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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여우] [18] 거꾸로 흐르는 강

[안휘의 장편 연재소설] ① 꿈의 이면

  • 안 휘
  • 등록 2020.11.13 06:00:00
  • 16면

 

 

 

… “…처음이야?” “…네.” “그런 줄 몰랐어. 윤희 씨가 워낙 조숙해서…. 미안해서 어쩌지?” 최현규의 미안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왜 미안하다고 했을까. …

 

 

기간이 짧았지만,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막을 올린 일주일간 윤희는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분주하고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신문에도 커다란 사진이 났다. ‘혜성 같이 나타난 연극계의 기대주…’ 김도숙 기자가 쓴 주간 스타 스토리 기사 말고도 여러 신문 문화면에 비슷한 타이틀이 걸렸다. 두 사람이 보여준 진짜 입맞춤 연기에 관해서도 호평 일색이었다. ‘연극을 위해 혼신을 불사른 정열…’이라는 칭찬도 있었다. 김도숙 기자는 연극의 제목을 ‘윤심덕 in 나폴리’로 정하고도 윤심덕과 김우진이 이탈리아로 도피한 이야기를 마지막 장면에서 독백처럼 살짝 노출한 것도 절묘한 연출이었다고 평가했다.

공연이 끝난 날 두물머리 수련장에서 쫑파티가 열렸다. 백두 단장은 오지 않았다. 이민지도 참석하지 않았다. 즐거워야 할 회식이었으나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그래서였던지, 술판이 벌어지자 배우들은 많은 술을 마셨다. 윤희도 제법 여러 잔의 소주를 마셨다. 연극 ‘윤심덕 in 나폴리’에서 연출가로 데뷔한 한상석이 윤희에게 다가와 술잔을 권했다.

“스타 탄생이야. 윤희 씨는 타고난 연기자야.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윤희는 한상석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최현규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그는 회식 자리 한쪽에 앉아서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마냥 밝지 않은 그의 표정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윤희는 그에게 말을 걸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점점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문득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정우가 특유의 입담으로 연극공연 도중에 있었던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주변을 많이 웃겼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올려보려는 몸짓으로 보였다. 두물머리 수련장이 취기로 가득 차면서 일부 단원들은 쓰러져 자기도 했고, 또 다른 한패는 무슨 일인지 목에 핏대를 올리기도 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최현규가 윤희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밖으로 나갔다. 윤희는 자석에 끌린 듯 그를 따라나섰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두 사람은 강가 잔디밭에 마주 앉았다. 보름달이 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최현규는 조각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 윤희의 가슴이 박동을 시작했다.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서로 안고 입맞춤을 했다. 무대 위에서 하던 연기 키스와는 비교가 안 되는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최현규가 부드러운 동작으로 윤희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윤희는 거부하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의 손길이 닿을 적마다 감전된 듯 저린 느낌이 일었다.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윤희는 진심을 담아서 비로소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게 연기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최현규는 윤희의 옷을 다 벗긴 다음 오랫동안 애무했다. 달아오른 가슴 때문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최현규의 단단한 몸이 처음 윤희의 몸으로 힘차게 들어왔다. 아픈 느낌이 너무 강해서 당황스러웠다. 신음을 내며 남자의 몸을 더욱 힘차게 끌어안았다. 최현규의 몸놀림이 점점 더 격렬해졌다.

얼마나 그랬는지 모른다. 최현규의 건장한 팔이 좀처럼 윤희를 놓아주지 않았다. 붙어 있던 두 사람이 떨어졌을 때 기력이 모두 소진된 두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윤희의 아랫도리에서 다시 희미한 통증이 솟아올랐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최현규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처음이었어?”

목에 걸린 대답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최현규가 다시 물었다.

“…처음이야?”

“…네.”

“그런 줄 몰랐어. 윤희 씨가 워낙 조숙해서…. 미안해서 어쩌지?”

최현규의 미안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왜 미안하다고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기를 함께 했을 뿐, 그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나 끝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최현규는 말없이 윤희를 안아 주었다. 그러다가 다시 살며시 입술을 포개왔다.

*

두물머리에서 대학로 셋집으로 돌아온 다음에야 윤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실감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최현규는 왜 미안하다고 했을까. 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이 수시로 떠올랐다. 내가 정말 사랑에 빠진 건가. 이런 게 사랑이라는 건가. 내가 다시 연락할게……. 헤어지면서 최현규는 낮은 목소리로 윤희에게 말하고 떠났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소식이 없었다.

연극 ‘윤심덕 in 나폴리’의 쫑파티 분위기가 왜 그랬는지는 금세 드러났다. 극단 카프카는 멈춰 서고 있는 게 분명했다. 며칠째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이민지에게서도 연락이 끊겼다. 전화기도 꺼져 있었다. 갑자기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었다. 뼛속 깊이 박혀 있던, 연극공연을 마무리하느라고 누적된 피로가 한없이 스멀거리며 솟아올랐다. 일어나서 움직이면 금세 까라지면서도 눈을 감아도 잠이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불안과 혼란이 동시에 윤희를 덮치고 있었다. 최현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고, 이민지도 소식이 닿지 않았다. 형언키 어려운 불길한 기분이 먹물처럼 스며들었다.

손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정우는 짐을 챙기고 있었다. 카프카가 멈춰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윤희에게 사무실에 있던 개인물품을 챙기고 있는 손정우의 모습이 긴장을 던져왔다.

“무슨 일이 있나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물었다. 상자에다가 이것저것 물건을 정리해 넣던 손정우가 손을 멈추고 싱긋 웃는 표정으로 윤희를 맞았다.

“그간 집에서 푹 쉬셨어요? 워낙 고생이 많으셨잖아요.”

“예. 많이 피곤했어요. 잠도 잘 안 오고 컨디션 회복이 쉽지 않네요. 그런데, 우리 극단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손정우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되물었다.

“아직 모르세요?”

“예? 뭐를요?”

윤희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손정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딱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리고는 저쪽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신문지를 가져와서 건네주었다. 사회면이었다. 큼지막하게 찍힌 백두 단장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최현규의 사진도 함께 있었다. 윤희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여배우 김미리 성폭행 사건 전모 드러나 …여성 인권단체가 기자회견 통해 밝힌 내용 충격적 …백두 단장 수년간 상습 성폭행, 배우 최현규도 또 다른 성폭행 혐의 …김미리 배우 “백두와 최현규가 수시로 성폭행했다” 증언…….’

제목만으로도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놀라운 대목은 또 있었다. 잠적했다가 여성단체를 찾아간 김미리는 그간 극단 카프카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고백했다. 그녀의 고백 중에는 “여배우 이민지도 백두 단장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함께 들어있었다.

언니도? 윤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리의 힘도 순식간에 풀렸다. 이를 어째야 하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자에 주저앉아 신문에 난 기사를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시 읽었다. 다르게 읽을 여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거짓말이죠?”

자신도 모르게 비명처럼 질러대는 질문에 손정우는 그저 딱하다는 눈빛만 던질 뿐 말이 없었다.

 

=> 하루아침에 무너진 짧은 첫사랑. 윤희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다음 주 ‘[19] 거꾸로 흐르는 강-② 길 잃은 새’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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