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낭만파 음악의 거장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사랑에 눈이 멀어 살인자가 될 뻔했다. 약혼녀 마리 모케(Marie Moke)와 피아노 제조업자 카미유 플레옐의 염문설이 돌자 이들을 죽이려 했다. 꿈에 그리던 로마상. 다섯 번의 도전 끝에 결국 쟁취했다. 로마의 빌라 메디시스에 도착한 그. 낯선 곳에서 마리-모케의 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안달이 난 베를리오즈. 그때 마침 장모가 될 ‘하마’로부터 편지가 왔다. 마리와의 파혼을 알리며 그녀가 피아노 회사 플레엘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절망에 빠진 베를리오즈. 곧 분노로 치달아 살인극을 꿈꿨다. 1803년 12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라코트생탕드레(La Cote-Saint-Andre)에서 태어난 그. 아버지 루이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에서 내놓으라하는 의사였다. 루이는 아들이 자기와 같은 길을 가길 바랐다. 엑토르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 채 파리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수술실에서 실습 도중 냅다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수술실 한 귀퉁이서 쥐들이 모여 사람 척수를 정신없이 갉아먹고 있는 장면을 보고 구역질이 났기…
‘우리’는 모호합니다. 꼼꼼히 따져볼수록 복잡합니다. ‘나’와 ‘너’처럼 절대적일 수 없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수학교과서에 등장하는 집합 같다고나 할까요. 교집합이거나 합집합일 수 있는, 그러니까 ‘A∩B’ 혹은 ‘A∪B’인 것이 ‘우리’입니다. 겹쳐진 두 개의 동그라미에 표시된 빗금일 수도 있고, 중괄호 속에 나열된 원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숫자나 기호로 표시된 ‘우리’는 생명이 없어서 어떻게 묶여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정작 쓰리고 아린 ‘우리’는 사람 사는 영역에 있습니다. SKY이든 강남이든 연봉이든 무엇이든, 끼리끼리 교집합으로 묶인 ‘우리’ 속에서 차별과 박탈의 상처가 자라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호령하던 ‘우리’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패거리였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서 계급장에 붙일 수도 있는 그들에게 불가능이란 없었습니다. 남진이 부른 노래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복집을’ 짓는 사건도 저질렀습니다. 시절은 바뀌었지만 세상을 주무르는 ‘우리’는 여전합니다. 여전한 힘과 권력의 ‘우리’는 여의도와 SKY에만 있지 않습니다. 눈에 도
얼마 전 북한무인기 침투 관련한 TV토론을 본 적이 있다. 참여한 국회의원들의 논쟁을 보면서 아쉬움을 크게 느꼈었다. 한편은 우리의 송골매 무인기 북한 침투는 비례성의 원칙에 입각한 단호한 조치이고 나아가 UN헌장 상의 자위권까지 언급하며 북한의 무모한 도발행위를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은 우리의 지나친 대응과 북한의 또 다른 도발, 우리의 맞대응, 한반도 불안이 가속화되는 상황을 염려한다. 특히 대통령의 백배 천배의 보복 등 강성 발언은 대통령의 언어가 아니라는 지적 등 나름의 평가를 내놓았다. 그런데 왜 북한이 그런 무모한 행동을 자행했는가에 대한 분석, 특히 지난해의 수십 회의 미사일 발사 도발에 이어 우리 영역에 직접 무인기를 침투시킨 근본 이유에 대한 토론은 전무했다. 또한 정부 일각에서는 나타난 현상만을 가지고 북한의 행태를 비난하며 2018년 9·19 군사합의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대담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명의(名醫)는 병의 근본 원인에 대한 진단과 그에 따른 처방, 특히 원인 제거를 위한 대처방안을 강조한다. 2020년 6월의 개성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지속적으로 대남 강경 모드를 이끌어 가는 북한의 행태에 대한 근본 처방이 시급한…
신년사에서 윤대통령은 노동, 연금, 교육개혁을 정권과제로 삼았다. 화물연대 파업철회에 따른 자신감인지 노동개혁을 우선과제로 꼽았다. 노동, 연금개혁은 절실하다. 어느 정부도 해내지 못한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다. 민노총, 한노총엔 113만,115만 명의 조합원이 가입, 국민의 4%가 조금 넘는다. 현재 민노총이 주도하는 강경파업은 기득권 노동자의 이기심으로 비칠 때가 많다. 보수층은 물론이고 중도적 국민도 동의 못하는 경우가 많고 민주당 지지층도 상당수 반감을 보인다. 국민들로부터 유리된 노동쟁의다. 세부정책이 나와야 판단하겠지만 정부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보상체계 등의 개편을 통하여 개혁을 하겠단다. 현재 노동시장은 이분화되어 대기업, 공공부문이 주도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기업과 하청기업의 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임금체계가 우월한 대기업과 안정성이 뛰어난 공공부문에서 일어나는 파업의 경우 그들의 주장에 동의 못하는 경우가 꽤 많다. 강경파업에 민주당 정부에서도 긍정적이진 않았다. 대우차 노동운동가 출신 홍영표의원은 민노총에 대해 폭력적이고 대화가 안 된다, 임종석실장은 민노총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고 말했다. 상대적
이해영 감독의 야심작 ‘유령’이 비교적 개봉 초기부터 꺾어진 데는 사람들이 가능한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칭찬이든 욕이든 영화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노이즈 마케팅도 처음엔 도움이 된다. 영화가 안된 것을 보니 그 어느 쪽도 아니었던 셈이다.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는 영화가 비교적 졸작이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가 않고 그보다는 뭐랄까, 지나치게 젠 체를 한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을 줬다. 이 영화는 독립운동 얘기다. 그중에서도 테러리스트들의 얘기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얘기다. 이런 영화는 사람들이 쉽게 미워하지 못한다. 근데 뭐랄까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약간 혀를 차게 하는 느낌이다. 영화 속 테러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너무 멋이 들렸다고 해야 하나, 역사적 사명감의 스노비즘 같은 것, 그 이상한 속물성 때문이다.(이준익 감독이 제작했던 2000년도 영화 ‘아나키스트’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실패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을 갱스터 영화처럼 꾸민 것은 영화가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해영 감독은 1930년대를 유희의 공간처럼 여겨지게 끔 찍었는데 그
나는 지난 해, 선생의 부음기사를 접하고 묵념의 예를 올렸다. 한국어로 번역출판된 선생의 저서가 수십 권이다. 나는 '인덕경'(人德經)을 가장 좋아한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에는 젊은이들에게 '이나모리즘' 강의도 많이 했다. 사숙(私淑)한 건 15년쯤 된다. 열두 살에 결핵으로 죽다 살았다. 그 다음 해에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집이 전소되는 재난을 당한다. 중학교 입시에서 두번 낙방했다. 대학도 오사카 의대에 떨어져서 가고시마 공대에 들어갔다. 취직시험도 모두 실패했다. 소년기 청년기의 선생은 평범 그 자체였다. 27세(1959년)에 교토 세라믹을 창업했다. 지역유지 부부가 집을 담보 잡혀서 300만엔의 자본금을 지원한 덕분이었다. 그후 2022년까지 63년 동안, 세상은 선생의 삶에 감동하는 관객이었다. 근대화 이후, 문명사회는 전통적으로 중시되었던 가치와 도덕률을 팽개쳤다. 개인 기업 국가, 이 모두가 탐진치 삼독의 갑옷을 입고 약육강식 정글의 전사로 종횡무진한다. 그 압도적 대세 앞에서, 선생은 철학을 강조하는 경영자의 길을 택했다. 희귀한 일이었다. 사방은 온통 적대적인 강자들의 세상이었다. "고난은 자기도야를 위한 절호의 기회다", "새로운 도전의 결
요새 정치판을 보면, 여야를 막론하고 온통 난리다. 여당은 전당대회를 앞둔 시점에서, 나경원 전 원내대표를 둘러싸고 친윤과 비윤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고, 야당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로 곤혹스러운 환경에 처해있다. 특히 민주당의 상황이 더 어려워 보이는데 그 이유는, 검찰이 성남 FC 문제와 관련해 이 대표를 소환한 데 이어, 15일 다시금 이재명 대표 소환을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로만 보면, 이 대표가 검찰 소환에 다시 응할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지난번 신년 기자회견 당시, 이재명 대표가 “검찰의 (소환 등) 요구들은 매우 부당하고 옳지 않은 처사다. 검찰이 그야말로 권력의 하수인이 돼서 정치를 하고 있다”라고 언급한 것으로 봐서는, 이번 검찰 소환에는 응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 대표가 검찰 소환에 응하느냐 마느냐는 문제 보다, 검찰이 이 대표에 대한 영장을 청구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부분에 관심이 더 모아질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할 경우, 민주당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방탄 소리를 듣는 판국에, 이 대표를 위한 방탄에 다시금…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사업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신이 우리를 통해 이룩할 사업의 전모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지혜의 법칙을 아는 자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보다 못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실천하는 자보다 못하다. (중국 잠언) 나는 괴롭다. 나는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내가 신을 섬겨야 하는 것이지 신이 나를 섬겨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를 깨닫는다면 괴로움은 절로 가벼워질 것이다. 이 지상과 천상 사이에 심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주거가 영원히 악과 이기주의와 압박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상은 단순한 속죄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곳이다. 그 진리와 정의에 대한 갈망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 (주세페 마치니) 인생의 목적을 단순히 일신상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견디기 어려운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색에 의하여 얻어진 것만이 참된 지식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진정한 인식은 시작된다. 어떤 것을 인식하려고 할 때, 그것과 자신의 관계가 학자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발짝도 그 인식에 다가갈 수가 없다. 어떤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백지의 상태에서 거기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로) 책에서 읽은 사상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을 내쫓는 것은, 세익스피어가 당시의 여행자를 비난하여 말했듯이, 남의 땅이 보고 싶어서 자신의 땅을 팔아치우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항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남이 그것에 대해 쓴 책을 읽는 것도 유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타인의 견해와 타인의 태도가 그 사람의 머리속에 끼어들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에게는, 나태하고 무관심해서 스스로 노력하여 사색하기보다는 기존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끝내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독자적인 사상을 지닌 학자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쇼펜하우어) 사람의 두뇌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너무 많이 배우는 것보다는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서 ‘2차 가해’ 문제는 단기간에 드러났다. 국민일보가 낸 “혐오 발전소 댓글창” 기획보도를 보면 이태원 참사 당일부터 열흘 뒤까지 ‘이태원’ 내용이 들어간 기사에 달린 댓글에서 혐오를 포함한 댓글은 58.27%로 절반을 넘었다. 참사 이전 코로나와 대선이 있던 시기조차 비혐오 댓글 비중이 절반을 넘었던 것과 대비된 결과다. 전형적인 사회적 재난을 두고 충격이나 애도 등의 반응보다 혐오 감정이 더 높게 포착된 이유는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경찰을 비난하는 분위기에 주목했다. 경찰의 상황 통제가 실패했었기 때문에 참사를 키웠다는 언론 보도 이후, 경찰에 대한 비판이 당연해졌고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공개 질타가 더해지면서 “모두가 공격하는” 공방의 장으로 나아갔다고 진단했다. 2차 가해는 포털 댓글에만 있지 않았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막말과 폭언을 쏟아낸 일부 단체와 유튜버를 상대로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분향소 앞에서 일부 단체가 대형 현수막과 방송 차량을 두고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자극적이고 모욕적인 비난을 서슴없이 내뱉는 행태를 보였다. 사고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와 아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