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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징검다리 놓는 ‘통신혈관’ 전문의

[Job & Life] KT 동수원지사의 윤승호 과장
어둡고 깊은 땅속, 도시 전체를 휘돌아

 

32년동안 한결같이 외길을 걸어 온 윤승호과장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장을 나서고 있다./장태영기자jty1414@
세상과 징검다리 놓는 ‘통신혈관’ 전문의
어둡고 깊은 땅속. 도시 전체를 휘돌아
감싸는 ‘미세혈관’들. 피가 돌아 심장이 뛰듯,
그 미세혈관들은 사람과 사람, 정보와 정보를 싣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린다.
0.4mm의 구리선, 머리카락보다도 가는
광케이블은 그물망 같이 촘촘하게,
피를 실어 나르는 혈관처럼 뜨겁게
제 역할들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맨홀 뚜껑 아래, 25가지 색깔의 알록달록한
‘구리 혈관’들은 사람의 온기까지,
그리고 그 마음까지도
고스란히 바쁘게 이어주고 있다.

“내가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니까, 1975년도쯤이겠지. 그땐 수원 지역 전체에 전화기가 3천 대 정도밖에 없었어. 누구네 집에 전화가 있는지 머릿속에 줄줄이 꿸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 이후에 전화 들어간 집들 대부분 아마 내 손 안 거친 집은 없을걸.”
지난 30여 년 동안 땅속 ‘혈관’들의 모양을 잡고 길을 닦은 사람. KT 동수원지사의 윤승호(52) 과장은 강산이 세 번 넘게 변하는 동안 오로지 케이블 매설작업에 몸담아 온 사람이다.
수원과 용인, 수지, 영통 등 경기도 일대 지역의 케이블을 정확히 지난 32년 동안 손수 매만져 왔다.
“언젠가 집 앞에서 누가 선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만지니까, 바로 네모난 기계 저 편에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더라고. 이건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었어. 그게 벌써 30년이 넘어가네(웃음).” 원래 ‘손재주’에는 자신 있었던 20살 청년은 그렇게 0.4mm 구리선과의 ‘한 평생’을 시작하게 됐다.
이젠 그냥 길을 걷고 있어도 그의 머릿속에는 실핏줄처럼 얽혀있는 수원지역의 전화 선로나 시설들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땅 아래 묻혀있는 수천 수만 개의 가느다란 통신선 중 한가닥이라도 고장이 나거나 엉뚱한 곳으로 연결되면 전화가 끊기고 인터넷 접속이 어려워지는 만큼 그의 역할은 막중하다. 통신 케이블이 절단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복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거미줄 같은 전산망으로 연결된 행정·금융서비스가 마비될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 만난 윤 과장은 이날 수원시 권선동 근처의 지하철 공사장 현장을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유는 도로굴착 공사를 할 때 정확한 매설 위치와 깊이·방향을 관할구청과 유관기관에 미리 알려 정확하게 확인한 뒤에 작업을 시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근처에 삼성 등 주요 업체나 각종 공공기관들이 밀집돼 있어서 더욱 신경 써서 확인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윤 과장은 설명했다.
KT의 전화가입자가 90년대 중반 2천만을 돌파하기까지. 그리고 광케이블로 유비쿼터스 시대를 꿈꾸는 지금까지. 윤 과장의 머릿속에는 그렇게 30여년 ‘통신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전화기계 값은 둘째 치고, 당시 한 달 전화비가 1만원 정도였으니까 꽤 목돈이었지. 그래도 서로 전화를 놓고 싶어하던 시절이었어.” 그는 회사에 입사했던 70년대 중반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어 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폭증하는 전화수요를 다 따라가지 못해 공설운동장에 모여서 전화 신청자를 대상으로 추첨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구리선 하나가 ‘사람의 목소리와 마음’을 전달하던 시대를 거쳐, 그 선은 또 서서히 새로운 정보들을 나르는 길로 발전했다. 전화선을 이용한 PC통신과 인터넷 시대가 새롭게 열린 것이다. 당시에는 해가 뜨기 전 맨 홀 밑 땅 속으로 들어가, 어스름한 저녁께 작업을 마치는 날도 부지기 수였다.
30년의 세월 중 윤 과장의 기억에 남은 최악의 사고는 지난 91년 안산에서의 사건이다. 모 회사의 신축 공사 현장이 내려앉아 근처 6만여 가입자의 전화선이 함께 현장으로 빨려들어가 매몰됐다. 일주일동안을 꼬박 집에 가지 못하고 현장에서 구리선 하나하나를 복구해야만 했다.
“통신 쪽 일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을 그때 몸으로 절감했어. 평소에 조용하다가도 한번 터지면, 몇 만 명이 들고 일어나니까(웃음). 그리고 그 피해복구와 재건 작업에 수십 배의 공이 들어가니, 평소에 늘 세심하게 관리를 해야하는 일”이라고 윤 과장은 설명했다.
그런 ‘악몽’도 이젠 추억이 됐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구리선의 시대’도 이젠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길가에서 ‘공중전화 박스’를 찾는 것도 어려워졌고, 유선전화보다는 왠지 핸드폰이 더 익숙한 시대가 왔다.
“0.4mm 구리선 하나에 사람 목소리와 마음을 싣고 달릴 수 있게 길을 만든다는 게 큰 자부심이었지. 요즘에야 무선통신이 나날이 발달하고 있지만 구리선을 광케이블이 대신하고 있다”고 윤 과장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최근에는 그간 깔려진 구리선들을 유지·보수하고, 새로운 단지 내에 구리선 대신 광케이블을 매설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맨 홀 뚜껑을 열고, 누군가는 어두운 땅 속으로 들어가서 그 선을 깔아야 뭐든 할 수 있는 건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들 싫어하는 것 같아···” 동수원 지사의 일선 매설작업을 맡고 있는 담당자는 윤 과장과, 그의 동료 이시영 대리 단 둘이다. 두 사람은 무려 이 매설작업에만 ‘20년 파트너’로 일해오고 있다. 이젠 눈빛만 봐도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 “매설작업 외에 내부에서 관련 일을 봐주는 한 친구가 막내인데, 그 친구가 10년 차야. ‘10년차 막내’하고 20년차 대리, 그리고 나.” 말을 마친 그의 웃음이 사뭇 ‘씁쓸해’ 보인다.
사철 작업복을 입고 어두운 땅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만만찮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뜨거운 여름, 작업복과 두꺼운 안전화를 신고 답답한 땅 속에서 ‘열 작업’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난 내가 깔아놓은 선들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전달되기도 하고, 국가사를 결정하는 중대한 자료가 오고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도저히 이 일을 놓을 순 없다”고 윤 과장은 그간의 세월을 요약했다.
오는 2013년이면 윤 과장도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그래도 그는 늘 배우는 일에 열심이다. 통신선로 기능사, 직업훈련교사, 정보통신기술자, 감리원, PC정비사 1급. 수두룩한 자격증들. “구리선이니 광케이블이니 해도, 요즘 고객들 우리들보다 훨씬 전문가지. 그래도 30년 일했는데, 고객보다는 많이 아는 전문가가 돼야 덜 부끄럽지 않겠냐”며 윤 과장은 웃었다.
/유양희기자 y9921@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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