의 공기와 그 위쪽의 차가운 공기가 대류 현상을 일으키면서 햇빛의 굴절에 의해 아른거리게 보이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에 대한 원리를 전혀 이해 할 수 없었기에 그저 신기하게 바라만 보았을 뿐이었다. 중학생이 될 무렵에는 아지랑이가 더 이상 신기한 현상이 아니었다. 과학적 원리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매년 봄이면 당연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지랑이를 당연히 보기는 매우 힘들어졌다. 많은 봄날이 미세먼지와 황사로 인해 하늘은 뿌옇고, 맑은 햇살은 아주 드물게 땅에 내려앉는다. 도시에서 살고 있
'계산 도와 드릴께요' 내가 계산하는데 뭘 도와주나? 팔이 아파 찾아간 병원에서 간호사 하는 말. 진료실 앞에 잠시 앉아 계실께요. 뭔말 인지 모를 존대 받다 보면 참 뜨악하다. '주문한 상품 나오셨습니다' 내가 아니라 상품이 존대를 받는다. 자본주의가 맞구나. 이게 아니다 싶어 한마디 하면 집사람이 꼰대 같이 굴지 말랜다. 아, 국어 잘하면 꼰대가 되는구나. 글로 먹고사는 신문을 봐도 맞춤법 틀리고 문맥 어색한 기사가 자주 보인다. 그래도 신문기사는 양호하다. 방송프로그램을 보면 CJENM 과 종편은그렇다쳐도지상파방송에도 맞춤법이 틀리고 듣도보도 못한 해괴한 표현이 자주 보인다. 유튜브는 말할 나위도 없다. 심하게 표현해서유튜브영상은 자막이 안틀리고 종료되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유는 극명하다. 만드는 사람의 국어사용 능력 미흡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 결여다. 영상과 아이템에 집중하다보니 보조적 전달수단인 자막의 중요성이 무시되는 것이다. 방송언어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한 뉴스를 빼고 나면 크게 드라마의 대사와 예능의 출연자 토크, 자막으로 압축된다. 드라마의 비인격적 표현과 비속어는 그래도 봐줄만하다. 예능은 심해도 너무 심하다. 맞춤법 틀린 자막이나
“어떻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현자는 대답했다. “해를 보는데 과연 등불이 필요할까?” (아라비아 잠언) 신을 알고 있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들이다. 오만한 사람과 어설프게 현명한 사람들만이 신을 모른다. (파스칼) 아무리 신을 믿고 있어도, 가끔 그 존재를 의심하는 순간에 부딪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의 순간은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신에 대한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이해로 이끌어준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신은 완전히 진부해져버려서, 이젠 신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가 진정으로 신을 믿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때뿐이며, 신은 우리가 온 마음으로 구하면 그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무한하다. 어떤 사물이든 가까이 가보면 잘 알 수 있듯, 신을 아는 것도 신에게 가까이 갔을 때뿐이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오직 선행에 의해서만, 즉 신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을 잘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기꺼이 신의 뜻을 실천한다. 그리고 신의 뜻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