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워하는 모습 가슴 뿌듯 건강 허락하는 한 계속”
그는 남달리 자선공연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가슴 따뜻한 가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통기타 하나로 전국을 돌며 이웃사랑을 가락에 실어 소외계층의 외로움을 보듬는 강용욱(54)씨.
그가 80년대 후반 ‘그대는 나에게’, ‘잎새에 스친 바람’, ‘회한의 눈물’로 공전의 대히트를 친 가수란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 직함은 예총과천지부장.
덥수룩한 머리에 20대 같은 캐주얼한 옷차림이 직함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것도 유별났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편인 그가 16년째 자선공연을 고집하는 배경도 궁금증을 더했다.
남들보다 순탄하달 수 없는 삶을 살아온 강 지부장의 삶의 출발점은 조선대 음대를 중퇴한 72년 성악가 대신 대중가수로 데뷔했다.
그러나 가수를 딴따라로 불리던 시절 이를 마뜩치 않게 생각한 아버지의 반대에 집을 뒤쳐 나왔고 포크, 블루스, 컨트리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고향 다운타운에서 활동했다.
잠시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도 했으나 가수생활을 재개한 80년 5.18 광주사태를 목격했다.
섬세하고 미성이던 노래칼라가 자신도 모르게 한(恨)을 토하는 음색으로 조금씩 바뀐 것도 당시 받은 충격과 무관치 않다.
“89년 첫 앨범에 수록된 ‘그대는 나에게’ 히트와 유명 프로듀서와의 만남으로 스타가 될 기회가 있었으나 ‘번뇌의 몸부림’ 등 부르는 곡마다 반체제란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고 음색도 대중가요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로 차츰 변방으로 밀려났지요.”
생계유지로 밤무대를 전전하던 중 과천에 뿌리를 내려 88년 레스토랑을 운영했으나 빚잔치로 끝나는 또 한번의 좌절을 맛보았다.
가수를 천직으로 생각하던 그에게 생업에 매달린 4년간의 공백은 설 무대마저 없어졌다.
“참으로 막막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딱히 정한 곳 없이 이 곳 저 곳 다니다보니 나보다 더 어렵고 외롭게 사는 이웃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요. 내 발등에 떨어진 불끄기도 바쁜 판에 그런 체험은 하느님의 예시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91년 기타 하나 달랑 들고 성남 달동네 돕기 콘서트를 나선 것이 자선공연의 대행진으로 이어진 신호탄이었다. 수도권은 물론 전국 경로당, 구치소, 고아원 등을 돌았고 선천성 심장병환자 돕기 등 특수목적을 위한 공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작년엔 1백여 명의 예인봉사단을 결성, 에반젤리 지체 장애인 아동합창단 지원과 콜롬비아 불우 어린이 장학사업 공연도 했다.
연예인 동료들도 출연료 한 푼 받지 않고 기꺼이 동참했고 올해 자선공연 150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공연하는 동안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는 그는 “노래 부를 힘이 남아 있는 한 자선공연은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