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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바쳐 싸운 고지전 생생 후손들, 참전용사 기억하길

부모님과 농사 짓던 스무살 청년
전쟁 일어나자 가족들과 고향 떠나
평안남도 송천~마산 걸어서 월남

 

1950년 봄. 이형덕(84) 옹은 평안남도 송천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던 평범한 스무살 청년이었다. 일제시대때 중학교를 졸업한 뒤 농사 및 각종 집안일을 도맡아 할 정도로 착실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6·25전쟁은 이 옹과 가족들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전쟁이 한창인 북에서의 생활은 너무도 위험하다고 판단한 이옹과 가족들은 그해 11월 엄동설한 속에 700㎞을 걸어 남한으로 향했다. 국군선발대가 압록강까지 갔다가 중공군에 의해 후퇴할 때 대열에 합류해 피난길에 오른 것.

 

 

 



▲ 육군 9사단 배치

예상치 못한 월남으로 이 옹과 가족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가장 추운 12월 부산으로 향했고, 이듬해 1월에는 부산에는 숙소가 없어 마산까지 걸어가 정착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1951년 가을. 이 옹에게 입대영장이 나왔다. 이 옹은 숟가락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육군에 입대했다. 곧바로 함께 입소한 신병들과 기초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제주도로 향했다.

신병교육은 기초적인 제식훈련과 정신교육 및 간단한 소총 분해·조립 등의 과정으로 진행됐다.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도 무엇인지 모르는 청춘들은 그렇게 낯선 세계와 첫 대면을 했다.

고된 훈련은 계속됐다. 교관들은 신병들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도록 강도 높은 훈련을 강행했다.

무엇보다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먹을 거라곤 주먹밥 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군복이 지급돼 다행이었죠. 3월 이전에 입소한 신병들은 보급이 아주 형편없었다고 들었어요.”

3개월 후 훈련소 생활에 적응할 무렵, 이 옹은 육군 9사단 28연대 1대대 3중대로 발령 받았다.

당시 9사단 28연대는 최 전방인 철원,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에 속해 있는 400고지(백마고지)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이 무너지면 수도 서울이 적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 400고지(백마고지)를 향해

철원땅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화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깊은 산속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 옹은 철원으로 발령받은 첫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매일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밤낮없이 전투태세 및 경계수행에만 전념했어요.”

어둠이 내린 400고지는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칠흑같이 어두웠다. 중공군은 아군 진지를 향해 장거리 포탄을 쉴 새 없이 발사했다.

“중공군은 특정 목표물 없이 그냥 남쪽을 향해 포탄을 마구 쐈어요. 아마 우리를 긴장시키려고 발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0월 6일 저녁. 사방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중공군은 대공세를 시작했다. 박격포, 직사포 등 각종 화기의 포탄은 9사단을 향해 날아왔다.

야간에 빗줄기 처럼 퍼붓는 포탄에 사방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방어선도 무너졌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총알과 포탄이 어두운 밤하늘에 수를 놨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날아왔죠. 중공군이 총공세를 시작한거죠.”

중공군이 이같이 총공세를 시작한 이유는 바로 400고지 점령 때문이다. 특히 삼각지대의 한 곳인 철원평야는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다. 400고지를 점령해야 수도 서울을 점령할 수 있기 때문에 인민군은 중공군의 힘을 빌렸다.

중공군은 400고지 일대에 2천여발의 포탄을 투하해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은 제38군 예하 제112·113·114사단 4만5천여명의 병사를 동원했다.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를 비롯해 경장비 제51연대, 53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 국군과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제213·955 포병대대 등의 미군이 맞서 싸웠다.

400고지에서 이 옹은 인해전술의 위력을 눈으로 실감했다.

“앞에 병사가 쓰러지면 뒤에 병사가 오고, 그가 쓰러지면 또 뒤에 병사가 계속 공격해 옵니다. 결국, 국군은 작전상 고지에서 산밑까지 후퇴하고 아침이 올때까지 기다리며 반격을 준비했죠.”

다음날 아침 6시. 날이 밝자 이 옹과 3중대원들은 화기 점검을 마치고 반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중대장의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3중대원들은 적군을 향해 돌격했다. 1차 고지는 8부능선이다.

총 동원된 화기를 앞세워 8부 능선을 향해 진격할 때, 복병이 나타났다.

“다쳐서 도망가지 못한 중공군이 커다란 돌 뒤에 숨어있다 갑자기 나타났어요. 산세가 험해 중공군이 어디 숨어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죠.”

이 옹은 눈 앞에 나타난 중공군의 뒷통수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수차례 내리쳐 쓰러뜨렸다. 그리고 발로 밟아 기절시켰다.

“마음속으로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 순간, 옆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 김일병이 적의 공격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이 옹은 본노를 참을 수 없었다.

“전우가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를 갈고 능선을 따라 올라갔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3중대는 8부능선을 점령했다. 고지 점령의 기쁨은 없었다. 사방이 온통 국군과 중공군의 시체로 가득했다.

전투는 계속됐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전우들의 얼굴이 바뀌었고, 중공군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 인해전술의 강도를 높였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총열은 24시간 적진을 향해 조준돼 있었고, 중대장의 작전명령만 기다렸다.

밤이면 중공군이 공격해오고, 아침이 오면 국군이 반격했다.

그리고 10월 15일.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9사단은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했다.

“그야말로 기쁨의 승리 깃발을 휘날렸습니다. 중대원 모두 만세를 외쳤죠.”

400고지 전투에서 국군은 21만9천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5천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중공군은 1만여명이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됐고 제38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9사단도 3천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휴전 소식

400고지 전투가 끝나고 이 옹은 일반 부대병력으로 복귀했다. 최전방은 아니지만, 병력 요청이 오면 언제라도 전장을 향해 나가야했다.

“최전방에 있으면 차라리 전황(戰況)이라도 알 수 있을텐데 일반 부대생활은 오히려 더욱 불안했어요.”

부대생활 중에 다행히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온 몸의 모든 신경은 최전방을 향해 있었다. 1953년 여름. 부대 내에서 휴전 협정 소식이 들려왔다. 이 옹과 부대원들은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상 체결을 미루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울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휴전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방에 있는 대원들은 더욱 초조해졌다. 국민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참 힘들었죠. 전방에서는 어떡해서든지 끝났으면 하는데 이 사정을 모르고 휴전만은 안된다고 외치고 있으니 오죽 답답했겠어요.”

그 사이에도 크고 작은 치열한 전투는 계속됐다. 휴전을 앞두고 서로 한치의 땅도 더 가지기 위해서였다. 국군의 금강산 1211 고지 전투, 양구 백석산고지 전투 소식에 전방에 있던 부대원들은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그리고 7월 27일에 드디어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 간에 휴전 협정됐다.

휴전 후에도 이 옹은 부사관 생활을 더하고 1968년 9월 중사로 제대했다.



▲ 제대 후….

제대 후 이 옹은 미8군 시설 공병대에서 근무했다.

영어는 중학교 때 화학기호를 외우면서 익힌 알파벳이 전부였지만, 미군에 근무하면서 영어회화가 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졌다.

최근에는 6·25참전용사 부천시지회 회원으로 전적지 순례 등 각종 모임 참석과 동시에 지회에서 일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려가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다.

하지만 이 옹은 참전용사를 향한 후손들의 마음이 해가 갈수록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제대로된 역사교육을 통해 6·25 전쟁에 대한 정확한 인식 및 정부의 지원 확충으로 참전용사들이 좀 더 윤택하게 생활했으면 하는 것이 이 옹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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