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도내 정계를 비롯해 관가, 시민단체 등에서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면서 깊은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이들은 안타깝고 비통한 마음을 비추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한 고인의 업적과 뜻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 정가, “깊은 존경과 애도” 경기도의회 진종설 의장은 18일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의 중심에 있었고 이를 이뤄낸 대표적 인물”이라며 “도의회는 애도의 표시로 현수막을 준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경기도당은 추모논평을 통해 “누구보다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해 온 인물”이라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국민화합과 남북의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민주당 경기도당 박기춘 위원장도 유가족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평화의 상징으로 영속한 삶의 면모를 보여줬던 김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갈 것”을 결의했다. 민주노동당 경기도당은 “노무현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현대 한국정치사에 거대한 족적을 아로새겼다. 4차례 대선 출마와 6선 국회의원 등 현실정치인의 길을 얻으면서 갖게 된 무수한 기록 외에도 해방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남북정상회담, 노벨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에 평생을 보내며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를 세웠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정치사적 업적은 1997년 대선에서 당시 집권당이었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으면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으로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것이다. 선거를 통한 여야간 정권교체는 대한민국 민주화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사건이었다. 지난 60년대 산업화 이후 40년 가까이 한국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기득권층의 완고한 저항을 평화적으로 극복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정당사, 특히 야당사에 다른 정치인과 비교할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보수냐 진보냐’는 정체성이 아닌 지역정서에 기반했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아직도 야당은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남긴 최대의 오점은 87년 대선 불출마 공약 번복과 야권 후보단일화 실패였다. 김 전 대통령은 87년 &lsquo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통일을 향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신 때부터 ‘빨갱이’로 몰려 수차례 고초를 겪었지만 3단계 통일론과 대북 포용 정책의 확고한 신념을 꺾지 않고 마침내 남북 화해협력 시대를 여는 등 통일운동에 평생을 투신했다. 1954년 정치권에 입문한 그는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로 나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어 석패한다. 이때부터 그의 정치역정은 가시밭길이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색깔론과 사상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대선에서 혼쭐이 난 박 정권이 그를 최대 정적으로 지목, 정치적 탄압을 본격화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용공 시비가 항상 뒤따라 다녔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통일정책은 1970년대 야당지도자 때부터 주장해온 ‘남북연합→연방제→통일국가’를 골자로 하는 3단계 통일론으로 압축된다. 남북정상회의를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남북연합을 첫 단계로, 한반도 평화분위기가 성숙하면 연방제를 만든 뒤 통일국가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그의 통일론이 빛을 발한 것은 대통령에 취임한 1998년 이후였다. 당선 직후 북한의 도발 불용 등 대북 3원칙을 천명하면서 햇볕정책을 과감하
민주당은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고 “당신은 진정한 이 시대의 위대한 스승이셨다”면서 “비통하고 원통하다”고 애도했다. 노영민 대변인은 이날 긴급 논평을 통해 “서슬퍼런 독재의 서슬에 굴하지 않았고 경제 파탄도 거뜬히 넘어오신 당신, 반세기 갈라진 채 원수로 살아온 민족이 한 동포임을 알게 해 준 당신을 보낼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다”면서 “아직도 국민들은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대변인은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은 슬픔이 아직도 크기만 한데 당신마저 가시다니 2009년은 잔인한 한 해”라며 “편안히 가시라”고 조의를 표했다. 이어 민주당은 장외투쟁 등 외부 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긴급 최고위원회를 소집했다. 당 핵심 관계자는 “장외투쟁 참석을 위해 경북 포항에 내려간 정세균 대표 등 당 지도부가 급거 상경하는 중”이라며 “일단 이미경 사무총장 주재로 당사에서 최고위원 회의를 열어 향후 대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한나라당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며 애도를 표했다. 윤상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김 전 대통령께서는 일생 민주화와 인권,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오
50년 정치인생을 마감하고 서거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궤적에는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이 수놓아져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때로는 치밀한 논리로, 현안의 핵심을 찌르는 표현으로, 때로는 화려한 수사로 좌중을 압도한 달변가이자 뛰어난 대중연설가였다. 군사정권 시절 그가 남긴 말들은 쉽사리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옥중서신’ 등을 통해 재야 및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갔다. 이후 사면·복권으로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 87년 이후 쏟아진 거침없는 발언들은 그를 지탱해준 최대의 정치적 무기였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처럼 멀리 봐야 한다” 등은 그가 생전에 즐겨 쓰던 문구들이다. “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도 같다”는 표현은 그가 몸담았던 한국 현대 정치사의 역동성을 대변하며 지금까지도 정치권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주요 어록> ▲“3선 개헌은 이 나라 민주국가를 완전히 1인독재 국가로 만들어 국체를 변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 좌익독재뿐 아니라 우익독재도 똑같다”(69년 7월19일 효창운동장서 열린 `3선개헌 반대 시국대강연회에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18일 낮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은 침통한 표정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날 오후 2시쯤 수원역 대형 TV앞에는 갑자기 날아든 비보에 20~30여명의 시민들은 충격속에서 비통함을 감추지 못한 모습이 역력했다. 회사원 김모(38·인천 연수동)씨는 “역대 대통령 중에서 민주화 발전에 가장 기여하고 서민정책을 펼치신 분이며 남북평화를 위해 이정도까지 이뤄내시고 가장 애쓰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서거해 애통하다. 2009년은 정말 안좋은 해로 기억될 것 같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부동산을 운영하는 김모(57·조원동)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해 개인적으로 상당히 충격적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하신 위대한 분을 잃게 되어 대한민국의 큰 슬픔이라고 생각한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회사인 변모(29)씨도 “아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여신 분으로 생각한다”며 “최근들여 현…
후광(後廣)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그가 헤쳐나간 반세기 정치역정에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인동초(人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가 놓지 못했던 남북화해라는 화두는 미완의 유업으로 남았다. ▲ 섬소년에서 정치인의 길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앞바다에 솟아있는 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해 준 덕분으로 목포로 유학,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탈퇴했다. 그러나 건준에 몸을 담은 이력은 그를 평생 ‘색깔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 멍에였다. 그는 한국전쟁 중 우익반동이란 이유로 공산당에 붙잡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차례 사선을 넘나들면서 육체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말년에는 정기적으로 신장 혈액 투석을 받고 입원을 반복하는 등 고통을 겪었지만 꾸준히 대외 활동을 벌이는 등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강한 ‘인동초’였다. 그가 처음 육신의 고통을 짊어지게 된 사건은 1971년 5월24일 벌어진 의문의 교통사고였다. 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전남 무안에서 지원유세를 하던 중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살해 기도 의혹이 일었던 이 사고로 그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왼쪽 다리에 고관절 장애를 입고 여생을 불편한 다리로 지내야 했다. 유신 이래 5년반의 투옥, 3년여의 망명, 6년반의 가택연금으로 신체의 자유마저 온전히 누릴 수 없었던 그는 80년 5.17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에 의해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네번째 도전만에 대선에 승리, 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2년 4월 과로와 위장장애 등으로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입원해 국민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2003년엔 관상동맥 확장시술을 받았고 이후 주기적으로 매주 세차례씩 신장 혈액 투석을 받아 왔다. 또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떠
남한산성 싱그러운 자연을 품은 학교 살아 숨쉬는 ‘생생교육’ “공교육에 대한 교사의 열정에 학생과 학부모가 반한 학교” 남한산초등학교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 도립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어 역사적·자연적·지리적 학습 환경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삶의 배움과 나눔이 있는 행복한 학교다. 이 학교는 지난 1912년 개교했고, 해공 신익희 선생의 모교로도 유명한 학교다. 그러나 지난 2000년엔 재학생이 26명에 불과해 폐교 위기까지 처했으나 학교구성원들과 지역주민 및 시민단체가 합심해 학교 살리기에 앞장선 결과, 올해 8월 현재 6학급에 154명(1학년 25명, 2학년 23명, 3학년 24명, 4학년 26명, 5학년 29명, 6학년 27명)의 학생과 교직원 15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즐거운 배움을 중심으로 ‘삶의 배움과 나눔이 있는 행복한 학교’, ‘학생 개개인이 학교 생활에서 놀이와 학습이 함께있는 학교’로 교육적 이상을 구현하고 있다. 특히 이 학교에선 학생의 적성과 소질, 생각과 느낌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교육환경 조성 및 교사들이 자기
“道 기능 유지하는 행정구역 개편 절충안 필요” “도의 기능은 유지하면서 현행 16개 광역 자치단체를 8~9개로 통합해 절충하는 방안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이뤄져야 합니다” 민주당 경기도당을 1년간 이끌어 온 박기춘 민주당 경기도당위원장(남양주을·54·사진)은 최근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는 행정구역 개편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박 위원장은 지방행정체제 개편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는 등 행정제도 분야의 전문가로 꼽히고 있는 인물이다.박 위원장은 “모든 통합에는 반대의견이 있기 마련이다. 강압적이나 일방적으로 이뤄지면 후유증 또한 커질 수 밖에 없다”면서 “특히 경기도의 경우 도시와 농촌지역이 혼재된 복잡한 지역이기 때문에 통합 시 더욱 신중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도민의 곁에 믿음직한 민주당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진정성이 다가올 지방선거의 최선의 선거전략이라는 박 위원장으로부터 경기도당 위원장으로서의 정치권의 현안과 앞으로의 과제, 현 정부 정책의 대한 견해 등을 들어본다. -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행정구역 개편을 제안한 것과 관련, 야당 일부에서는 정부 여당의 정치적으로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카드라는 의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