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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만에 독립운동 유공자 된 정홍택 옹

“나라 되찾는 일 반평생 보람”

 

“나라 없는 설움을 어떻게 말로 다하겠나. 요즘 사람들이야 정부가 잘하니 못하니 하지만 그 시절에는 불만을 털어놓을 나라조차 없었어.”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39년 당시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 입학한 열여덟 정홍택(87) 옹은 일본인 교장의 끝없는 멸시속에서 나라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매일 오전 조회시간마다 한인 학생들에게 ‘대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매질과 구박을 일삼았다.

정 옹은 일제의 만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로지 나라를 되찾는 길 밖에 없다며 한인 동급생인 고(故) 정태윤, 가재연, 고윤희, 김여수와 함께 ‘오륜조’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정 옹은 어렸을 적 이웃사촌이었던 심훈 선생의 가르침대로 인천·경기지역 학교를 돌며 징병반대와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1941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교졸업장을 빼앗길 뻔한 정옹은 어렵사리 서울상업은행에 들어가 낮엔 직장인으로 밤에는 독립운동에 열정을 쏟아냈다.

그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정 옹과 오륜조는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 속에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1943년 징병반대운동의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가지고 전국을 돌던 송대필(당시 일본 명치대학생) 동지가 충청북도 영동경찰서에 붙잡히면서 정 옹의 양손에도 수갑이 채워졌다.

“일본 순사들과 마주쳤을 때 이제 죽겠거니 했지. 차디찬 감방에서 골병이 들어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하나 깜작하지 않는 시절이었거든.”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버텨낸 정 옹은 2년 여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45년 8월17일,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은지 이틀이 지나서야 자유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정 옹은 당시 심훈 선생의 시 ‘그날이 오면’을 빌려 “그날(독립)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라고 광복의 기쁨을 표현했다.

정 옹은 “그 때의 말할 수 없는 그 기쁨과 소중함을 요즘 사람들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며 “나라라는 가장 큰 울타리속에 국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한편 정 옹은 독립운동을 하다 출소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빙 자료가 없어 60여년 동안 국가 유공자로 지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꾸준히 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해온 정 옹은 지난해 2월 꿈에 그리던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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