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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여우] 카페 아프리카

[안휘의 장편 연재소설] 2. 예쁜 아이-1.

 

“아악! 왜 이래요, 사장님! 아악! …사람 살려!”


마지막으로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가운을 막 교복으로 갈아입고 난 뒤였다. 탈의실로 쓰고 있는 주방 옆 작은 창고에서 나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황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무렵, 카페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누군가 뛰어들어와 윤희에게 달려들었다. 굵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박천수. 작은 도시 동천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시내 한복판 번화가에서 가장 큰 건물인 이 그랜드 빌딩 건물주의 아들이자 윤희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2층 카페 아프리카의 대표이기도 했다. 


박 사장은 일이 있다면서 초저녁에 일찍 카페를 나갔었다. 문을 닫으려는 가게에 다시 들어서는 박천수를 보자 윤희는 ‘뭐 잊어버리고 간 것 있으세요, 사장님?’하고 물어보려고 입을 막 열려는 참이었는데, 다짜고짜 와락 끌어안고 홀 바닥에 구른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박 사장을 떠밀면서 윤희는 다시 한번 외쳤다.


“사장님! 아니, 아저씨! 이러지 마세요! 대체 왜 이래요?”


그러자 박천수가 윤희의 교복 상의를 거칠게 벗겨 내렸다. 투두둑 하고 단추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박천수가 덜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윤희야,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나를 좀 받아줘! 나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아저씨! 저 학생이에요! 아직 어리잖아요!”


그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다시 통사정하듯 말했다. 역한 담배 냄새에 섞인 술 냄새가 윤희의 얼굴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상관없어! 니가 너무 예뻐서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제발 가만히 있어 줘.”


남자의 완강한 손이 윤희의 양팔을 잡아 벌리면서 또 한 차례 몸을 바닥으로 내리눌렀다. 


“안 돼요! 이러면 저 죽어요. 사장님이 저 같은 어린아이에게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살려주세요, 사장님!”


윤희는 있는 힘을 다해 남자의 몸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목소리에 반쯤 울음이 섞여들었다. 그러나 박천수는 오른손으로 윤희의 교복 스커트를 순식간에 벗겨 내렸다. 


“윤희야. 내 말만 들어주면 너를 정말 끝까지 책임질 게. 뭐든지 다 해줄 수 있어. 나 진짜 너를 사랑해.”


순간, 카페 아프리카에서 일한 지난 다섯 달 동안 시급을 후하게 쳐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두 번인가, 쉬는 날 밖에서 따로 만나자고 하던 일도 기억이 났다. 유부남이었고, 워낙 친절한 사장이었기에 윤희는 추호도 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가슴속에 이런 흑심이 있었단 말인가. 박천수가 윤희의 팬티 끈을 거머쥐고 끌어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윤희의 오른손이 제압에서 풀려나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남자의 왼쪽 뺨을 후려쳤다. 얼마나 정통으로 세게 맞았는지 박천수의 얼굴이 옆으로 홱 돌아가면서 뿔테 안경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윤희는 남자의 몸에서 잠시 힘이 빠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박천수의 몸을 와락 밀치고 황급히 일어나 카페 문 쪽으로 뛰었다. 


“사람 살려요!”


옷을 추스를 여유가 없었다. 책가방 생각도 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윤희는 카페 출입문을 힘겹게 밀고 나와 계단을 뛰어내렸다. 건물 밖으로 나온 윤희는 길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지나가던 청년 둘이서 다가와 반나체의 윤희를 일으켜 세웠다. 


“오빠들! 저 좀 살려주세요. 우리 사장님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거기까지였다. 윤희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어쨌든 윤희가 끝내 당하지는 않았다니 다행이긴 한데…아무리 생각해도 분해서 못 견디겠네요. 어째서 그놈이 내 딸에게 이런 짓을 했을까….”


어머니였다. 잠도 아닌 것이, 꿈도 아닌 것이…산만큼 커다란 코뿔소가 달려드는 환상이 단속적으로 이어졌다. 아무리 달아나도 코뿔소는 계속 쫓아왔다. 죽으라고 달리다가 돌아보면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코뿔소의 코에 걸린 커다란 뿔테 안경이 보였다. 그 굵고 커다란 안경이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코뿔소의 뿔테 안경에 진저리를 치며 몽환에서 흐릿하게 깨어날 무렵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은 채 귀만 열어두었다. 시큼털털한 술 냄새가 먼저 후각을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병실에 와 있다는 증거였다. 아버지의 식식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집 파출부일 당장 때려치워. 박태호 그놈하고 아들 박천수 새끼 두 놈 다 죽여버릴 거야.”


윤희는 그제야 어머니가 수년째 박태호 회장네 집으로 파출부 일을 다니고 있던 일을 기억해냈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 알코올 중독자가 돼버린 아버지를 대신한 어머니의 품팔이 덕분으로 윤희네가 먹고사는 처지가 된 건 오 년쯤 된 일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약자인데 어떻게 해요? 계집아이가 그렇게 능욕당한 일을 세상에 떠벌려서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여차하면 우리가 이 동천시를 아주 떠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이런 썅? 너 왜 박태호 그 대머리 새끼 편을 들고 있는 거야?”


또 시작이구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한 옥타브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는 하고한 날 술을 마시고 들어와 어머니를 닦달하면서 다그쳤다. 의처증이라던가, 아버지는 어머니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병에 걸려 있는 듯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어머니가 아버지의 결정적인 치부 격인 샘 다방 여자 이야기를 꺼낼 것이고, 아버지의 얼토당토않은 시비와 거침없는 폭언이 이어질 게 뻔했다. 윤희는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여기 병원이에요! 여기까지 와서 두 분이 꼭 이렇게 큰 소리로 싸워야 해요? 제가 지금 다쳐서 치료 중이잖아요! 제발 좀 조용히 하세요.”


3인실 병실에 다른 환자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한참을 식식거리고 서 있던 아버지는 점퍼를 집어 들고 휭하니 병실을 나갔다. 


어머니가 어깨를 들썩이며 꺽꺽 소리죽여 울었다. 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깊은 찰과상을 입은 무릎이 쓰라렸다. 멍든 왼쪽 어깻죽지도 욱신거렸다. 


담임인 장시욱 선생과 함께 교회에서 윤희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쳐주는 미국인 선교사 스테파니 선생이 다녀갔다. 두 사람은 병원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대학교 시절 연극반 동아리 활동을 했다는 국어담당 장 선생은 윤희에게 연극배우의 꿈을 심어준 은사였다. 장 선생은 윤희가 예쁘게 생긴데다가 뛰어난 배우 기질을 타고났다고 늘 칭찬했다. 장차 훌륭한 연극배우가 될 것이라는 덕담도 아끼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섬세하고 따뜻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영어를 잘하는 윤희에게 유학을 권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떠난 다음 어머니는 한걱정을 늘어놓았다. 


“벌써 동천시에 소문이 다 난 모양이네. 다들 무슨 이야기들을 퍼뜨릴까, 걱정스럽구나.” 


“괜찮아, 엄마. 소문이야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힐 건데, 내가 잘 견뎌볼게. 언젠가 책에서 읽은 건데, 길 가다가 재수가 없어서 차에 치이거나 지나가는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랬어.”


어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게 보였다.


“아이고, 이 어린 것이 어미를 달래려고 별말을 다 하는구나. 그래, 네 말마따나 재수가 없어서 교통사고가 났다고 생각하자꾸나.” 


그때 병실로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소리 죽여 통화를 마친 어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왜 그래, 엄마? 누구 전화야?”


“박 회장댁에서 같이 일하는 아줌마야.”


“왜? 뭐라고 하셨는데 엄마 표정이 그래?”


“네 아버지가 박 회장댁에 나타나서 창문을 다 때려 부수며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갔다는구나.”


“…….”


“박 회장댁을 나가면서 경찰서를 박살 내겠다고 했다는데…이 인간이 정말 큰일을 저지르면 어떻게 하냐?”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내려앉고 있었다. 

 

 ▶▶ 윤희는 기가 막힌 소문을 듣게 됩니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련을 윤희는 어떻게 감당해 나갈까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다음 주 금요일 후편 ‘[3] 예쁜 아이 -② 아버지의 비밀’에서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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