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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의 아르케] 언론의 객관보도는 불가능한가?

 

언론학자와 저널리스트들은 진실보도를 강조하면서 객관보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뉴스의 취사선택 등 취재보도의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든다. 객관보도를 부정하면서 관점이나 다양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진실은 보편적이어서 주관이 개입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인간의 주관적 의식에서 독립되어 있는 객관의 영역에 있다는 뜻이다. 불가피하게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객관보도가 불가능하다면 객관의 영역에 있는 진실을 무슨 방법으로 확인해서 보도할까? 이것도 불가능하지 않나?

 

객관성이라는 것은 저널리즘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철학에서 실재론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학문이라는 게 진리를 추구하는 건데, 진리 인식이 불가능하다면 학문 자체가 성립할 수도 없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모태로서 학문 활동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러셀은 “모든 진리는 보편자를 내포하며, 참된 모든 인식은 보편자들과의 직접 대면을 수반한다.” 라고 했다. 감각의 영역에 있는 것들을 개별자라 하고, 개별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 것을 보편자라 한다. 이 보편자가 바로 객관적 실재요 진실이 된다.

 

객관적 실재는 파르메니데스가 말 한바, 변하지 않는 항구적인 일자(the One)로서의 ‘존재’다.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라고 했다. 이데아는 보편자로서 개별적이지 않기 때문에 감각의 세계 즉 주관의 영역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성이 작동하는 객관의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 러셀은 변화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본질의 불멸성이라는 점에서 존재론을 인정했다. 본질은 원자의 성질처럼 변하지 않는다.

 

취재보도의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된다는 것은 경험의 영역을 의미한다. 경험이라는 것은 오감의 작용으로서 대체로 진실은 그곳에 없다. 감각기관의 작용은 감성적이고 변화무쌍하다. 이 과정에서는 사실, 관점, 다양성 등이 중요하다. 진실은 그 다음 과정으로서 이성이 작동하는 객관의 영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사실이나 관점, 다양성이 중요한 것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객관성의 부정은 주관적 의견이 난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저널리즘에서 관점이나 다양성을 앞세우면서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면 비(非)실재 즉 가짜뉴스를 분별해낼 존재론적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가치론적 아노미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 가짜뉴스가 활개를 치는데도 속수무책인 현상은 바로 객관보도를 부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목표를 상실한 무법천지의 세상과도 같다.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사실을 선택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여론을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코로나-19 백신이 바닥났다든지 K 방역이 실패했다든지 등의 허위조작정보들이 횡행하고 있다. 경계할 일이다.