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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 마테호른과 마주 선 난 경이로움에 차마 눈물이 났다

이한숙 작가의 감성여행기
스위스 체르마트

 

나는 지금 오후 늦은 기차에 올라 몽트뢰에서 체르마트(Zermatt)로 이동 중이다. 오전에는 바쁘게 브베(Vevey)를 다녀왔다. 앞에 펼쳐진 호수 한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선 ‘포크’를 직접 보고, 산책길 정원의 장미꽃 사이에 서있는 찰리 채플린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볼 때면 영롱히 솟아오르고 하던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심벌, 삼각뿔 모양의 산봉우리. 해를 등지고 위엄있게 서있는 마테호른(Matterhorn·4천478m)의 모습은 내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것들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체르마트가 이번 여정에 낙점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 마테호른을 지금 보러 가는 길이다.

체르마트로 이동전 찰리 채플린의 도시 브베 들러

기차타고 마테호른 보러 가는 길 풍경에 취해 얼얼

예약 호텔은 별장같은 넉넉함 날마다 요리하기

즐겨 산악 하이킹 4시간 내내 마테호른은 ‘천의 얼굴’

해발 3천m 고르너그라트서 본 마테호른 탄성 절로

 

 

 

 

 


어디를 가나 스위스의 목가 풍경 뒤에는 알프스의 준봉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기차를 타고 미끄러지듯 풍경 속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와인 한 잔 마신 것처럼 기분좋은 방랑자의 취기가 몸에 퍼진다.

기차가 시온(Sion)을 지나 비스프(Visp)에 멈추자 내려서 체르마트행 산악기차로 갈아탔다. 저녁이 내리기 전의 부드런 햇살이 빨간 기차의 유리창 안을 가득 채우는 시간이었다. 해발 1천605m의 마을 체르마트까지는 한 시간 남짓 달린다. 협곡 사이를 가로지르며 올라가는 동안 그동안 비경 중의 비경과 만난다. 깎아지른 산자락이 코 앞에 다가오는 풍경은 탄성을 자아낸다. 기괴한 암벽과 노랗게 물들어가는 침엽수, 멋지게 낙하하는 폭포, 양쪽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와 그 밑의 아찔한 계곡들도 멋지기는 마찬가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도착하기 바로 전 역인 태쉬(Tasch)역에서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탔다. 나중에 보니 체르마트는 차량이 통제된 청정마을로 골프장의 미니카처럼 생긴 작은 전기차만 다녔다. 심지어 자동차 여행객마저 태쉬에 차를 세우고 기차로 체르마트 숙소로 이동해야했다. 그렇게 보존된 체르마트의 공기는 달랐다.

2박을 예약한 숙소는 역에서 불과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레지던스형 호텔로 알고 갔는데 주방과 거실이 넉넉한 원룸형 아파트여서 얼마나 감탄했는지. 현대식으로 재단장을 한데다 전통적인 샬레 인테리어로 멋을 낸 아파트는 호텔이 아니라 별장에 온 느낌을 줬다. 열쇠를 건네고 방 사용법을 알려주기 위해 달려온 주인에게 그 자리에서 하룻밤 더 연장을 부탁했다.

내 집이 생겼고 널찍한 주방에 조리 도구가 완벽히 갖춰져 있으니 입맛에 당기는 음식을 만들어먹을 생각에 한없이 부푼 친구와 나, 우리는 짐만 던져 놓고 길 건너편에 있는 수퍼마켓으로 달려갔다. 유명 관광지, 그것도 협곡 안쪽에 깊이 위치한 마을의 물가가 그렇게 저렴해도 되는건가. 눈을 의심하며 우리는 고기와 야채, 치즈, 아보카도, 올리브, 와인 등으로 신나게 장바구니를 채웠다. 집에 돌아와 물건을 펼쳐놓으니 피곤하게 방랑하던 노마드 생활이 갑자기 정착민 생활로 급전환되는 기분이었다.

친구는 날마다 요리에 정성을 바쳤다. 어느새 주방은 그녀의 성지로 변했다. 나는 보조 역할에 만족해야했다. 그녀가 만들어주는 요리는 별 양념이 들어가지 않는데도 놀랍도록 맛있었다. 그녀는 이전 손님이 놓고 간 고춧가루를 활용해 시원한 도가니탕에도 도전했다. 좀 쌀쌀했지만 우리는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고 어둠 속에서 옆 모습을 열어주는 마테호른을 바라보며 밥을 먹고 와인을 마셨다. 만년설로 빛나는 마테호른 봉우리는 영롱했다. 그토록 염원한 마테호른을, 어렸을 적 시골마당에 멍석 펴고 별을 올려다보듯 그렇게 올려다보고 있다니, 매일 저녁이 성스러운 축제였다. 온 맘으로 맞이하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와 한 폭의 그림이 된다는 것을 체르마트의 밤들은 일깨워주었다.

다음날 오전 우리는 좀 더 뜸을 들이며 마테호른을 즐기려고 산악열차 대신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마을 뒤편에 펼쳐지는 산책로를 따라 츠뭇(Zmutt)으로 올라갔다가 퓨리(Furi)를 거쳐 내려오는 4시간이 넘는 여정이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마테호른의 모습을 원 없이 봤다. 걷는 길의 각도에 따라, 높아지는 고도에 따라, 구름의 이동에 따라 천 가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마테호른과 만났다. 잠깐 사라졌어도 이내 다시 모습을 보여주는 봉우리는 우리 산책길의 북극성이었다. 길에는 기증한 자들의 이름이 생겨진 나무 벤치가 어디에나 있었다. 연인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 사람, 아이를 안고 쉬는 사람, 챙겨온 샌드위치를 꺼내 요기를 하는 사람,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쉬는 사람들, 그들의 풍경은 온 산을 노랗게 물들이는 키큰 알프스 침엽수의 풍경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산과 산 사이의 협곡 풍경이 유난히 아름다운, 어느 농가 뒤의 언덕 위에 머플러를 넓게 펴고 나는 그 위에 누웠다. 눈을 옆으로 돌리면 들풀과 야생화들이 눈높이에서 출렁이고 눈을 위로 돌리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내 몸의 소음이 잦아들자 주변의 소리들이 깨어났다. 안 들리던 소리들이 살아나고 모든 것이 더 생생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있으니 내 자신, 그곳에 천년만년 그렇게 있었던 듯 시간마저 정지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절대적인 평온 속에서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게 없었다.
 

 

 

 


츠뭇에는 전통 농가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곳의 한 식당으로 갔다. 식당의 테라스아래는 협곡이고 앞에는 멋진 만년설 산이 버티고 있었다. 맥주 한 잔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맥주 한 모금이 따끈한 햇살에 뎁혀진 목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갈 때의 감촉, 더 부러울 것이 없었다. 노트를 펼치고 ‘울고싶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일기를 썼다. 너무 좋을 때는 오히려 슬픈감정이 들곤 하는 것.

츠뭇에서 퓨리로 가는 길은 올라올 때 맞은 편 방향이 산허리였다. 완전히 다른 시야에서 왔던 길의 풍광을 내려다볼 수 있어 산책이 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르마트의 전경이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그 마을 안에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들도 그렇게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들일텐데. 각도 한 번 안 바꾸고 자신을, 혹은 그 누군가를 권태롭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내려오자마자 고르너그라트반(Gornergratbahn) 산악열차를 타러 역으로 갔다. 다행히 기차가 아직 운행되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고 추가로 할인을 더 해줬다. 고르너그라트반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발 3천089미터의 고르너그라트까지 30여분 올라가는 동안 마테호른의 비경이 숨김없이 펼쳐졌다. 비경을 품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 기차는 10분 정도 지나자 완전히 다른 방향, 그러니까 이태리 쪽의 준엄한 고봉들까지 보여주었다.

 

드디어 고르너그라트에 도착, 극적으로 마테호른 앞에 섰다. 큰 숨을 먼저 들아쉬고 차마 바라보기 힘든 것을 바라보듯 경건한 마음으로 봉우리의 전체 모습을 눈에 담았다. 탄성이 절로 터졌다.

쿨름호텔이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 다시 바라보았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일부러 계획했더라도 이렇게 완벽할 순 없었을 것이다. 붉은 노을이 마테호른을 휘감고, 마테호른을 엄호한 봉우리들까지 휘감자, 평생 경험하기 어려운 풍광이 펼쳐졌다. 장엄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고요하고 쓸쓸하고 동시에 가득 찬 이 기분을 어찌할꼬. 옆에 아무도 없이 내 안에서 감정이 고요히 폭발한다. (2편에서 계속)

/정리=민경화기자 m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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